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8:01-08 악의 세력에 대한 최후의 멸망 2
: “무너졌도다 바벨론이여!”: 하나님의 부르심과 심판
17장에서 큰 음녀 바벨론의 정체가 폭로된 후, 18장은 마침내 그 거대하고 화려했던 세상 나라의 처참한 멸망을 선포하는 장엄한 장례식 노래와 같습니다. 한때 온 세상을 지배하고, 모든 왕과 상인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렸던 바벨론의 몰락은, 이 땅의 헛된 영광이 얼마나 허무하며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힘과 풍요를 부러워하던 성도들에게는 경고이며, 그 압제 아래 신음하던 성도들에게는 가장 큰 위로와 해방의 소식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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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하나님은 큰 성 바벨론과 땅의 왕과 상인들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 큰 성 바벨론의 몰락 - 죄악의 실상이 드러나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임할 때, 세상의 화려한 문명(바벨론)의 실체는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임이 드러나며, 그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타락으로 인해 그 몰락은 이미 확정되었음이 선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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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큰 권세를 가진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해집니다. 그가 힘찬 음성으로 외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은 진노의 포도주를 만국이 마셨으며, 땅의 왕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의 상인들도 그의 사치의 세력으로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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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가운데 드러난 실상 : 심판은 빛의 임재로부터 시작됩니다. 천사의 영광으로 땅이 환해지자, 바벨론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추악한 실체가 드러납니다. 세상이 ‘위대한 문명의 중심지’라고 부르던 그곳은, 영적으로는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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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 천사는 바벨론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예언하지 않고, 이미 ‘무너졌다’고 과거형으로 두 번이나 반복해서 선언합니다. 이것은 ‘예언자적 과거 시제’로서, 그 사건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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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세 가지 죄악 : 바벨론이 무너진 이유는 세 가지 총체적인 타락 때문입니다.
종교적·문화적 타락 :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 모든 나라를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쾌락주의에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치적 타락 : “땅의 왕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세상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대신, 바벨론의 힘과 결탁하여 불의한 통치를 행했습니다.
경제적 타락 :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바벨론의 경제 시스템은 정의로운 부의 분배가 아닌, 약한 자들을 착취하고 극단적인 사치와 탐욕을 추구함으로써 유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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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은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므로 말미암아 많은 것을 수입하는 것을 통해 부와 사치가 극에 달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한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합니다. 땅의 왕들은 그와 더불어 음행합니다. 이것은 정당한 방식으로 치부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집니다. 바벨론의 탐욕이 주변 국들을 빈국으로 만든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유한한 세상의 자원을 힘있는 자의 폭력과 착취로 필요 이상의 자원을 가졌을 때 힘없는 이들은 당연히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힘있는 자들의 탐욕은 한켠에 힘없는 자들의 생명을 위협받는 궁핍으로 내어 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가 되고,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것,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습니다. 온갖 사치와 사기와 부정과 부패와 탐욕이 점철 된 곳으로 노예들의 피가 쌓이고 부가 축적될수록 그들의 죄악도 그만큼 적나라하게 쌓여갔던 것입니다. 바벨론은 자신들이 가진 경제력과 무력과 힘으로 주변국들을 약탈하고 정복하고 지배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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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화려한 미디어와 문화는 끊임없이 우리를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만듭니다. 정치와 경제 시스템은 종종 정의보다는 힘의 논리와 탐욕을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는 이 바벨론의 실체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분별할 때, 우리는 그 화려함에 속지 않고 그 안에 도사린 영적 어둠과 불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빛된 삶은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의 죄악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런 빛을 싫어하는 세상은 성도를 핍박하고 불편해 합니다. 또한 세상은 힘과 폭력과 무력을 통해서 치부하고, 통치자들과 상인들도 탐욕으로 말미암아 이웃을 향하여 착취와 부정을 서슴치 않습니다. 결국 이웃을 사랑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이는 곧 귀신이 하는 일이고, 더러운 영들이 행하는 가증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큰 성 바벨론이든, 그에 동조한 통치자와 상인들이건 그가 행한대로 보응하시기에 이 불의한 왕과 상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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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십니다.
: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 죄에서 떠나라는 거룩한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멸망이 확정된 바벨론 가운데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그 죄악된 시스템으로부터 분리되어 함께 심판받지 말라고 하는 사랑과 은혜의 긴급한 탈출 명령을 내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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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하늘로부터 또 다른 음성을 듣습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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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아” - 긍휼의 부르심 : 멸망 받아 마땅한 죄악의 도시 한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 안에 있는 ‘내 백성’을 기억하시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과 보호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자기 백성을 구별하여 지키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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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나오라” - 분리의 명령 : 이 명령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고, 롯을 멸망 직전의 소돔에서 나오게 하셨으며, 이스라엘을 포로 된 바벨론에서 돌아오라고 명하셨습니다. ‘나오라’는 명령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주를 넘어, 영적, 윤리적, 가치관적인 완전한 분리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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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이유 : 하나님께서 나오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 바벨론의 시스템 안에 머물면서 그 죄악된 방식에 동참하고 타협하는 것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 죄에 동참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심판에도 함께 참여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그 멸망에 함께 휩쓸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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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 곧 악인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따르거나 타협하거나 순응하지 않고 단절해야 합니다. 그래서 멸망으로 가는 이들의 재앙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께서 한걸음 씩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따르고,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고, 시대를 읽는 눈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갖춰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벨론 같은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종교까지도 이러한 부분에 맛들이면 곤란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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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에게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주님의 음성은 어떻게 들려옵니까? 그것은 세상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따르려는 탐욕에서 나오라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음란하고 폭력적인 문화를 즐기는 자리에서 나오라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불의한 이익 앞에서 신앙 양심을 타협하려는 유혹에서 나오라는 명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이라고 해서 안심하고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길이 멸망으로 향하는 바벨론의 길은 아닌지 늘 분별하며, 비록 좁고 외롭더라도 거룩한 구별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계속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에는 사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사명을 따라 살아가기도 벅찬데, 바벨론의 죄에 참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벨론이 살아간 가치와 생활 방식과 여타의 일들에 대해 단절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의 결과를 수없이 확인하면서도 악인들의 꾀와 그 길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과 가야 할 길과 행할 길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 길이 어쩌면 멸망의 길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좁은 길이라고 다 옳은 길은 아닙니다. 어떤 길이든 그것이 주님이 허락하시고 인도하시고 함께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우리는 분별하는 지혜를 갖고 살펴 봐야 합니다. 그래서 바벨론인지 아니면 거룩한 길인지 제대로 알아야 함께 죄에 참여하지 않고 함께 재앙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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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절 하나님은 바벨론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고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강하신 자이십니다.
: 하늘에 사무친 죄와 강하신 심판주
하나님께서는 교만과 불의로 가득 찬 바벨론의 모든 죄악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셨다가, 그의 교만한 만큼 철저하고 신속하게 심판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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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이 심판받는 이유는 그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께서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사치한 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주십니다. 바벨론은 마음속으로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교만하게 말하지만, 그에게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의 재앙이 ‘하루 동안에’ 이를 것이며, 그는 불에 살라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고 선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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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사무친 죄와 하나님의 기억 :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바벨론의 죄가 하늘에 닿을 만큼 가득 차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의 모든 불의를 “기억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이제 그 기억에 근거하여 행동하실 때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인내의 시간이 끝나고 심판의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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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로운 보응 : 심판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원칙에 따라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갑절로 갚아준다’는 것은 단순히 양적인 두 배가 아니라, 완전하고도 철저한 보응을 의미하는 법적 용어입니다. 그가 누렸던 영광과 사치는 그대로 고통과 애통함으로 되돌려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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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과 갑작스러운 멸망 : 바벨론의 가장 큰 죄는 교만입니다. “나는 여왕이라… 결코 애통함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그의 독백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스스로의 힘과 부를 의지하며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는 모든 인본주의 문명의 교만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교만 때문에, 그의 심판은 예고 없이 ‘하루 동안에’ 임할 정도로 신속하고 완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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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 바벨론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강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멸망이 확실한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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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간구가 아니어도 하나님은 바벨론 곧 악인들의 죄악의 관영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의 죄악과 불의한 일을 낱낱이 기억하고 계신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죄악이 관영하면 더이상 간과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행한대로 갑절로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스스로 사치하고 영화롭게 한 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애통함을 당하지 않겠다고 말해 보지만 주님은 단 하루 동안에도 재앙들이 이르러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으로 불에 사르는 심판을 행하실 수 있는 강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주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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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이 세상의 힘이나 악의 번성함을 보고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하나님 없이 영원할 것 같던 모든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심판받습니다. 반면, 이 진리는 억압받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눈물과 순교자들의 피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시는 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수를 우리의 손에 맡길 필요 없이, 모든 것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강하신 주님을 신뢰하며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행위보응의 원리(행한대로 보응하시는 원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바벨론 곧 땅에 속한 자들은 그런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긍휼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인자하심과 오래참으심에 대한 은혜를 제대로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 가운데 죄악이 관영하고 불의한 일들이 쌓여갈 때마다 인내하시지만 결국에는 심판하실 날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각 사람이 자신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행한대로 보응을 받는 날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땅의 영화는 한순간이지만 하늘의 안식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세상에 살면서 불의한 죄악을 행하는 것도 참고 선을 행하며 고통과 애통함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이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잠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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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인간의 죄와 불의한 일을 기억하시며
그를 심판하시는 강하신 주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할 사명에 충성되지 모함과
무너져가는 세상의 방식을 부러워 했던 것과
만국이 무너져 가는 것 속에서도 구령의 열정이 식어버린것과
세상의 죄악에 참여하였던 죄를 고백합니다.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하길 원합니다.
경제적 유익 앞에 거짓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고
정직하게 오래 길게 조금씩 나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지금 물질의 노예가 되지도 말고
그래서 죄인들의 길과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땅에 속한 자들이 받을 재앙을 분명하게 알고
우리고 복있는 자의 길로 행하게 하옵소서.
임박한 심판의 때에 관영한 죄악과 불의한 일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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