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8:01-17 예언자 예레미야와 예언자 하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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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이 여고니야(여호야긴)왕과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고 성전 기물을 약탈하고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워두고 회군한 지 4년 지난 때에, 선지자 하나냐가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기 때문에 이년 안에 성전 기물과 포로들도 돌아올 것이라 예언합니다. 이에 예레미야도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평화에 대한 예언은 응한 후라야 증명할 수 있다고 하자,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멍에를 꺾어 버리며 재차 이 년 안에 바벨론을 꺾어 버릴 것이라 합니다.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쇠 멍에를 지우며 짐승들까지도 바벨론 왕을 섬길 것이이라 예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냐에 대한 심판은 예언한 대로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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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우리의 바램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시드기야(597-587)가 유다를 통치한지 ‘사 년 다섯째 달’에 앗술의 아들 기브온 출신의 예언자 하나냐가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백성 앞에서 신탁을 선포합니다(1절). 하나냐 역시 예레미야처럼 ‘사자의 전언양식’(“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을 사용하며 신탁을 선포합니다(2절). 예언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사자의 전언양식은 이들의 선포에 신적 기원(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기능을 담당합니다.
하나냐의 선포는 예레미야의 선포와 완전히 대립됩니다(2-4절). 예레미야에 의하면 바벨론의 지배는 야훼의 의지에 속합니다. 야훼께서 이 땅의 통치권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주셨기에(27:6) 유다를 포함한 세상 모든 나라들이 그의 멍에 아래 제 목을 내밀고 그를 섬겨야 합니다(27:8, 11). 바벨론 왕으로부터의 해방과 야훼의 집 기물의 조속한 반환을 선포하는 자들은 거짓예언자들입니다(27:16, 21-22). 제1차 유배민들은 상당기간 바벨론에서 살아야 합니다(27:7). 바벨론의 굴레를 야훼의 의지로 선포하는 예레미야에 맞서 하나냐는 야훼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부수기로 결정하셨다고 바벨론 압제로부터의 조속한 해방을 선포합니다(2절). 또한 주전 597년에 느부갓네살이 약탈해간 성전기물과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여고니야/고니야[22:24])과 모든 유배민들이 ‘이년 안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3-4절). 하나냐는 자신의 이름(‘야훼께서는 자비로우시다’)에 어울리게 이스라엘에게 구원신탁을 선포한 것입니다. _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10km 떨어진 성읍으로, 하나냐의 거주지를 가리키는지 또는 그 집안의 출신지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그는 예루살렘 성전 소속의 [제의]예언자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하랴? 사람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해야 할까?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전해야 할까? 나의 바램을 말해야 할까?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작 나의 일에 해달될 때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바램과 기대와 뜻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것이 때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모든 만물들도 여기에 순응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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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절 여호와의 말씀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그의 말이 응한 후에야 진실로 인정받게 됩니다.
하나냐에게 예레미야는 빈정대듯이 반격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예레미야도 차라리 자신의 심판예언보다 하나냐의 구원예언이 성취되어 야훼께서 성전기물과 모든 유배민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겨 놓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6절; cf. 29:10; 33:14). 그러나 개인(민족)의 바람과 하나님의 의지가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 예레미야도 바라지는 않지만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결정에 속한 것으로 이제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심판의 확실성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맹목적인 구원신탁에 조소로 응답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예언전통을 심판예언자들에게서 찾습니다.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8절). 역사적으로 볼 때, 예레미야의 심판선포는 예외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미 이전의 예언자들이 나라들과 왕국들에 심판을 선포해 왔습니다. 예언의 역사는 심판예언자들의 정당성을 [함축적으로, 구원예언자들의 거짓됨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구원예언자는 선포된 구원신탁이 실제로 이뤄질 때만 야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언자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9절). 예레미야는 하나냐를 아직 거짓예언자로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구원예언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하나냐가 야훼에 의해 보냄을 받은 예언자로 인정받으려면 먼저 그에 의해 선포된 예언이 성취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아마도 하나냐와 같은 예언자들은 – 이들도 물론 체험적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에 접근하겠지만 – [교리적 전통신학에 근거한] 자신의 개인적 신념(믿음)과 그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이를 혼합시켰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과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그분의 의지를 면밀하게 살펴보기보다는 너무 빨리 자신의 생각을 영감에 투사시킬 때 자주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신념과 신학을 통제하며 비판하는 대신에 자신의 신념과 신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는 오류는 과거의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오늘의 설교자나 성서해석자에게도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해석자가 자신의 전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본문 해석에 해석자의 주관이 개입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해석자는 자신의 전이해가 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자기 해석의 한계와 오류를 시정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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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4 하나님은 상처입은 이들을 향한 치유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의 표적행위(27장)에 맞서 하나냐도 자신이 선포한 구원예언의 확실성을 표적행위를 통해 보여줍니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cf. 27:2)를 빼앗아 이를 부서 버리며(10절) 야훼께서 민족들의 목에서 바벨론의 멍에를 꺾어버리실 것을 다시금 선포합니다(11a절; cf. 2:20). 멍에를 빼앗아 부순 하나냐의 행동은 단지 예레미야를 모독하거나 무시하기 위해서 한 짓은 아닙니다. 그는 대립적 예언선포와 표적행위를 통해 예레미야가 선포한 심판예언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목에서 나무멍에를 빼앗아 부숴버린 하나냐의 [도발적] 표적행위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11b절) 라는 언급은 예레미야가 하나냐를 아직 야훼 예언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자신과 다른 신탁을 선포하지만 그 신탁이 야훼로부터 주어졌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구원예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만, 확정적 평가는 보류합니다. 예언자 하나냐와 예언자 예레미야 사이의 충돌은 결말 없이 일단 중단됩니다. 두 사람 모두 야훼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기에 그분의 결정만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야훼께서 개입하셔서 예레미야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그분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어 그를 다시 하나냐에게 보내십니다(12절). 예레미야의 표적행위에 맞서 그의 나무멍에를 부순 하나냐의 표적행위가 다시금 야훼의 반격으로 무력화됩니다. “너는 나무로 만든 멍에를 부수었으나, 오히려 너는 그 대신에 쇠로 된 멍에를 만들었다”(13절).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을 보여주기 위해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부숴버린 하나냐의 행동이 바벨론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부서진 나무멍에 대신에 더 무겁고 부술 수 없는 쇠멍에가 씌워집니다. 바벨론의 지배와 통치가 더 혹독하고 가혹하게 유다를 억누르게 될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서 백성이 오도될 때 그 백성이 져야 할 짐은 더욱 무거워질 것을 보여준다.] 유다를 포함한 모든 민족이 멍에를 메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14a절). 야훼께서 민족들뿐만 아니라 들짐승까지도 바벨론 왕에게 넘겨주십니다(14b절). 어느 누구도 바벨론의 침략을 모면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바벨론에 종살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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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7절 여호와의 말씀 정하신 때와 방법으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야훼의 가르침에 따라 예레미야는 하나냐를 다시 찾아가서 그를 거짓예언자로 고발합니다. 하나냐는 야훼께서 보내지 않았음에도 야훼의 이름으로 백성을 오도해 거짓을 믿게 한 예언자입니다(15절). 성전기물과 유배민들의 조속한 귀환약속을 야훼의 의지로 선포함으로써 하나냐는 백성의 눈과 귀를 어둡고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구원신탁을 선포해 백성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하나냐에게 죽음의 심판이 선언됩니다. 야훼께서 하나냐를 지면에서 던져버려 금년에 죽게 하실 것입니다(16절). 예레미야의 심판 선고에 따라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 죽습니다(17절). 예레미야가 야훼로부터 보냄을 받은 참된 예언자임이 증명됩니다.
예언자를 파견할 때 사용되는 동사(샬라흐)가 15과 16절에서 역설적으로 사용됩니다. [개역개정은 문맥에 따라 16절에서는 ‘제하리니’로 옮긴다.] 야훼께서 ‘보내지’ 않은 하나냐가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기에 야훼께서 하나냐를 지면에서 [제하여] 보내버리실 것입니다. 보냄을 받지 않은 자가 보냄 받음을 주장할 때 야훼께서 그를 생명의 땅에서 죽음의 세계로 보내버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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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정하신 뜻대로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며
때와 기한을 정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꿈과 소망과 기대가
주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과 일치되길 바라오며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고
주님의 뜻에 최우선순위를 둘 수 있길 원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의 말씀을
가감없이 듣고 전할 수 있는 능력도 주옵소서.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