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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01-14 유배민들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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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들에게 엘라사와 그마랴 편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포로 생활이 당대에 끝나지 않으니 그곳에서 정착하고 번성하여 민족의 명맥을 유지하고, 일찍 귀향하리라는 거짓 예언에 미혹되지 말라 합니다. 칠십 년의 때와 기한이 차면 여호와께서 돌보고 신실하게 귀환을 성취하며 돌아오게 하리라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라 합니다. 또한 여호와께 기도하면 들으시고, 찾으면, 만나게 될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포로된 자도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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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여호와께서는 포로된 자들도 기억하시며 편지를 통해 뜻을 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는 사절 편에 그곳 유배민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예레미야의 사역 범위가 바벨론 유배민들에게로 확대됩니다. 본문은 사절의 파견 목적에 관해서는 전혀 침묵합니다. 바벨론에 종속된 유다 왕 시드기야의 연례적인 조공사절일 수도, 또는 27:3과 관련해 반역 모의에 참여한 것을 변명하기 위한 진사(陳謝)사절일 수도 있습니다.

사절의 일원으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가 언급됩니다. 26:24에서 예레미야를 보호해준 아히감의 아버지 이름도 사반이기에 양자는 형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벨론 점령군이 총독으로 세운 그다랴의 아버지 이름으로 아히감이 나옵니다.] 그마랴의 아버지 힐기야가 열왕기하 22장에 나오는 제사장 힐기야와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개연성이 충분하다. 예레미야가 요시야 왕의 통치 아래 개혁정책을 추진했던 세력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엘라사와 힐기야가 바벨론의 사절로 파견되었음은 이들이 바벨론에 대하여 우호적 노선을 갖고 있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편지로 보내셨고, 우리도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서 하나님의 복을 흘러보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선 포로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과, 기억하심과 신실하심과 말씀하심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잊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잊은 것이고, 주님의 손이 짧아 우리를 돕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도움을 외면ㄴ했기에 못받은 것이고, 주님이 우리를 잊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했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응답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믿습니다. 조금만 더 주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빕니다. 

*

# 4-9절 여호와께서는 무소부재하시며, 지금 있는 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되 거짓 예언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주전 597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들은 곧 돌아가리라는 소망에 의지하고 유배생활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의 뿌리로부터 잘려 먼 이방 땅으로 옮겨진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가나안 땅으로의 조속한 귀환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적인 전통신학에 따르면 이방 신들의 통치영역에 속하는 유배지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차라리 배교행위에 속했습니다. 이들에게 유배생활의 장기화는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부터 잊혀지지 않게,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이들에게 유배생활이 길어질 것에 대비하도록 충고합니다. 집을 짓고 밭을 만들어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또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고 살도록 권면합니다(5-6절). 더 나아가 이방 성읍들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조언합니다(7절). 예레미야의 이러한 권면은 예루살렘 제의 전통에 선 예언자들의 조속한 귀환 선포와 충돌됩니다(8-9절).

고대세계에서 일상적인 생활은 – 파종, 추수, 집의 건축, 자녀 생산 –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에 야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방 땅에서 어떻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은 야훼의 성전이 없기에 그분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배민들은 야훼로부터 분리되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제의적으로 더러운 바벨론 땅에 사는 유배민들은 제의적 더러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부정한 유배민들이 그럼에도 거룩하신 야훼께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제사를 드릴 수 없는 부정한 이방 땅에서 야훼의 축복이 가능할까? 바벨론에서도 그분께 축복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이를 구할 수 있을까?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신의 축복에 속하기에, 그렇다면 바벨론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바벨론 신들에게 축복을 구해야만 하는가? 성전도 없고, 제사도 드릴 수 없는 부정한 땅에서 어떻게 야훼신앙을 지키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도대체 야훼께서 바벨론에 유배당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기나 한가? 전통신학의 틀 안에서 야훼의 의지를 이해하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로서는 조속한 귀환 선포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제의전통에 굳건히 서있는 자들에게 예레미야의 선포와 권면은 배교를 의미할 뿐입니다. [예레미야에게는 바벨론 사람들이 원수들이 아니라 유배민들의 이웃이 됩니다. ]

정착하여 살 수 있는 생활조건을 만들라는 예레미야의 조언은 단순히 유배기간이 길어질 것에 대한 대비만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 없이도 야훼의 축복을 즐기며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혁신적 신학입니다. 이방의 불결한 땅에서도 야훼를 신앙하는 자들은 그분의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고, 그분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장소와 제의로부터 독립된 예언자적 신앙입니다(→ 7:22-23; cf. 3:16).

우리가 소속된 사회와 국가의 평안을 구하며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은 그러한 사회와 국가의 평안이 곧 하나님 백성의 평안과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곳이 선교지 땅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곳에도 변함없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길 빕니다. 더불어 이렇게 약한 부분을 미혹하여 속히 귀환하리라 말하는 선지자들과 점쟁이들에게 미혹되지 말 것을 천명합니다. 

*

# 10-14절 여호와께서는 신실하셔서 포로된 땅에서도 함께하시고 응답하시며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벨론 복역은 한 세대를 넘어 세 세대까지 지속되겠지만, 그 기간은 분명하게 한정되어 있습니다. 결정된 칠십 년의 기간이 차면 야훼께서 이전에 쫓아 보내셨던 모든 곳으로부터 유배민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12-14절은 이방 땅에서도 야훼를 만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유배민들이 유배당한 곳에서 야훼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면 그분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며, 유배지에서 그분을 구하면 그곳에서도 그분을 찾을 수 있으며 만날 수 있습니다. 야훼께서는 당신을 찾는 자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에게 응답하십니다.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제한 없이 가능합니다. [성전이 없어 제사를 드릴 수는 없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이방 땅에서도 가능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전이 없이도 하나님과 충분히 교제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부재가 주님을 만날 수 없게 합니다. 성전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몸된 성전으로 삼으신 우리가 거룩하지 못해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외면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았기에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연단인 줄 알고 여호와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만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이 무엇인지 깨닫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구하고 찾고 만나는 일에 매진하여 영적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가 변함없이 감당해야 할 믿음의 행보입니다. 

*

# 거둠의 기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예수님을 보내사 아버지의 뜻을 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도 세상에 그리스도의 편지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감없이 잘 듣고 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가 선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되

우리의 영원한 본향을 향한 소망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어떤 삶의 자리라도 성실하게 채우고

생육하고 번성하라신 뜻을 따라

평안을 기도하고 누릴 수 있길 빕니다. 

언제 어디서나 있는 거짓 선지자와 점쟁이들에게

미혹되거나 현혹되지 않길 원합니다. 

영적 분별력도 허락해 주옵소서. 

모든 것이 때가 있음을 기억하며

여호와의 때(카이로스)를 아는 지혜도

여호와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인내도

여호와의 때를 소망할 있는 믿음도 주옵소서. 

언제나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찾고, 

만나야 할 때 만날 수 있음을

그렇게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 하시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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