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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05:11-06:08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멜기세덱 계열의 대제사장에 대한 주제를 설명하려다 보니(5:10, 6:20, 7:1) 수신자들의 영적 상태가 이러한 이야기를 이해하는 영적 태도가 둔하다(5:11, 6:13 인크루지오)는 것을 알고 이에 대한 진단과 처방과 경고를 전하며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 5:11-6:20 수신자들의 미숙함에 대한 경고와 격려

  1) 5:11-14 미숙한 수신자들의 영적 상태 진단

  2) 6:1-3 미숙함의 문제 해결을 위한 처방

  3) 6:4-8 문제 해결의 중요성 : 미숙함의 위험에 대한 경고

  4) 6:9-12 미숙함 문제 해결에 대한 확신과 격려

  5) 6:13-20 미숙함 문제 해결에 대한 격려의 근거



# 11-14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서 자라 장성한 자가 되라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으나 수신자들의 영적 상태가 둔하여 설명하기를 멈추고 그들의 상태를 진단해 줍니다. 이미 믿음을 갖게 된 시기가 오래 되어서 이제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어야 하는데 여전히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 있어서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장성한 자가 먹는 단단한 음식 곧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고 여전히 젖이나 먹어야 하는 상태입니다. 장성한 자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고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입니다.

*

수신자들의 듣는 것에 둔하다고 할 때 우선 듣는 것은 단순한 지적 활동 뿐 아니라 그 말에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 삶에서의 순종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둔하다는 것은 원래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경성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지금 둔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둔하게 되면 결국 성장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선생이 되어 가르치고 능력을 갖춘 자들이 되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말씀의 초보적 요소를 가르침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것도 신앙의 초보적인 수준에서 배워야 하는 것들(젖을 먹는 자)을 여전히 들어야 하는 처지에서 더이상 진보하지 못한 것입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가 먹는 것인데 이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를 말합니다. 이는 진보된 진리 뿐 아니라 도덕적인 행동 원리도 포함하는 말로 단순한 이론만이 아니라 삶의 결과로 나타나는 원리 그래서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7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의 젖을 먹는 자와 14절의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자가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라는 말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도록 꾸준한 사용으로 단련된 분별력을 지닌 자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분별력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사용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한번 깨닫는 득도의 원리가 아니라 천천히 성장하는 성장의 원리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성장을 위해서는 꾸준히 연단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일도 매일 매일 함께 살아가는 꾸준한 생활, 지속적 단련을 통해 장성한 자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

신앙에는 분명 수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과 교재에도 마찬가지 성숙의 깊이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한 번의 깨달음,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신앙 전반과 삶의 전반에 대해 더 알아가고 더 온전해지고 깊어지고 장성해지는 데로 나아가야 신앙의 초보에서 머물지 않고 장성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는 묵상과 배움과 연단 곧 훈련에 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고 선악을 분별하는 것 곧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으로 자라가지 못합니다. 성장이 멈추는 것은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생명력 있는 신앙은 계속 자라 가고 진리를 아는 일에 깊어가고 그것이 마침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 1-3절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유대인들이면 누구나 아는 신앙의 초보적인 가르침을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장성한 자)로 나아가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초보적 가르침들의 구체적 모습들은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 씻는 의식들에 관한 교훈과 안수,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유대인이면 누구나 아는 초보적 가르침이며 진리입니다. 저자는 수신자들도 이미 알고 있는 초보적 상태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곧 장성한 자로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긍정적인 말로 처방을 마무리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이러한 성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장성함으로 나아가는 일에 있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하에 이루어진다면 그 주권 앞에 나아가 경외함으로 모든 눈물과 통곡으로 간구와 소원은 올리는 기도가 장성함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미 앞서 예수님께서 고난의 순종으로 배워가셨던 길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

기도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의뢰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허락하시는지 주님 앞에 빈손들고 경외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라가고 성숙해져서 장성한 자가 되어 누군가를 양육하고 세우고 돌보며 길러내는 신앙의 어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인 것은 맞지만 때로 지나치게 목회자나 교회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신앙생활이 오래여도 이렇게 되면 어른이 되지 못합니다. 보통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 어른이 되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신앙의 자녀들을 낳아 가르치고 양육할 수 있는 데까지 가야 진정한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직분상으로 이러한 일을 하는 이를 장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의 역할에는 다른 무엇보다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고 목회서신에서는 강조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신앙의 초보에 머물러 의존적이고 유아적인 상태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로만 있다면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 어른이 없는 교회 공동체와 가정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어른이 단단한 음식을 먹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고 연단을 통해 선악을 분별하는 자로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양육해갈 수 있는 장성한 자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는 대로, 주님이 허락하시는 만큼 겸손하게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 4-8절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데서 자라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라

초보적 단계의 신앙에서 장성하지 않는다면 결국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번 신앙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다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땅은 내리는 그 비를 흡수하여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으나,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됩니다.

*

한 번 비췸을 받는다는 것은 개종사건 또는 세례를 말합니다. 자라지 않는 이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은사 곧 하늘의 선물인 구원을 실제적으로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성령에 참여한 바도 성령을 통해 주어진 다양한 기적들을 실제적으로 동참하고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은 성경의 가르침과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네가지 경험들은 모두 실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맛보고도 타락한 것은 배교를 의미합니다. 이는 개별적으로 범죄했다기보다는 믿음을 의도적으로 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앞서 광야의 이스라엘의 선례(3:7-4:11)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 중에는 이러한 배교자가 있다기 보다는 그런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배교는 결국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드러내 놓고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7-8절에서는 농사의 비유를 들어서 자주 내리는 비 곧 4-5절에 있는 영적 경험들을 받고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 곧 영적 열매를 맺는 다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그렇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마지막엔 불사름을 당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17-20에서도 이미 땅의 중요성이 생산의 결과물인 것처럼 사람에게 있어서 영적 열매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에 반응한 사람이 처음에 누리는 영적 유익은 같지만 결과는 다르게 나올 수 있습니다. 마치 네 밭에 뿌린 씨가 처음에는 동일하게 나지만 결실의 여부가 갈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마 13:1-9).

*

그리스도인들의 배교 가능성에 대한 이 구절과 구원의 안정성에 대한 대조된 구절들은 목회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안전성은 구원에 불안을 느끼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주어진 말씀들이고, 배교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은 자신들이 직면한 영적 위기에 직면해서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너무 민감한 이들, 너무 무딘 이들 모두에게 적절하게 권면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지금 너무 둔한 상태에 있어서 이들의 위험한 상태를 깨우치기 위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교의 선례들은 광야의 이스라엘이나, 빌립에게 복음을 듣고 표적과 기사를 경험한 사마리아에서의 시몬이 후에 이교의 우두머리가 된 경우, 열두 제자들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적으로 우리는 격려와 경고에 대한 긴장을 지혜롭고 적절하게 강조하고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어느 한편만 지나치게 강조하다가는 둔한 이들의 멸망과 연약한 이들의 염려로 실족하게 하는 일을 막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듣는 이들이 영적 위험 곧 배교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이들을 향하여서는 경고로, 영적 위험을 지나치게 염려하여 연약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격려함을 통해서 세워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각을 사용하고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장성한 자로 말씀 위에 든든히 세워지길 원합니다.



# 기도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신앙이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초보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만 머물다

장성한 자로 온전한 자로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봅니다.

말씀을 맡은 자로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단단한 것을 먹기를 게을리하여

주의 말씀을 깨닫는 데 준하고

연단과 훈련과 배움의 시간들을 갖지 않으면서

젖만 먹는 신앙으로 만족해하면서

정작 합당한 열매맺는 데에 게을렀음을 고백합니다.

겸손히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우리가 마땅히 배우고 먹고 연단해 가면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면서

선악을 분별하는 자로 자라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이미 경험한 신앙의 능력들 위에

더 온전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에

열심을 품게 하여 주옵소서.

배교의 위험에 있는 데에는 경고와

연약한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격려와 위로를 통해

함께 온전하게 세워져가는 가정과 공동체이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가정과 교회안에

믿음이 장성한 이들이 많이 세워져서

맡겨준 자녀들을 잘 양육할 뿐 아니라

맡겨주실 어린 자들을  잘 양육하여

말씀 위에 든든히 세워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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