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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16-23 지혜와 순결 그리고 인내로 가야 할 길


이제 제자가 가야 할 길에서 예상되는 거절 이상의 핍박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고 성령의 도우심에 대해 약속하시며 끝까지 견뎌야 할 이유를 제시하십니다.


# 14-18절 핍박 속에서도 지혜와 순결은 결국 복음을 증거하는 통로가 됩니다.

이스라엘 집으로 보내는 데도 양(제자들)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합니다. 때로 사람들이 공회에 넘겨 채찍질 당하고, 총독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기도 할 터인데 오히려 그들과 이방에게 복음을 증거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

제자 파송의 지침들을 세밀하게 언급하시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상을 향한 혁명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의 수양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왕, 새로운 세상에 대한 변혁을 말하고 있기에 이에 반하거나 저항하는 세력 뿐 아니라 기존에 왕노릇 하던 것들의 강력한 반발과 핍박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양을 이리에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제자는 세상의 방식으로 대처해서는 안됩니다. 우선 뱀처럼 지혜롭고 그리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합니다. 유대 문화에서 뱀이 지혜롭다 여기는 것은 문화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중동의 문화에서는 말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아는 것이 많고 속에 든 것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혀가 두개인 뱀은 지혜로운(때로 아담을 꾄 뱀은 ‘간교하다’라고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동물로 성경 곳곳에 인식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둘기는 순결한 동물로 인식되어 인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흠없는 제물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할 제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하고 진실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의 모습에서 흠잡을 만한 행위로 말미암아 복음의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할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칫 작은 부분들을 괜찮겠지 하면서 타협하는 순간, 언제고 그것이 결국 가장 중요한 진리의 영광을 가리거나 걸림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는 제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실력도 지혜도 아는 것도 있어야 하지만 이러한 것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지혜롭게 말해야 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옳은 말이라도, 그리고 맞는 말이라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특별히 대적하는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오해와 분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을 삼가고 지혜로운 말이 사람과 관계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하는 말씀은 지혜와 순결 이상의 깨어 있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마음에는 긍휼의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더더욱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그런 후라야 사람을 삼가더라도 때로 만나는 아픈 일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주의하더라도 결국 대적들에게 잡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총독이나 임금들에게 끌려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에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바울사도의 선교 여정에서 보았습니다. 정상적인 루트로는 만날 수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죄수의 몸으로 총독과 임금들앞에 나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낮은 자로 나아가는데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강한 자를 넘어뜨리게 하는 일들을 보면 역전시키는 역사들을 보게 됩니다. 고난의 여정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해서라도 복음이 증거되어 들을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도 복음의 역사를 이루고, 뭇 영혼들을 추수하길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설 명절에 종교적인 문제로 가족간에 대화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옳고 참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알고 있지 않고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는 이들에게는 사실과 진실도 얼마든지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있고 우상에게 제사하고 절하는 이들을 문제라 생각하며 보더라도 지혜로운 언행으로 처신하면서 평소의 삶에서 비둘기 처럼 순결한 모습으로 임할 때에라야 관계를 파괴하지 않으며, 상처를 주지 않고 전도나 역사를 이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롭고 정직하게 행동하더라도 불신자 가족들과 억울한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나 경제적인 문제들이나 세상의 복과 성공의 기준에 믿는 가정보다 오히려 믿지 않는 가정이 더 나은 경우, 그리고 물질이 많아서 가족 위계를 무시하고 처신하는 이들, 그리고 권위를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등 사실 억울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말할 수 없는 누명까지 당하는 경우라도 끝까지 지혜와 순결을 유지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그런 인내와 사랑이라야 사람의 변화와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그런 상황을 통해서 오히려 복음을 증거할 기회,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합력하여 선을 이뤄가시는 섭리를 신비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과 처지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그런 모든 일들을 통해 선을 이뤄가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처지를 우리 자신보다 그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은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고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주님의 뜻을 신뢰하며 고난이 예상되는 이 여정을 충성되이 감당해 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 19-20절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어디서든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뱀같이 지혜롭다 할 지라도 그래서 실력이 있고 아는 것이 많고 말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고 핍박의 상황에 처한 경우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는 우리게 있는 모든 지식과 힘들이 무력해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라도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 하나님도, 성경도, 복음도 그리고 사람과 세상에 대해서도 참 알아가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 진리되신 주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무수한 사상과 학문들의 도전도 만만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당시에는 정교일치된 국가체제,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온전히 깨닫고 이해하는데는 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3년의 시간동안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복음의 진리를 잘 깨닫지 못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때로 잘못된 전통과 지식을 가지고서도 폭력적인 권력 앞에서는 할 말도 잃게 만드는 경우들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처지에서도 염려하지 말라 합니다. 우리의 힘과 지식의 한계를 아시는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 아버지의 성령을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신다는 것은 성령의 역할이 예수님을 바로 알게 하시고 알게 된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적절하고 논리적인 그리고 담대하게 진리의 복음을 증거해야 할 때에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내용을 담대히 전할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신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가 모르는 것을 말하기 보다는 이미 알고 있으나 부족한 것, 그리고 바르게 깨닫지 못하는 것을 바르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이 들었으나, 알고 있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정리되게 하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은 말씀의 충만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을 알 수 있는 것이 말씀이요, 그 말씀을 깨달아 알고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분이 성령님이시니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결국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배우고 해석하고 적용하며 순종해 가는 모든 과정에서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뜻하시고 약속하시고 허락하신 것이기에 우리는 부단히 성령의 충만함과 도우심을 구하고, 성령이 충만한 후라야 담대히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성령님을 환영합니다. 지혜와 순결 그리고 담대함과 능력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옵길 원합니다.



# 21-23절 모든 이들에게 미움받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얻게 됩니다.

제자들의 선교(전도, 사역) 여정에 예상되는 핍박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결국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의 반대에 봉착할 때입니다. 때로 주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이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미리 경고하면서 피하거나 포기하라고 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을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결국 끝까지 이렇게 핍박하는 곳이 있다면 마지막에는 떠나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집을 다 다니지 못해서 인자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일차적으로 유대교 사회 속에서 예수님의 복음은 이미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도 많은 대적이 있었듯이 제자들의 여정에서도 많은 반대와 핍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가장 가까운 이들이 대적할 때입니다. 주님이 이미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예상하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불신 가족들을 역으로 고발하고 대적하라는 이야기가 아님은 기본 상식입니다. 그들은 대적하고 핍박할 수 있지만 그런 이들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기에 더욱 긍휼의 마음을 품고 지혜와 순결로 인내해야 합니다.

심지어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지경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이 길이 좁고 협착하여 많은 이들이 찾지 않는 것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격적으로 미워하고 대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할 때에 그들과 같이 대적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고 사랑하며 마음에 분을 품지 아니하고, 주님이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받은대로 우리도 그런 이들을 사랑하되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대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이 결코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때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때로 그런 핍박의 상황을 피해야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인내 후에 주님이 허락하시고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순종해 가는 것입니다. 때로 주님이 피할 길도 주시니 한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 세밀한 인도하심을 잘 분별하며 살 수 있는 영적 민감함을 늘 깨어 가져야겠습니다.

*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합니다. 아마도 위에 언급한 대로 제자들이 피할 길을 주시기 위함도 있으나, 추수할 것이 많은 상황의 긴박성 때문에도 그렇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와 기다림에도 한계가 있음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서 언급하고 있는 표현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일단은 공간적으로 앞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집으로 가라신대로 우선 제자들이 일차적으로 사역하는 곳이 이스라엘로 국한되어 있다고 한다면 인자의 임함에 대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다니엘 7장의 이맘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하는데, 구약에서의 인자의 이맘은 1차적으로 메시아의 도래를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 주님은 이미 이 땅에 오셨고 그 과정에서 또다시 인자의 임함을 주님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이 표현은 우선 인자의 임함이 메시아의 등극과 영광을 얻으심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고 영광을 얻으시는 사건은 가깝게는 십자가와 부활 및 승천의 사건을 그렇게 해석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AD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도 인자의 임함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주적 종말로서 예수님의 재림의 사건도 인자의 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루살렘 동네를 다 다니기 전에 인자가 임한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첫째와 둘째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이 부분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다시한번 다뤄질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추수 곧 선교를 하는 가운데 예상되는 핍박의 상황에 대해서 인내하라고 권면하면서 제자들에게 인자의 임함을 말하는 의도는 결국 핍박하는 이들을 향한 이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하면서 핍박하는 이들의 행동에 대한 보응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심판에 대한 예언은 선교적 사명에 대한 중요성과 더불어 핍박의 상황을 끝까지 인내해야 하는 이유와, 거절 하는 이들을 향한 경고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

핍박과 미움을 받을 지라도 부모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며 긍휼히 여기며 끝까지 인내로 견디며 경주하는 자가 복있는 자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애통하는 것이며, 온유한 것이며, 긍휼이 여기는 것이며, 마음이 청결한 것이며,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이며,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하는 것은 이전의 모든 선지자들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디 불신 가족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고압적이거나 무례하거나 교만하지 않길 원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가 결코 복음 전도에 유익을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진실로 긍휼의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바울 사도도 동일하게 권면합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었기에 예수를 핍박하던 자신도 마침내 변화되어 주님의 증인이 되었기에 문제 이웃을 향하여 그율의 마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려 주라고 해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기다려 주셨기에 우리도 오늘 여기에 설 수 있었듯이, 나같은 자도 부르신 주님이 그렇게 우리의 이웃도 불러 주실 것을 믿고, 그런 이들을 위해서도 주님이 햇빛과 비를 주셨음을 알고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셨음을 알고 이웃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마음(사랑)이며 그 사랑을 품을 때(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주님의 사랑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을 품는 것은 그 사랑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에라야 마침내 이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며,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원수까지 사랑하라신 뜻에 대한 순종이요, 축복의 통로되는 길이요,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행한대로 보응하실 것을 기대하며 인자의 임함을 소망가운데 바라보며 오늘 믿움 받을 용기, 십자가의 길, 원수의 공격 앞에서 천국백성된 제자가 끝까지 품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모습입니다.



# 기도

부족한 우리를 추수할 일꾼으로 불러 주시고

추수할 세상으로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

지혜와 순결 그리고 용기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그리고 모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않게 하옵소서.

늘 깨어서 주님의 증인으로 충성되기 원하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사

우리의 언행심사에 주의 말씀으로 무장케 하옵소서.

성령님의 세미하신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길 원합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의 거절과 대적 그리고 미움이 있을 때에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그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고

끝까지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인내로 경주하여 승리케 하옵소서.

선교의 긴박함들을 늘 깨어 감당케 하옵시며

주님의 임하심을 두려움 속에 보는 것이 아니라

소망가운데 바라보며 마라나타 하면서

살아가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게 하옵소서.

불신 가족들을 향한 주님의 구원이

금번 설을 맞은 가족들에게

역사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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