요한계시록 18:09-19 악의 세력에 대한 최후의 멸망 3
: 바벨론을 위한 애가(哀歌) - 세상의 부요함과 그 허무한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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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전반부에서 한 천사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그 멸망을 선포한 후, 이제 장면은 땅으로 옮겨져 그 멸망을 목격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바벨론의 죄악된 시스템에 기생하여 부와 쾌락을 누리던 세 부류의 사람들—땅의 왕들, 상인들, 그리고 선원들—이 부르는 세 편의 장송곡(lament)을 차례로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들의 슬픔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는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와 쾌락의 원천이 사라진 것에 대한 이기적인 통곡일 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상이 추구하는 모든 부와 권세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얼마나 순식간에, 그리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보게 되며,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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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0절 하나님의 심판은 견고한 성 바벨론을 일순간에 무너지게 합니다.
: 왕들의 애가 - 권력의 허무함
하나님을 떠난 세상 권력(왕들)은 바벨론의 힘에 빌붙어 함께 죄악된 사치를 누렸으나,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지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멀리 서서 그 허무한 종말을 지켜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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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과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울고 가슴을 칩니다. 그들은 바벨론이 받을 고통이 두려워 멀리 서서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라고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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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행하고 사치하던 왕들 : 이 왕들은 바벨론, 즉 로마 제국과 불의한 정치적 동맹(영적 음행)을 맺고, 그 힘을 이용하여 백성을 착취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힘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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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서서 흘리는 이기적인 눈물 : 그러나 바벨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자, 그들은 바벨론을 돕기는커녕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멀리 서서’ 지켜볼 뿐입니다. 그들의 눈물은 동맹의 파멸에 대한 의리 있는 슬픔이 아니라, 자신들의 쾌락과 안전의 기반이 무너진 것에 대한 이기적인 통곡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심판의 불길이 자신에게 옮겨붙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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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 그들이 그토록 견고하고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제국의 멸망이 ‘한 시간’, 즉 순식간에,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허무하게 임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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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성 바벨론은 악의 세력과 그에 부응하는 나라들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는 로마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폭력과 포악과 부에 대하여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부응하여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음행과 사치는 바벨론과 로마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하루 아침에 망하게 되면서 불타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더이상 음행과 사치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울며 가슴치는 것 같고, 바벨론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서서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작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고 일순간에 사라질 바벨론처럼 자신들의 음행과 사치에 대해서도 그럴 줄 모르고, 오히려 바벨론의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염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애가를 부르며 정작 깨달아야 할 것은 이 음행과 사치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앞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채 일순간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는 허망한 것이라는 것인데도 이들은 애가만 부르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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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의 권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특정 정치 세력이나 인물에게 과도한 기대를 걸고, 마치 그들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구원자인 것처럼 의지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모든 권력은 결국 바벨론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과 충성은 이 땅의 어떤 ‘왕’에게도 있지 않고, 오직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어야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면서 사치하는 일들이 만연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없는 이들은 그들을 부러워하고 음행과 사치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끝이 언제인지도 모른체 눈앞의 신기루 같은 사치와 음행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행 앞에 타협하고 부러워한다면 이 말씀을 통해 한 시간 곧 하루 아침에 허무하게 스러질 것을 깨닫고 속히 음행과 사치의 길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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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7a절 하나님의 심판은 바벨론으로 치부한 모든 이들이 애가를 부를 정도로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합니다. : 상인들의 애가 - 재물의 허무함
바벨론의 경제 시스템에 편승하여 온갖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던 상인들은, 그 시스템이 붕괴되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대신 오직 잃어버린 부(富)만을 슬퍼하며 통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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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상인들도 바벨론을 위하여 울고 애통합니다. 이는 다시는 그들의 상품을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금, 은, 보석 같은 귀금속부터 시작하여, 값비싼 의복과 향품, 사치스러운 가구, 온갖 음식과 가축, 그리고 가장 비극적으로는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치스러운 상품 목록을 길게 나열합니다. 그들은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라고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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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의 슬픔의 이유 : 이들의 슬픔은 매우 노골적이고 정직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멸망 자체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자기들의 상품을 살 자가 없음이로다”라고, 즉 자신들의 돈벌이가 끝난 것을 슬퍼합니다. 그들의 신은 바벨론이 아니라 ‘돈’(맘몬)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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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된 경제 시스템의 목록 : 나열된 상품 목록은 단순한 물건 리스트가 아니라, 바벨론의 경제가 얼마나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우며, 비인간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발장입니다. 특히 마지막에 언급된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human lives)”은 이 시스템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엄한 인간마저도 사고파는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경제,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바벨론 경제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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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경제 원칙 전복 : 하나님께서 명하신 질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물질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질서는 이 모든 것을 전복시킵니다. 그들은 ‘물질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이용하며, 사람을 다스리고 착취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 즉 인간을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보고, 약한 자를 착취하며, 무한한 소비를 부추기는 문화는 바로 이 바벨론의 경제 원칙과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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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 왕들의 애가에서처럼, 상인들의 애가에서도 그 모든 부가 ‘한 시간’ 만에 사라졌다는 허무함이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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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경제 원칙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돈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까? 이 말씀은 ‘청부론’이나 ‘왕의 재정’과 같은 이름으로 부(富) 자체를 신앙의 목적인 것처럼 가르치는 번영신학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물론 모든 부자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가 혹시 다른 이의 희생과 착취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닌지, 나의 소비 생활이 불의한 경제 구조에 동참하는 것은 아닌지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경제 활동 속에서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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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b-19절 선원들의 애가 - 세상 시스템의 허무함
바벨론의 글로벌 무역 시스템에 종사하며 부를 누렸던 모든 사람은, 그 시스템의 완전한 붕괴 앞에서 자신들의 생계 수단이 사라진 것을 슬퍼하며, 그 거대했던 도시의 허무한 종말에 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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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선장과 선객과 선원들과 같이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바벨론이 불타는 연기를 보고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고 외칩니다. 그들은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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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스템의 종사자들 : 왕들과 상인들이 시스템의 최상위층이었다면, 선장과 선원들은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실무자들이자 중간 계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벨론의 붕괴가 단지 최상위층뿐만 아니라, 그 시스템에 의존하여 살아가던 모든 계층에게 미치는 전면적인 파국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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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 : 이들의 외침은 절망적인 탄식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외에는 다른 대안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바벨론은 세상의 전부였고,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이제 한 줌의 연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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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 세 번째 애가에서도 ‘한 시간’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며, 세상 시스템의 갑작스럽고 완전한 붕괴를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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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세상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학교, 직장, 사회, 국가라는 시스템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스템 자체가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시스템은 유한하며, 언젠가는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이 땅의 무너질 ‘큰 성’이 아니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만이 세상의 붕괴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너머에 있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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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666표를 받은 이들은 매매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고 성령의 인침을 받은 이들은 매매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를 경제적으로 설명하면 당대 로마 제국주의 경제와 사치는 그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나라의 가르침과는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필요 이상의 부를 축적하는 것은 당연히 자원의 유한성으로 인하여 다른 한 켠에서는 그만큼 갖지 못한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경제 활동은 예나 지금이나 빈인빅 부익부를 부추기고, 부의 편중과 불로소득이 난무하게 되고, 온갖 폭리와 사기 그리고 독점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돈과 권력이 있는 일부의 사람들은 치부하겠으나 절대 다수의 민중은 헐벗고 굶주리며, 특히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정직과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많은 손해를 감수하고 부정한 방법이 아니기에 당연히 매매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것을 개의치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되는 일이면 영혼까지 팔아가며 경제적 이익을 탐한 이들은 바벨론 곧 로마의 모든 일들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유익이 되는 일에 모든 것을 눈감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종들과 사람의 영혼까지 파는 인신매매도 서슴지 않으니 이들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 곧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인간을 상품처럼 매매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간과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바다를 통해서도 해상 무역이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가 멸망하게 되어 불타는 연기를 보고서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애통하며 애가를 부릅니다. 이들도 상품을 수송하면서 치부한 이들입니다. 부정한 물품들인 줄 알면서도 그리고 그렇게 운송을 담당하는 이들은 그것이 무엇이 되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눈감고 외면하고 치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그러한 운송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로마가 망하게 되니 또한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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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론>이나 <왕의 재정>등의 이론을 성경적 경제론이나 부를 축적하는 복의 길이라는 것과 같은 주장들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부자가 다 문제가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구조와 지금같은 사회경제 구조에서는 모든 경제체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불로소득이든 여러가지 형태로 치부하여 마침내 자신의 필요 이상으로 갖게 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자원은 유한합니다. 그 유한한 자원을 서로 필요한 만큼 쓰고 필요 이상을 탐하지 않으며 공평하게 분배되어 먹고 마시고 누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기업과 기업 사이에서도, 기업과 개인 사이,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반드시 빈부의 격차가 있습니다. 문제는 누구든지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에서 모든 불균형과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켠에서 더 많이 소유하게 되면 당연히 반대편 누군가는 결핍으로 고통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개인의 게으름과 무능을 떠나서 자원 자체가 한켠으로 쏠려버리기 때문에 더이상 노력하고 힘을 써도 없는 것을 만들고 소유할 수 없는 구조악에 갇히기에, 최소한의 소득도 제대로 얻지 못한채 점점더 가난해 지게 됩니다. 반면 많이 가진 이들은 그것을 가지고 더 많이 이익을 내고 소유를 불려가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해 집니다. 돈이 돈을 버는 일로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더 심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소유로 판단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유가 아니라 관계가 행복을 좌우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소유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떡을 먹지 않고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살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곧 지으시고 세우시고 목적하시며 이루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물질은 잘 다스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 기본을 혼돈해서는 질서가 무너집니다. 물질을 경배하고 사랑해서도 안되고 종노릇 해서도 안되고 오직 잘 다스리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이용하거나 경배하여 추종하며 사는 것도 안됩니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오직 우리를 지으신 우리 하나님만이십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의 뜻대로,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이 응답해주길 바라는 것은 더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경제활동 하나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며 물질을 다스리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과 겸하여 돈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결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불의의 세력과 결탁하여 이익을 얻고 음행을 취하는 일들, 사람을 서열화하고 상품화 하면서 값을 매기는 문화, 부정부패로 치부하여도 많이만 가지면 된다는 방식, 더 많이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하는 경제활동,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지면서 결핍한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 이기적인 행태, 불로소득 등이 여전히 난무하는 세상 한 복판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부가 허망하게 일순간에 그리고 하루아침에 망할 때에 그 모든 것들이 패망을 막거나 피하는 데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또 하나님의 심판 앞에 그 모든 행위를 따라 심판하심을 기억하고 지금 우리의 경제활동에 거룩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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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며
공평과 정의로 행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며
견고한 성 바벨론과 포악한 로마를 심판하신 하나님 아버지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하길 바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활동을 행하며
필요 이상을 소유하려하고 또 지금 가진 것에 있어
이웃과 즐거이 나누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지금 우리의 경제활동에 거룩함을 잃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보게 하옵시며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진 것으로 인하여
이웃을 결핍하게하고 힘들게 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면서
없으면 구하고, 많으면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따라
아낌없이 나누고 섬기며 살리는 일에 사용하게 하옵소서.
너무 부하여서 주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은 자 되지 않으며
너무 가난하여 주님을 원망하지 않길 또한 바라나이다.
사랑의 빚 외에는 빚지지 않은 인생으로 살게 하옵소서.
이 땅의 교회가 경제적 고통을 당하는 자들의 이웃이 되어서
아낌없이 주신 것들을 나누며 공평과 정의가 흐르는 나라로
함께 세워지는 나라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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