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6:01-11 악의 세계에 대한 재앙 - 일곱 대접 2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 일곱 대접의 의로운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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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에서 하늘의 성전 문이 열리고, 승리한 성도들의 찬양이 울려 퍼지는 장엄한 준비가 끝난 후, 16장은 마침내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인 ‘일곱 대접 재앙’이 땅에 쏟아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이 부분적(1/3)이며 경고의 성격이 강했다면, 일곱 대접 재앙은 더 이상 지체되거나 희석되지 않은 하나님의 진노가 신속하고 전면적으로 쏟아지는 최종적이고 완전한 심판입니다. 이 끔찍한 심판의 장면들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 모든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선포하는 하늘의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완벽한 공의를 드러냅니다. 이것은 핍박받는 교회를 향한 궁극적인 신원이며, 우리가 어디에 피해야 할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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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하나님은 짐승과 우상과 짐승의 표를 받은 이들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 짐승의 왕국을 향한 심판 : 피조 세계의 역습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경배하며 그의 표를 받은 자들의 세상에 심판을 쏟으시되, 그들이 의지하고 착취했던 피조 세계(땅, 바다, 강)를 통해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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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난 큰 음성이 일곱 천사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명령합니다.
첫째 대접 : 땅에 쏟아지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납니다.
둘째 대접 : 바다에 쏟아지자, 바다가 죽은 자의 피 같이 되어 모든 바다 생물이 죽습니다.
셋째 대접 : 강과 물 근원에 쏟아지자, 그것들이 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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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처음 세 대접 재앙은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렸던 재앙들을 떠올리게 하며, 죄악된 인간 문명의 근간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립니다.
첫째, 악하고 독한 종기 : 애굽의 여섯 번째 재앙(독종)과 유사하며, 짐승에게 속했다는 표를 받은 바로 그 몸에 하나님의 심판의 표가 고통스럽게 새겨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육체는 그들의 영적 부패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둘째, 죽음의 바다 : 애굽의 첫 번째 재앙(물이 피로 변함)의 확장판입니다. 바다는 13장에서 짐승이 올라온 혼돈의 장소이자, 로마 제국 경제의 심장이었습니다. 그 바다가 ‘죽은 자의 피’처럼 응고되고 썩어버려 모든 생물이 죽는다는 것은, 짐승의 왕국을 지탱하던 모든 경제 시스템과 생명력이 완전히 붕괴됨을 상징합니다.
셋째, 피가 된 강과 물 근원 : 생명의 원천인 강과 샘마저 피로 변하여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심판이 왜 의로운지에 대한 이유는 바로 다음 단락에서 명확하게 설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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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재앙이 모두가 다 인간의 죄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또 모두가 다 귀신의 역사도 아닙니다. 어떤 것이 죄 때문인지, 또는 귀신의 역사인지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한편으로만 몰아서 전체를 극단적으로 일반화 하는 것은 유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질병과 재앙의 상당수는 인재인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가 낳은 산물들이 인간을 병들게 하고 자연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를 죽일 뿐 아니라 피조물들까지도 오염시키고 생명을 잃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런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경배하고, 이기와 탐욕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고, 그로 말미암아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피조세계를 심각하게 오염시켜 가고 있습니다.
더불어 바다는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모든 경제의 기초가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바다가 오염되는 것은 결국 경제활동이 정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짐승의 표를 받아야 매매할 수 있다고 그 표를 받은 모든 이들의 경제활동이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상에게 경배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몸은 병들고 경제적 수단은 불가능하게 되고, 물 근원이 피가 되는 곧 죽게 되는 심판을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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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탐욕은 끝없이 피조 세계를 착취하고 오염시켜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기후 위기와 환경 재앙은 단순히 자연의 반란이 아니라, 창조주를 경배하는 대신 피조물을 우상으로 삼고(물질만능주의) 그것을 착취해 온 인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일 수 있습니다. 짐승의 표, 즉 세상의 경제 논리를 따르기 위해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삶의 방식은 결국 우리 자신을 파멸로 이끕니다. 교회는 창조 세계를 돌보는 청지기의 사명을 회복하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덜 쓰고 덜 버리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이 심판의 메시지 앞에서 회개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역사 이래로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자연의 파괴는 지금 더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는 일이나, 바다의 오염과 플라스틱의 오염, 과다한 탄소배출 등으로 말미암아 땅이 더이상 소출을 내지 않고, 이상 기온 현상 등이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은 이제 자명한 사실입니다. 특히나 기후의 변화는 상당수 인간의 이기와 탐욕에 근거하고 이로 말미암아 인류는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리라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경고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이기와 탐욕을 내려놓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조금 덜 쓰고 덜 버리고 사는 것이 우리가 그나마 이러한 재앙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작지만 큰 일이며 온 몸으로 회개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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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절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십니다. : 하늘의 찬송 -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선포하다.
하늘은 하나님의 심판이 잔인한 복수가 아니라, 순교자들의 피에 대한 완벽하고 공의로운 갚음이며, 따라서 ‘참되고 의롭다’고 선포하며 그분의 성품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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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차지한 천사가 말합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니이다.” 그는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자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제단도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고 화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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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변호(Theodicy) : 이 부분은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신정론(神正論)’입니다. 천사는 왜 이 심판이 의로운지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공의의 원칙’에 따른 완벽한 심판입니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6절) 생명의 물을 피로 더럽힌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피를 마시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죄를 그대로 되돌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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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의 화답 : 특히 ‘제단’이 이 선언에 동의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제단은 6장에서 순교자들이 “우리 피를 갚아 주소서”라고 부르짖던 바로 그곳입니다. 이제 그들의 기도가 마침내 응답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응답의 방식이 완벽하게 의롭다는 것을 순교자들의 처소인 제단 스스로가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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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 찬양 : 이 찬양은 하나님의 행위뿐만 아니라, 그분의 변치 않는 성품, 즉 ‘거룩하심’, ‘의로우심’, ‘참되심’, ‘전능하심’을 높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의 거룩한 성품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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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 재앙은 대체적으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신원하시고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어제도 계시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직접적으로 의로우시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며 그 방식이 공정합니다. 곧 하나님은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피를 흘리게한 그 피를 그들에게 돌려서 행한대로 보응받게 합니다. 그래서 누차 하나님의 심판의 참되고 의롭고 공평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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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 복수심에 불타거나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심판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복수가 아니라, 그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원망과 쓴 뿌리에서 자유하게 하며, 고난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게 하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참되고 의로우십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다른 이의 죄나, 조상의 죄나, 내가 짓지 않은 죄로 인하여 나를 심판하시는 불의하신 분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내가 짓지 않은 죄로 인하여 나를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로마서 2:6-11 행위보응의 원리). 그러므로 누구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앞에 서면 누구도 그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 곧 사랑과 긍휼과 은혜가 나타나서 우리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죽기까지 거룩한 백성의 길로 행하는 것이 보은하는 길이고 거룩한 백성이 마땅히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니 비록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이 길을 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공의로우신 주님 앞에서 의로운 백성의 길을 올곧게 살아갈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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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절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이들을 불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 생명의 근원이 심판의 도구로 - 타오르는 태양 앞에서의 비방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생명의 근원으로 의지하고 숭배하던 해(sun)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완악한 마음은 고통 속에서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그 고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비방하는 길을 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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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자, 해가 권세를 받아 사람들을 불로 태웁니다. 사람들은 큰 재앙에 태워지자, 이 재앙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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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심판 : 고대 세계에서 태양은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자, 수많은 민족에게 최고의 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해를 심판의 도구로 바꾸심으로써,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를 보여주십니다. 이는 7장에서 성도들이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 것’(계 7:16)이라는 보호의 약속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보호받지만, 짐승의 백성은 그들이 의지하던 것에게 심판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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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인 불순종 : 사람들의 반응은 충격적입니다. 그들은 이 재앙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재앙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히 지목하여 ‘비방’합니다. 이것은 무지에서 오는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대적하는 완악함입니다. 그들은 14장에서 첫째 천사가 외쳤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마지막 초청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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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본질 : 이 모습은 죄의 본질이 얼마나 깊고 완고한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다면, 고난이나 심판 그 자체는 결코 인간을 회개로 이끌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통의 원인을 자신들의 죄에서 찾지 않고, 그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게 만들 뿐입니다. 바로 왕의 마음이 재앙이 거듭될수록 더욱 강퍅해졌던 것처럼, 그들은 고통 속에서 자신들의 선택(짐승 숭배)이 틀렸음을 인정하기보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길을 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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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정당성 입증 : 역설적으로, 그들의 이러한 완악한 반응은 그들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스스로 입증하는 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할 수 없어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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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의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라도 성도들은 상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대조를 이룹니다. 대접 재앙 역시 땅에 속한 이들 곧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행해지는 심판입니다. 불은 기본적으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이렇게 재앙이 진행되어도 악인들은 마음이 더 강퍅해 집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죄악의 길에 빠진 인간은 좀처럼 그 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설령 죽어도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멸망의 길로 치달아 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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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해(sun)’입니다. 그것은 돈일 수도, 성공일 수도, 건강이나 인간관계, 명예나 권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가장 의지하던 그것을 통해 우리를 아프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참된 소망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합니까? 고통의 원인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방할 것입니까, 아니면 고통을 통해 나의 우상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께만 영광을 돌릴 것입니까?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인간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돈 앞에서는 신앙도 소용없이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그런 이기와 탐욕은 결국 피조 세계를 파괴하면서까지 자행되었습니다. 결국 그 피조물이 오히려 이제 인간을 공격합니다. 원래 피조물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며 돕는 존재입니다(로마서 8:19-21). 인간의 타락이 결국 피조세계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지 않는 인간을 향하여서 이제는 역으로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땅에 속한 이들의 탐욕적 삶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오히려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신앙하던 것이 하나님과 죽음 앞에서 얼마나 부질없고 헛되고 허망하고 무기력한 것인지 드러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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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1절 하나님의 심판은 회개가 목적인데도 땅에 속한 이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 권력의 심장부를 치는 어둠 - 고통 속에서도 완악한 마음
하나님의 심판이 짐승의 권세의 심장부를 쳐서 그 나라를 어둠과 고통으로 몰아넣어도, 죄의 속박 아래 있는 인간은 고통의 원인인 자기 죄를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비방을 쏟아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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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자, 그의 나라가 어두워집니다. 사람들은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며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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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왕좌에 임한 어둠 : 애굽의 아홉 번째 재앙(흑암)이 태양신 ‘라’의 무력함을 폭로했듯이, 이 재앙은 짐승의 권세의 중심부인 ‘왕좌’를 직접 타격합니다. 세상에 빛과 질서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던 짐승의 나라가, 그 본질상 ‘어둠의 나라’임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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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적되는 고통과 반복되는 비방 :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앞선 재앙들의 결과인 ‘종기’와 ‘아픔’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자기 혀를 깨뭅니다.” 재앙은 끝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적되어 고통을 가중시킵니다. 그러나 이 극심한 고통의 결과 역시 이전과 동일합니다.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며” 결정적으로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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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노예 상태 : 이것은 죄가 가진 강력한 속박의 힘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행위가 고통의 원인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멈추거나 돌이킬 능력이 없는 상태, 오히려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원망하게 되는 상태가 바로 죄의 노예 된 비참함입니다. 심판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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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왕좌는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 개인 짐승(13장)입니다. 그는 사탄이 왕좌를 주어서 앉게 되었습니다(13:2). 이들에게 내리는 재앙은 애굽의 바로왕에게 내렸던 것과 같습니다. 어둠이 임한 것은 악의 영역과 빛되신 하나님의 영역을 구분하는 표현입니다. 심판을 위해서 이들을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어둠에 속할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아도 영화롭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 처럼 섬기며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어둠에 속했기에 빛되신 주님을 불편해하고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혀를 깨무는 것 같은 두려운 고통 속에서도 돌이키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재앙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강퍅해져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아홉번째 흑암재앙이 왔어도 그는 깨닫지 못하고, 그 이전에 쏟아진 재앙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행위를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더 강퍅해 졌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자신들의 행위를 회개하기는 커녕 모든 것이 하나님 탓이라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는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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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극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우리 역시 본질적으로 이들처럼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고통 속에서도 회개할 줄 모르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먼저 우리에게 비추어, 우리의 눈을 열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사 회개의 선물을 주셨기에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어둠 속에서 고통받으며 하나님을 비방하는 세상을 향해 정죄가 아닌 긍휼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이 아니라 빛에 속한 빛의 자녀입니다. 이를 앞서 해를 입은 여자(12장)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로 이전에 불의한 죄에서 대속하셔서 빛의 자녀 되게 하셨으니 날마다 빛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세상에 빛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세상은 불편해하고 비방할 것이지만 어둠에 속한 자들의 당연한 반응이기에 우리는 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빛을 비춰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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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참되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짐승의 표를 받은 이들,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 경제활동과 여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삶의 요소들이
여전히 우리 삶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못하고 양다리 걸치는 신앙 가운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결국 세상이 그토록 믿고 의지하는 것들이
죽음과 심판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능력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우리의 이기와 탐욕이 결국 우리 자신과 세상을 파멸로 치닫게하고
함께 공멸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조금 불편해도 덜 먹고 덜 쓰고 덜 소유하는 믿음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성도의 신원에 응답하시는 주님
이 땅에 하나님 아닌 것들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모든 것을 버리고
회개하고 돌이켜 주를 경외하며 영광돌리게 하옵소서.
악한 세상의 권력과 삶의 방식에서 떠나고
주님의 경고에 민감하게 반응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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