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7:37-52 성경을 아는가?
초막절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성경에 이른대로 오셔서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이에 대한 사람들(무리,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경비병, 바리새인, 니고데모 등등)의 다양한 반응 속에서 성경에 대한 앎이 무엇인지, 성경의 무지에 대한 결과가 무엇인지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37-39절 성경에 이름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는 그 배(예수님)에서 생수의 강(성령님)이 흘러나오리라 하신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해 주고 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께서 영광(십자가)을 받기 전이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한다.
요엘, 스가랴, 에스겔 등에서 표현된 생명의 물이 이제 새 이스라엘이요, 새 성전 되신 예수님을 통해 흘러 나올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 초막절 축제에서 물의 역할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제 축제의 진정한 성취가 예수님을 통해 이뤄질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목마른 영혼들을 향하여 자신을 통해서 해갈 할 수 있다고 선언하시면서 성경에 이미 이른대로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흘러 보내신 성령의 충만을 구합니다. 우리로 일평생 이 물을 통해 강건케하시고, 다시 목마르지 않게 하옵시며, 날마다 주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성경에 이른대로 오셔서 순종하사 이 모든 일들을 성취하신 분으로 믿습니다.
40-45절 성경에 이르기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그 선지자라 하는 사람, 그리스도라 하는 사람, 출신 배경을 통해서 갈릴리에서 나올 수 없다고 하는 사람 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보인 무리 중에서 성경을 안다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는 것을 상기합니다. 이로 인해 자기들끼리 쟁론이 되었습니다. 그중에 어떤 자들은 예수를 잡고자 하지만 손을 대는 자가 없었습니다. 소위 성경을 자유자재로 인용 설명 강론하는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메시야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예수를 잡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잡고자 하지만 손을 대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인용하고 말한다고, 날마다 묵상하다고 신앙교육이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주님을 알아가는 데 걸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이 전통적인가 성경적인가 하는 부분은 늘 말씀앞에서 점검되어야 합니다. 크신 주님을 알량한 우리 지식과 신학의 틀에 가둔채 제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5-49절 성경(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
아랫사람들을 통해 예수를 잡으려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빈손으로 오자 왜 그렇게 했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아랫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한 자들이 그동안 없었다고 놀라며 자신들이 잡지 못하고 온 이유를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미혹되었다고 보고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들 모두 그렇게 믿는자가 없다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과 아랫사람들이 성경을 모른다고 힐난합니다.
여기서 아랫사람들은 로마 병정이라기 보다 종교지도자들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무리들로서 레위지파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들고 성경을 알고 있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성경을 알고 가르친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고, 아랫사람들(레위지파 제사장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처럼 말씀하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고까지 말하며 성경이 증거하는 분을 만나게 되니 성경과 율법을 제대로 알아가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안다면 성경의 주제와 저자를 알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예수님은 일찌기 성경이 영생을 얻는 줄 상고하는 이들에게는 영생의 길을 보여 주는데, 이 성경이 곧 나(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면 49절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소위 미혹당한 무리들이 율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예수를 알거나 믿지 못하므로 주님을 믿는것도, 성경을 아는 것도, 갈 바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50-52절 성경을 찾아 보라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해서 변호합니다. 이 율법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전에 심판하느냐 하면서 예수님을 적극 변호한것입니다. 그러자 공회 사람들은 니고데모에게 오히려 성경을 찾아보라 하면서 갈릴리와 선지자를 연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대하여 연구하는 니고데모에게 성경을 읽어 보라 하며 모욕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는 것이다(사실 이곳 출신 선지자들이 이미 구약에서 있었다. 바로 요나와 호세아다). 하지만 갈릴리 출신 두 선지자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결국 공회는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율법을 읽어보라고 니고데모에게 권하던 이들은 성경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자신들이 성경을 잘 모르고 있었음이 들통난것입니다.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보고 듣고 읽고 묵상하면서 과연 그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의 말씀으로, 나를 살리고 변화시키며 성숙시키고 거룩하게 하는 말씀으로 믿고 있는지...더 나아가 지금 성경을 보면서 오늘도 말씀을 통해 정말 주님의 인도를 따라 잘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점검합니다.
* 기도
말씀의 주 하나님 아버지
성령 충만을 허락해 주옵소서
출신 배경과 여타 조건을 따지는 공동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형제자매임을
늘 잊지 않게 하옵소서.
언행일치로 신앙을 이어가고,
정말 성경을 바르게 읽고 이해하고 적용해 나갈 수 있게 하옵소서.
초막절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성경에 이른대로 오셔서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이에 대한 사람들(무리,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경비병, 바리새인, 니고데모 등등)의 다양한 반응 속에서 성경에 대한 앎이 무엇인지, 성경의 무지에 대한 결과가 무엇인지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37-39절 성경에 이름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는 그 배(예수님)에서 생수의 강(성령님)이 흘러나오리라 하신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해 주고 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께서 영광(십자가)을 받기 전이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한다.
요엘, 스가랴, 에스겔 등에서 표현된 생명의 물이 이제 새 이스라엘이요, 새 성전 되신 예수님을 통해 흘러 나올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 초막절 축제에서 물의 역할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제 축제의 진정한 성취가 예수님을 통해 이뤄질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목마른 영혼들을 향하여 자신을 통해서 해갈 할 수 있다고 선언하시면서 성경에 이미 이른대로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흘러 보내신 성령의 충만을 구합니다. 우리로 일평생 이 물을 통해 강건케하시고, 다시 목마르지 않게 하옵시며, 날마다 주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성경에 이른대로 오셔서 순종하사 이 모든 일들을 성취하신 분으로 믿습니다.
40-45절 성경에 이르기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그 선지자라 하는 사람, 그리스도라 하는 사람, 출신 배경을 통해서 갈릴리에서 나올 수 없다고 하는 사람 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보인 무리 중에서 성경을 안다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는 것을 상기합니다. 이로 인해 자기들끼리 쟁론이 되었습니다. 그중에 어떤 자들은 예수를 잡고자 하지만 손을 대는 자가 없었습니다. 소위 성경을 자유자재로 인용 설명 강론하는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메시야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예수를 잡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잡고자 하지만 손을 대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인용하고 말한다고, 날마다 묵상하다고 신앙교육이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주님을 알아가는 데 걸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이 전통적인가 성경적인가 하는 부분은 늘 말씀앞에서 점검되어야 합니다. 크신 주님을 알량한 우리 지식과 신학의 틀에 가둔채 제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5-49절 성경(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
아랫사람들을 통해 예수를 잡으려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빈손으로 오자 왜 그렇게 했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아랫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한 자들이 그동안 없었다고 놀라며 자신들이 잡지 못하고 온 이유를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미혹되었다고 보고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들 모두 그렇게 믿는자가 없다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과 아랫사람들이 성경을 모른다고 힐난합니다.
여기서 아랫사람들은 로마 병정이라기 보다 종교지도자들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무리들로서 레위지파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들고 성경을 알고 있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성경을 알고 가르친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고, 아랫사람들(레위지파 제사장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처럼 말씀하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고까지 말하며 성경이 증거하는 분을 만나게 되니 성경과 율법을 제대로 알아가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안다면 성경의 주제와 저자를 알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예수님은 일찌기 성경이 영생을 얻는 줄 상고하는 이들에게는 영생의 길을 보여 주는데, 이 성경이 곧 나(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면 49절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소위 미혹당한 무리들이 율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예수를 알거나 믿지 못하므로 주님을 믿는것도, 성경을 아는 것도, 갈 바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50-52절 성경을 찾아 보라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해서 변호합니다. 이 율법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전에 심판하느냐 하면서 예수님을 적극 변호한것입니다. 그러자 공회 사람들은 니고데모에게 오히려 성경을 찾아보라 하면서 갈릴리와 선지자를 연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대하여 연구하는 니고데모에게 성경을 읽어 보라 하며 모욕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는 것이다(사실 이곳 출신 선지자들이 이미 구약에서 있었다. 바로 요나와 호세아다). 하지만 갈릴리 출신 두 선지자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결국 공회는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율법을 읽어보라고 니고데모에게 권하던 이들은 성경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자신들이 성경을 잘 모르고 있었음이 들통난것입니다.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보고 듣고 읽고 묵상하면서 과연 그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의 말씀으로, 나를 살리고 변화시키며 성숙시키고 거룩하게 하는 말씀으로 믿고 있는지...더 나아가 지금 성경을 보면서 오늘도 말씀을 통해 정말 주님의 인도를 따라 잘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점검합니다.
* 기도
말씀의 주 하나님 아버지
성령 충만을 허락해 주옵소서
출신 배경과 여타 조건을 따지는 공동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형제자매임을
늘 잊지 않게 하옵소서.
언행일치로 신앙을 이어가고,
정말 성경을 바르게 읽고 이해하고 적용해 나갈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