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01:01-11 슬픔 중의 간구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중에 이렇게 무너진 원인을 되짚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 한줄묵상 : 오늘 우리 삶의 곤고함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로 든 죄악된 삶에서 돌이켜 우리를 감찰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는 것이 다시 살 길임을 믿습니다.
1-3절 상실은 이전의 소중한 것과 헛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많은 이들이 찾던 곳, 열국 중에 크던 자, 열방 중에 존경받던 공주같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황량하고, 과부같고, 포로된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슬퍼하나 위로자 없고, 이전에 사랑하고 위로하던 친구들도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고, 안식할 수도 없고 도리어 사로잡힌 자 된 처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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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올라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찾았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성전이 무너졌기에 오는 사람도 없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별로 없습니다. 이전에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으로 여호와께서 신랑되어 주시므로 말미암아 사랑받는 이들이었지마 이제는 여호와를 떠나므로 말미암아 과부와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의 대명사입니다. 또한 열방 중에서 부러움을 사고 존경하며 살던 존재였지만 이제는 착취당하고 포로된 비참한 노예로 전락하여 강제 노동을 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친바벨론, 친애굽등의 정책들과, 주변 소수국(암몬, 모압, 에돔, 두로와 시돈 등)들과의 동맹등의 외교력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잘 세워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나라가 망해 가는 즈음에는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호시탐탐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이스라엘의 영토를 노리는 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만나주지도 않고 찾아 주지도 없으며 심지어 자신들을 고발하고 도리어 찾취하는데 혈안이 된 것 같아 어느 곳에서도 쉴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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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많이 찾아 올 때는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자고하며 잘 나가고 승승장구할 때에는 두려울 것이 없었고 외롭지 않으며 미래 삶에 대한 부분도 든든하게 보장되어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존경하고 추켜 세울 때는 우쭐거리면서 그런 대접이 오래 갈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교만하여지고 급기야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허락하시는 분을 망각하게 되면 어느날 여호와의 허락하심이 거두어지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때가 옵니다. 그것이 건강이 되었든지, 부와 명예가 되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본분으로 알던 것을 잃고 헛된 것에 자고하고 맘을 쏟고 의지하며 살던 것들을 하루 아침에 잃게 될 때에는 허망할 뿐입니다. 탕자가 흥청망청할 때에는 사랑하던 자 친구들도 있었지만 물이 떨어지자 모두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비로소 쉴 곳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던 것을 앗아가는 것들임을 뒤늦게야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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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다 잃고서야 뒤늦게 우리 주님의 소중함, 또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지금의 모든 것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혹여 주님보다 더 의지하고 위로받고 사랑하는 것이 있진 않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4-6절 우리의 범죄함은 삶의 총체적 곤고함으로 귀결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온의 적막함으로 말미암아 제사장들과 처녀들이 탄식하고 근심합니다. 이러한 원인은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형통하고 자녀들은 사로잡혀가고 모든 영광을 잃고 지도자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곤고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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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 무너지므로 말미암아 절기를 지키기 위해 이곳을 찾아올 이유가 없기에 시온으로 오는 도로는 적막합니다. 총체적인 멸망은 그곳을 찾아올 사람들이 죽었기에 없기도 했습니다. 더이상 이스라엘을 다스릴 만한 그 무엇도 이 성에 남아 있지 않기에 성문도 적막합니다. 이에 제사장들은 더이상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없어서, 예배가 없기에, 그리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하여 탄식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정신차리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소유하던 것과, 누리던 기득권들을 잃어서 탄식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전쟁은 가장 연약한 여인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유린을 가져오기에 근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시온의 곤고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된 원인이 우리의 죄가 많음임을 알고 있고, 여호와께서 이렇게 심판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습니다(5절). 예루살렘의 영광은 여호와께서 임재하시고 기억하시고 함께 있을때 의미와 영광이 있는 것이지만 이제 여호와께서 버리시니 모든 영광이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난국와 범죄함의 원인은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범죄함에서 출발했습니다. 힘도 믿음도 능력도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잠시 누리는 알량한 권력에 취해서 이러한 것들을 주관하시는 여호와를 망각하고 교만하고 자고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여호와의 심판으로 보내진 외세에 저항도 못하고 힘없이 도망하는 신세로 포된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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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역할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바로 알고 믿고 살아가는 일을 가르치고 돕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본분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주어진 권함을 권력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치권력을 이용하고 이러한 일들을 유지하기 위해 물질을 탐하여 제사를 위해 온 이들의 고혈을 착취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고 유지하는 일에 급급했던 것이 유다 멸망 상황의 성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누차 경고했음에도 오히려 거짓 예언을 더 신뢰하면서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하나님은 성전을 무너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이 탄식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것을 잃은 탄식이며 더이상 이전에 누리던 것들을 누릴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잘못된 전횡으로 고통받는 것은 언제나 민중입니다. 처녀들이 근심하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가르쳐 주지 않아서도 문제이지만 가르쳐 주어도 관심이 다른 곳에 있다면 지도자들은 성도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헛된 기복과 치유등의 개인적이고 윤리적이고 기복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밖에 없고, 그 세를 늘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고 정작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일을 가르치는 일은 뒷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의인에게는 구원이지만 악인을 심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의인으로 살아가야 할 거룩한 백성들의 타락이 결국 악인이 흥왕하고 잘되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이렇게 곤고하게 하신 뜻은 하나님의 백성을 깨우기 위함인데 그 아픔앞에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잃은 것에만 탄식하고 있고 오히려 원망을 여호와께 향하기 일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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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우리가 악행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바로 그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우리 삶의 총체적 멸망의 요소들은 아주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한 소홀함,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뜻에 대한 외면과 왜곡에서부터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자신이 먼저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부지런히 가르치는 일이 가장 중요한 본분임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이상 배우러 오는 이들도 들으려 하는 이들도 찾는 이들도 없을 때가 오고, 세상은 더욱 악인의 흥왕으로 가득할 때가 오거나, 어쩌면 지금 그런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7-9b절 우리의 도움과 위로가 주님 아니라면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할 때에 바로소 이전의 즐거움들, 소중함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포로로 끌려가고 고통을 당하지만 돕는 자가 없고, 대적들은 비웃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함으로 멸망하게 된 것은 대적들의 조소거리가 되었고, 전에 존중하던 이들은 이들의 수치를 비웃습니다. 애초에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부정한 일들을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자행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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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함 속에서도 여전히 누리는 것들이 많았을 때는 그저 즐겁고 좋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멀고 지금 당장 있는 부와 권력의 맛이 훨씬 더 달콤했기에 회개와 자각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한 이들이 오래도록 위로하고 돕는 자로 남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주변국들은 누구도 돕는 자가 아니라 멸망을 비웃고 그들을 돕는 신이 연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함이 여호와마저 조소와 업신여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더러운 일들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결국 모든 것을 삼키는 범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고 탐욕을 탐닉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자고했던 만큼 역설적으로 멸망하고 난 이후에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이 낮아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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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누린 것이 많을 수록 상시른 더 큰 상심과 낙심을 가져 옵니다. 어리석게 믿었던 이들로부터의 배반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진정한 친구요 이웃인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변함없이 곁에 있어주고 도우며 위로하는 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물질과 사람을 더 의지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든든하게 생각하는 노후 보장과 삶의 기쁨들과 이유들을 살펴보면 우리도 이렇게 부질없는 것들을 든든해 하면서 사소한 부정과 주님과의 관계등을 소홀히 여기면서도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내일을 생각지 않고 오늘만 좋은게 좋다고, 삐뚫어진 길을, 어긋난 길을, 헛된 길을 추구해 살아간다면 남은 날의 첫날은, 그리고 우리의 내일은 결코 보장 받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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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제의 삶이 오늘을, 오늘의 삶이 내일의 삶의 내용과 방향을 좌우한다고 한다면 지금 더러운 것들이 우리 삶에 묻어 있다면 벗고 씻고 돌이키고 정화하며 온전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제와 같은 해가, 오늘과 같은 내일이 변함없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오늘을 늘 생의 마지막처럼 주님 앞에 살아감을 기억하는 일이 신앙의 깊이와 성숙함을 좌우하는 마음가짐입니다.
9c-11절 이전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주의 감찰하심과 돌보심에 간구하는 일을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아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원수들은 자고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보물들을 빼앗아 갑니다. 성전을 유린합니다. 양식도 약탈해 가버리고 맙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참한 지경에 빠진 이스라엘의 환난을 감찰하고 돌아보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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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왕의 왕 되신 여호와의 나라를 이겼으니 바벨론은 자고해 질 수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저항하던 이들을 철저하게 유린했기에 더더욱 이스라엘이 주장한 대로 성전의 하나님의 임재는 이제 조소거리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방인과 제사장 아닌 이들은 결코 여호와의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 성전이 통채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성전은 껍데기 건물일 뿐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만날 길도 그리고 그들이 먹고 살아갈 양식도 모두다 철저하게 빼앗아가 버리고 말았기에 이들은 비천한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원수의 행위에 대한 감찰과 비천한 지경에 양식없어 주린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돌보심이 없다면 더이상 살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을 탄식하며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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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다고 해서 자고하고 자만하며 잘못된 행동까지 묵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쓰임받을 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도 그렇고, 택한 백성을 심판하시는 여호와를 보면 그 앞에 쓰임받는 우리라고 범죄할 경우에 예외가 없이 심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여호와의 임재가 있을 때 영광과 위엄이 있는 것이지 영광이 떠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주님의 몸된 성전인 교회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의 의미는 거룩함입니다. 거룩한 예배와 삶이 없다면 우리 안에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이며 그것은 심각한 멸망으로 가는 첩경이 됩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안다면 지금 우리를 감찰하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구할 양식은 주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양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먹고싶어도 구하고 싶어도 찾고 싶어도, 먹지도 못하고, 구하지도 못하고 찾을 수 없을 때가 오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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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주님의 면전에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를 보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몸된 성전으로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돌아보고, 우리가 간절히 구하는 양식이 주의 말씀인지 아니면 배부르게 못할 헛된 양삭인지 살펴 봐야 할 것입니다. 헛된 것에 배부른 자들은 결코 주의 말씀이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갈급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그런 영적 상태라면 심각한 영적 위기임을 깨닫고 다시 주님앞에 나아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살 길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 기도
열방과 우리 모두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이미 허락하신 것들의 소중함을 매일 고백하며
지금 허락하신 것들을 감사하고 바르게 누리고 살게 하옵소서.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본분과
보배로운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고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회개하오니 탄식의 날이 오기 전에 깨닫게 하옵소서.
악인의 형통이 잠깐임을 기억하면서
곤고한 날이 오기 전에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는 지혜도 주옵소서.
사소한 부분에서의 삶에도 정결함 잊지 않고
날마다 주님의 면전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여
부르심에 합당하게 보배로운 소유로 거룩한 백성으로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 감당케 하옵소서.
예레미야애가 묵상 통해서
다시금 조국의 교회와 섬기는 교회를 바로 보고
함께 기도하며 온전하게 세워가는 시간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