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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0:01-11 구원신탁 1 : 절망/심판 이후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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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회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기록하라 합니다. 비록 두려움과 슬픔의 환난 날이 있었으나 이는 유다의 죄, 곧 우상숭배와 폭력과 음란을 고치기 위해 한 것이며, 회복된 뒤에는 태평과 안락을 누리게 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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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2절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의 선포가 아니라 말씀의 기록을 명령하십니다.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2b절). 말씀을 기록하라고 명령한 이유는, 현재의 문맥에서 보자면, 구원의 말씀이 유배당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이들은 아직 야훼의 심판 아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구원신탁(30-31장)을 ‘책에 기록하라’는 명령은 [현재의 예레미야서 1-25장에 주로 수집된] 심판신탁을 두루마리에 기록하라(36:2)는 명령과 대비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완전한 멸망의 심판을 선포하였던 예레미야는 이제 이들에게 심판 이후에 있을 구원을 선포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을 기록함으로써 성취를 보증합니다. 이를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3절 전체 내용의 요약입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을 전환시키실 날, 곧 이스라엘과 유다를 유배지에서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다시 인도해 내실 날이 올 것입니다. 미래에 있을 구원에 ‘이스라엘과 유다’가 함께 참여할 것입니다. 주전 732/722년에 멸망당한 북 왕국의 유배민들과 주전 597/587년에 유배당한 유다의 유배민들이 함께 야훼께서 상속재산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통일된 민족을 건설할 것입니다. 서두의 ‘보라 [그] 날들이 오고 있다’([보라 … 날이 오리니] cf. 31:27, 31, 38)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가 오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을 되돌릴 이 새로운 시대는 이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포하셨던 하나님의 일방적 결정에 의해 시작됩니다. 회복의 날은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한 야훼의 응답으로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신들의 완악한 범죄로 멸망을 당하지만 야훼께서는 여전히 이들은 ‘내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고향 땅에서 쫓겨났지만, 그렇다고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사실이 무효가 된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야훼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준 상속재산입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야훼께서 가나안 땅을 다른 민족들에게 주셨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야훼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셨던 땅을 유배당한 자들에게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유배를 당한 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전체 주민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3절은 이들에게 이스라엘의 미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멸망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 남아 사는 자들이 아니라 유배민들이 참된 남은 자들로, 야훼께서 미래에 베푸실 구원의 수혜자가 됩니다(cf. 24장; 29:16-20). 가나안 땅이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약속이 기록된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우리는 기록하신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가며 하나님께 모든 신뢰를 두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고 꺾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오래전 기록된 이 말씀을 오늘 여기에서 다시 읽고 묵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주님은 지금도 그리고 이후로도 영원토록 반드시 성취하고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주의 말씀을 즐거이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의 말씀, 약속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며, 무엇을 바라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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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절 하나님은 우리가 한계를 깨달을 때 마침내 새 일을 시작하시는 분이십니다. 

야훼의 날은 야곱이 환난을 당하는 날입니다. 해산하는 여자가 진통 때문에 배를 움켜잡고 괴로워하듯이(→ 4:31) 야훼께서 야곱을 심판하실 때 용사들은 마치 해산하는 여자처럼 배를 움켜잡고 창백한 얼굴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게 됩니다. 야곱에게 닥친 환난의 때는 그 무엇에도 비교될 수 없는 무서운 시간이지만 멸망으로 끝나는 날은 아닙니다. 야훼의 징계가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예레미야에 앞서 이미 아모스(5:18-20)와 이사야(2:12-21)와 스바냐(1:7-11)가 야훼의 날을 심판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 4절 때로는 앞 단락에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야훼께서 예언자에게 주신 말씀인] 1-3절은 그 자체로 완결된 도입부로 또 다른 맺는 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하신’ 새로운 신탁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 5절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공포의 소리(외침)을 들었다. 두려움뿐, 평화는 없다.” 화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합니다. 5aa절은 야훼의 말씀이 시작되고 있음을 말하지만, 5ab절의 주어 ‘우리’는 5절을 야훼의 말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드물게 ‘우리’를 야훼와 일치시키기도 하지만 전체 문맥으로 보아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의 아우성을 인용하고 있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경우 5abb절은 ‘백성-우리’의 탄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심판에 떨어진 백성은 서로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공포의 외침)만 들을 뿐입니다. 환난에 휩쓸린 땅에는 ‘두려움’만 있을 뿐입니다. 생명과 사회의 안전을 보장해줄 평안(샬롬)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야훼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구원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6:14; 8:11). 공황(恐慌)에 빠진 자들의 절망적인 울부짖음만 들릴 뿐입니다.

- 6절 화자 ‘나’가 야훼인지 예언자인지 불분명합니다. 예언자(야훼)는 5절에서 공포의 아우성을 듣는 ‘우리’를 2인칭 복수 ‘너희’로 부르면서 이들에게 “남자가 애를 낳을 수 있는지 너희는 물어 보아라” 하고 명령합니(하신)다. 이 수사적 질문에 대한 답변은 물론 부정입니다. 그런데 용사들이 마치 해산하는 여자처럼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배에 손을 대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해산하는 여자’의 비유는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함축하지는 않습니다. 출생의 진통은 [징조가 있기는 하지만] 갑자기 닥치며, 이미 시작된 진통은 인위적으로 뒤로 미룰 수 없습니다. 또 진통이 시작되면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 싸움에 용감한 자들이 해산하는 여자처럼 전투능력(의욕)을 상실하고 무방비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cf. 4:31; 13:21; 49:24; 50:43). 이들의 손은 맥이 풀려 무기를 들지도 못하게 됩니다.

- 7절 야곱에게 닥친 환난의 구체적 내용에 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환난의 정도를 간결하게 언급합니다. ‘그 날’은 야곱이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큰 재앙의 날입니다. 그러나 심판으로 이스라엘이 끝장나지는 않습니다. 환난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심판이 구원시대를 가능하게 해줍니다(7bb절). 파괴적 심판에 긍정적 의미가 부여됩니다. 이 구원은 심판의 경감이나 중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공포와 좌절과 재앙이 지배하는 징계의 심판을 통과하지 않고는 구원의 때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야곱의 구원은 심판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신약성서가 그리고 있는, 메시야가 다시 오시기 직전의 악이 지배하는 어두움의 시간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슬픔과 절망의 예언 끝자락에서 하나님은 느닷없이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감히 꿈꿀 수도, 시도할 수도 없는 구원을 장담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그들의 운명을 바꾸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 교회의 회복, 하나님나라의 건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유일하고 영원한 소망이 바로 우리 주님이신 것입니다.”_매일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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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절 여호와께서 대적을 멸하고 우리를 구원하사 여호와를 섬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 야훼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부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방민족들 가운데서 종살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으로 바벨론을 섬겼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야훼와 다윗(호 3:5; 겔 34:23-24; cf. 37:24-25)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갱신시키기 위해 해방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해방된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입니다. 자신을 구원하신 그분께 의존할 때, 그분의 의지에 순종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는 ‘다윗’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다윗왕조가 아니라 처음 여호와께서 목자였다가 후에 이스라엘 주권자로 세운 그 다윗의 이름이지만, 이후에는 메시아적 함의를 가지고 사용하게 됩니다)

8절 유다의 목에서 바벨론의 멍에를 꺽습니다. 하나냐와 같지만 하나냐는 현재 곧 이고, 예레미야는 한번 유다가 멸망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유다의 목에서 바벨론의 멍에를 꺽으신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말씀을 전하더라도 어떤 시간적 배경에 따라 다릅니다. 하나냐아 예레미야는 동일한 환상을 봤고, 예레미야는 긴 하나님의 역사를 알고 선포하고, 하나냐는 그냥 그 시점에서만 말씀을 해석하니까 말씀을 597년의 제1차 유배를 배경으로 해석하므로 하나님의 의지와 반대되는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해석도 마찬가지다. 성경대로 해석한다고 하지만, 같은 텍스트로 차이가 납니다. 설교자는 해석자로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냥 성경을 잡아서 선포하면 된다고 하지만 우리역시 잘못 전할 수 있습니다.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일단 말씀을 전할 때는 담대히 전해야 하지만 준비 과정에서는 나의 한계를 유념해야 합니다. 자기 시각이 뚜렷하다보면 오류 가능성이 큽니다. 텍스트의 전달을 위해 해석하다보면 나름의 작업가설들이 있어서 그 전제를 가지고 보면 왜곡 가능성이 큽니다. 설교도 어떤 의도성을 가지고 했을 때 그 주제에 맞게 텍스트를 짜게 됩니다. 잘못 왜곡되면 우리도 거짓 예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멍에’에 관한 표상은 27-28장에도 나타납니다. 앞에서는 유다의 심판을 상징한 멍에의 표상이 여기서는 구원의 약속과 관련해 사용됩니다. 야훼께서 “그의 목에서 그의 멍에를 부수고 그의 사슬을 끊으실 것이다.” 과거 애굽 바로의 굴레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던 야훼께서 다시 바벨론의 멍에로부터 그 후손을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8절의 선포는 예레미야에 맞서 유다의 구원을 주장하였던 하나냐의 선포와 거의 일치합니다. 28:11에서 하나냐는 이년 안에 민족들이 바벨론의 멍에로부터 해방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구원의 시대가 열릴 것을 선포한 하나냐에 반하여, 예레미야는 심판 이후에 야훼의 구원이 있을 것을 선포했습니다.

9절 이스라엘의 해방이 이방민족들에 대한 우월성을 포함하거나 민족주의적 열정과 결부되지 않습니다. 8절에 억압하는 자들의 파멸이 함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이스라엘의 통치 아래 놓여지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해방의 목적이 정치적-민족주의적 차원을 떠나 신학적 차원으로 옮겨집니다. 야훼를 배반한 대가로 종이 되어 정치적 강대국을 섬겼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해방되어 야훼와 자기 왕 다윗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구속자이신 야훼를 떠났던 이스라엘이 다시 그분께로 돌아와서 그분만 섬기게 될 것입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새로운 왕을 세워주십니다(→ 23:5; 33:15, 17). 그분께서 일으키실 왕 다윗이 예루살렘의 다윗왕조의 계승을 말하는지 또는 메시아적 왕을 지칭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cf. 겔 34:23-24; 37:24-25; 호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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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1절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고 정의로운 백성이 되도록 고치시기 위해 허물고 다시 세우십니다. 

10-11절은 두 개의 신탁으로 구성됩니다. 10절에서 야훼는 유배민들의 귀환과 가나안 땅에서의 안전한 삶을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방민족들의 위협에 노출됨이 없이 평안하게 살 것입니다. 11절은 시선을 이방민족들에게로 돌립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간 이방민족들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벌을 받지만, 이방민족들과 달리 ‘법’(공정)으로 징계받을 것입니다.

10절 야훼께서는 유배당한 ‘종 야곱’을 먼 곳에서 구해내(cf. 사 43:6; 49:12; 60:4, 9) 고향 땅에서 적들의 위협 없이 안전하게 살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cf. 겔 34:28; 레 26:6; 습 3:15). ‘나의 종 야곱’은 제이이사야에서(사 44:1, 2; 45:4) 유배민들에게 적용됩니다.

11절 야훼의 구원행위는 이스라엘을 고향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종 야곱을 포로로 잡아간 민족들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야곱도 죄의 대가로 징벌을 받기는 하겠지만 민족들과 달리 완전한 멸망에 떨어지지는 않습니다(cf. 4:27; 5:10, 18). 그분께서는 야곱을 ‘법에 따라’ 징계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징계는 벌보다는 교육적 목적을 갖습니다(31:18; 신 8:5; 사 28:26). 야곱을 훈계하시는, 또는 경고하시는 야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11b절의 징계가 현재 받고있는 심판과 관련된 것인지, 또는 야곱이 유배에서 돌아와서도 야훼의 뜻에 순종하지 않아서 받게될 징계를 말하는지 불분명합니다. 이방민족의 운명으로 결정된 멸망의 징계와 야곱의 법에 따른 징계의 대조 그리고 현재의 문맥(7절)은 전자를 지지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세우실 것인데, 굳이 허물고 나서 다시 세우겠다고 단언하시는 이유는? 유다의 죄, 곧 우상숭배와 폭력과 음란을 고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거룩하고 정의로운 백성이 되어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징벌하시는 것이기에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_매일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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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회복케 하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기록하사

반드시 성취하고 지키시고 이루실 것을 보증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그 말씀을 주야로 즐거이 묵상하며

말씀의 통치를 받아 살아가기 원합니다. 

대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일지라도 순종하며

인내로 경주해 가되 주님의 때를 분별하는 지혜와

인내할 수 있는 믿음과 마침내 회복하실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우리의 죄 곧 우상숭배와 폭력과 음란을 고치시기 위해서

허물고 다시 세워가시는 손길을 그대로 받자옵고

마침내 우리가 거룩하고 정의로운 백성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를 향한 징벌이 결국 우리를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신실하신 주님만 바라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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