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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6:16-24 예레미야의 성전 연설과 그의 재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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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관들과 백성들이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했기에 죽일 이유가 없다고 하자 장로 중 몇 사람이 미가 선지자의 예언으로 히스기야가 뜻을 돌이킨 것과, 우리야의 예언에는 여호야김이 그를 죽인 것을 예로 들어 변호합니다. 또한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도와 백성들이 죽이지 못하게 합니다. 

*

# 16절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했는지의 여부가 선지자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기준입니다. 

고관들과 모든 백성은 예레미야가 야훼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했기에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고 판결합니다. 8절과 달리 백성도 예레미야의 무죄에 동의합니다. 이들이 무죄를 선언하는 근거(‘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니’)와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9절에서 유죄의 근거로 제시하는 내용(‘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이 서로 일치합니다. 야훼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자이기에 예레미야는 야훼의 예언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반면에 고발자들에 따르면 야훼의 예언자라면 성전과 성의 멸망을 선포할 수 없음에도 야훼의 이름으로 예언하기에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다의 고관들과 모든 백성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이름에 의탁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어느 곳에서도 이들이 예레미야의 선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야훼께로 돌아왔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부합한 말을 하는 설교자(예언자)?는 더이상 선지자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이가 참된 선지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잃컫지도 말아야 하며, 여호와의 권위와 진실 앞에서 언행을 삼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판별하는 기준은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기복적이고 세상적이며 근거 없는 용서와 복은 재고해 봐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 곧 그분의 영광에 부합하는 자만이 참된 선지자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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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9절 여호와의 심판 예언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 목적임을 알고 합당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재판은 대신들과 온 백성이 예레미야를 야훼의 예언자로 인정하는 16절에서 실질적으로 끝납니다. 17-19절은 심판 예언자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자들의 부당성을 역사적 예를 들어 입증합니다(cf. 28:8). 지방의 장로 가운데 몇 사람이 [판결을 내리게 될] 전체 회중에게 미가의 경우(미 3:12)를 예로 들어 신중하게 판단할 것을 제안합니다(17절). 

유다 왕 히스기야가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을 선포한 모레셋 출신의 예언자 미가(18절)에게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왕은 미가를 죽이지 않고 그의 심판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야훼께 의존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왕하 18:4) 결정된 야훼의 재앙을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19a절). 역사로부터 배우기를 거절하고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를 죽인다면 그가 선포한 재앙이 유다에 그대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19b절). 장로들은 [여호야김 왕에게] 예레미야의 심판예언을 거절하여 멸망을 자초하지 말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촉구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인정하고 히스기야 왕의 경우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도록 충고한 것입니다.

본문은 히스기야와 여호야김을 대조시켜 왕이 예언자의 선포(하나님의 의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야훼의 심판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 나아가 간구했던 히스기야는 선포된 재앙을 되돌릴 수 있었던 의로운 왕의 전형입니다. 반면에 심판 예언자를 탄압하는 여호야김(20-23절)은 야훼의 심판을 자초하는, 유다를 멸망에 떨어뜨린 악한 왕의 전형입니다. 히스기야와 여호야김의 대조는 하나님의 심판선고 앞에서 왕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히스기야의 경우처럼 예레미야를 죽이지 않고 그의 심판예언을 진지하게 수용하면 선포된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23절에 보고된 선지자 우리야의 살해 사건은 여호야김이 어떤 길을 택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지금도 우리가 심판예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그 뜻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 민감한 영적 감각을 가지고 보고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백성이 지혜로운 백성입니다. 때를 아는 것, 시대를 분별하는 것, 예언자의 선언을 수용한 것, 그리고 공동체와 여타 하나님의 사람들이 행하는 것에 대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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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절 여호와의 말씀에 신실하게 반응할 수 있는 믿음 주옵소서. 

현재의 문맥에서 20-24절은 심판선언에 분노하여 예언자를 죽이는 여호야김을 심판선언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히스기야(26:18-19)에 대조시켜 고발합니다. 미가의 심판선언(미 3:12)을 받아들여 회개한 히스기야는 유다에 선포된 심판을 되돌릴 수 있었는데 반하여 그의 후손인 여호야김은 거리낌 없이 야훼의 예언자를 죽임으로써 유다의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여호야김 왕이 유다의 심판과 멸망에 일차적 책임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20-23절은 예레미야와 동시대 사람으로 마찬가지로 심판을 외친 예언자 우리야의 비극적 운명을 기술합니다. 여기에만 언급되는 우리야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럇여아림(cf. 수 15:60; 18:14) 출신으로 예레미야처럼 예루살렘과 유다에 심판을 선포했습니다(20절). 유다 왕 여호야김이 죽이려 하자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는 애굽으로 도주하여 위험을 피합니다(21절). 그러나 여호야김은 애굽에 사절을 보내(22절) 그를 압송해다가 죽여버립니다(23a절).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해 왕위에 오른 여호야김은 [적어도 느부갓네살이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는 605년까지는 애굽의 충실한 봉신이었기에] 도망한 우리야를 넘겨받는데 별다른 외교적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자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폭력으로 응답합니다. 그는 예언자 우리야를 정적(政敵)으로 간주하고 처형해 버립니다. 여호야김 왕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던 우리야는 비참한 죽음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예언자에게 합당한 장례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의 시신은 가족묘지에 안치되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밖 기드론 계곡에 있는 ‘평민의 묘지’(공동묘지)에 묻힙니다(23b절).

구약성서에서 예언자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는 역대기하 24:20-22에서 한번 더 나옵니다. 유다 왕 요아스는 성전 뜰에서 자기에게 비판적인 예언자 스가랴를 돌로 쳐죽이게 합ㅎ니다(cf. 마 23:35; 눅 11:51). 스가랴는 아달랴를 제거하고 요아스를 왕위에 앉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야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과 유다에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는 어떻게 여호야김의 폭력과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까? 우리야와 달리 예레미야 주변에는 그를 보호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합니다. 야훼께서 예레미야를 고난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cf. 1:19, 8) 여호야김 주변 인물들을 통해 당신의 예언자를 구원해 주십니다.

주전 622년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요시야 왕에게 전달한 서기관 사반(왕하 22:3, 8, 9, 10, 12; 왕하 22:14)과 아히감의 아버지 사반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열왕기하 22:14에 의하면 사반의 아들 아히감은(왕하 22:12) 요시야 왕이 여선지자 훌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보기 위해 보낸 사람들 중의 하나로 서기관 사반에 앞서 언급됩니다. 아히감은 느부갓네살이 유다에 세운 총독 그다랴의 아버지 이름이기도 합니다(렘 39:14; 43:6; 왕하 25:22). 36:12에 나오는 사반의 아들 그마랴와 형제간인지도 불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방법들은 뜻하지 않는 이들의 도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간과 장소와 열리고, 사람들이 손을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선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인위적으로 그 시간을 좁이거나 폄하하거나 무시해석 아닙니다. 내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니는 것이 옳습니다. 

*

# 거둠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허다한 시대에 참된 말씀을 전할 수 있기를

말씀의 홍수 시대에 참된 말씀의 기갈이 심한 시대에

생명수 샘물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않은

오직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것을 그대로 증언할 수 있길 빕니다. 

부디 나와 우리를 향한 경고에 합당하게 반응하길 원하오며

연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귀환에 색안경을 끼지 않게 하옵소서.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세워지고 유지 되는 것을

바로 보고 듣고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 주위에 돕는 이들을 붙여 주심 또한 감사드립니다. 

또한 말씀을 맡은 이들을 보호하고 지는 데 

힘써서 맘을 더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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