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03:01-18 음행으로 온 땅을 더럽히고도 수치를 모르는 죄, 배역과 반역의 죄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약속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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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3:01-18 음행으로 온 땅을 더럽히고도 수치를 모르는 죄, 배역과 반역의 죄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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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장은 유다의 죄악(혼합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해 고발하는데, 3장은 그런 유다가 회복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율법적으로는 이스라엘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명기합니다. 또한 그들의 행음이 온 땅을 더럽혔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교리적 신앙에 갇혀 왜곡된 적용으로 자신들의 탐욕과 죄악을 정당화합니다. 또한 북이스라엘의 배역한 죄로 말미암아 멸망한 것을 보고도 유다는 배우지 못하고 반역했음을 고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미 포로로 끌려간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돌아오라 하시며 긍휼을 베푸시고, 때가 되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여 새백성을 세우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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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절 오직 신랑되신 여호와만 사랑해야 하는 것이 신부된 교회가 지켜야 할 정결규례입니다. 

신명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이혼한 아내는 타인의 아내가 된 후에 다시 원래의 남편에게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신명기 24:1-4).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스라엘이 돌아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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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규정하십니다. 그만큼 친밀하면서도 보호와 책임을 수반하는 관계이면서, 서로 사랑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한분 하나님만을 사랑하도록 계약하고 맺어진 관계를 깨고서 하나님과 이혼하여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지금까지 고발된 혼합주의 신앙은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것입니다. 부부관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혼합주의 신앙도 가졌지만 여기서는 아예 남편과 이혼하고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러 가버린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떠나 다른 많은 무리(우상들)와 행음한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법규정을 알고 있는데 돌아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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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으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위는 계약 파기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서도 극도로 여성을 보호하는 쪽으로 말씀하셨지만 음행한 연고에 대하여서는 단호하셨습니다(5:32; 19:9). 이제 이스라엘이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과 결합할 길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만큼 또한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는 엄연한 계약입니다. 믿음에는 바로 이 약속을 신뢰하는 것도, 그 약속을 지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신부로서 교회된 우리가 과연 이 약속에 신실한지, 그리고 거룩한 신부로서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음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이후에 말씀이나 호세아서를 통해서 우리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희망을 보게됩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는 것은 더 심각한 죄악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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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절 우리의 영적 간음으로 더럽혀진 땅에 대한 수치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행음은 방방곳곳에서 행해집니다. 워낙 많이 찾아 다니며 밟고 다녀서 산이 헐벗어질 정도입니다. 창녀처럼 길가에서 몸을 팔듯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습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그쳤고, 하나님의 징게로도 비가 그쳤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한 수치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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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이 더럽혀진 것은 풍요제의의 성적 의식에 빠진 이스라엘의 죄악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의 혼합주의 신앙과 우상숭배는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자행 했습니다(2:20).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일부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임을 보여줍니다. 바알에게 풍요 제의를 기원한 성창은 모든 산들을 더럽혔습니다. 더욱 이들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우상울 숭배합니다. 몸을 파는 창녀처럼 정욕에 사로잡힌 자처럼 욕정을 만족시켜 줄 자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 행위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창녀가 저자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것처럼 공개적으로 길가에 앉아서 즐겼습니다. 그렇게 약속의 땅을 우상숭배로 철저하게 더럽힌 것입니다. ‘헐벗은 산’은 조롱과 풍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푸른나무로 덮여야 할 산이 우상숭배로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땅으로 황폐하게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상숭배를 쫓다가 모든 것을 잃고 헐벗은 신세가 된 이스라엘의 비참한 운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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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결과는 하나님의 징계로 가나안 땅에 비가 그치고 가뭄이 찾아 오게 됩니다. 풍요를 기대하며 우상을 숭배하였으나 결과는 반대로 열매 없는 재앙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또 비는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알은 농사의 신으로 남신 바알의  정액(비)이 땅의 여신과 성적으로 결합하여 결실을 맺게된다는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땅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비와 땅의 결실이 바알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 계시하시는데도 수치를 모르는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돌아가기를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자신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수치를 알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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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하는 땅과 공동체가 부정하게 되고 더럽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를 민감하게 깨닫고 합당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주권을 믿는다면 자연현상이나 일상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민감하게 깨달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사인에 둔하면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는 일도 무디어지고, 급기야는 수치를 모르는 상태로 감각이 무디어지고 맙니다. 말씀앞에 서는 일은 이러한 영적 감각을 날마다 연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조그마한 하나님의 사인에도 민감한 감각이 그것을 깨닫고 즉시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음행으로 더럽혀진 나와 가정과 공동체의 부정을 말씀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들과, 깨닫게 된 죄악에 대해 수치를 아는 일들과, 이러한 모든 일에서 속히 돌아서는 민감한 순종의 모습을 갖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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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절 말로 고백하는 신앙에서 삶으로 고백하는 신앙이어야 온전한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또한 청년 시절의 보호자(친구)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진노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풀어진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행하면서 욕심을 이뤄갔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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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드물게 나옵니다. 바알과 풍요제의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어비지와 보호자(친구)로 친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요 친구이신 여호와께 어떤 잘못을 범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배반했다고 고발하시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계약도 파기되었는데 이스라엘은 계약관계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급기야 이스라엘의 배반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주셔야 하는 아버지로, 처음 사랑에 매여서 맹목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어 주셔야 하는 보호자(친구)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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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아버지와 보호자로 믿어버리면서 하나님의 진노 또한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일시적 현상이고 시간이 지나면 풀어지는 분노였기에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들을 돌아보지도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으로만 이해하고 믿고, 진노하고 심판하시는 분으로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부탁만 하면 용서해주시는 분이라고 믿기에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아무때라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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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삶의 내용과 신앙의 색깔을 완전히 다르게 갖게 합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심각한 우상숭배와 위선의 죄악에 빠진 것인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바알과의 음행에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심지어 회개마저도 입술로만 하지 진실한 회개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통과 교리로만 알고 있을 뿐 실제 삶의 내용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악용하고 이기적으로 적용하고 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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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도 힘써야 하고,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되도록 힘써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앎도 문제이지만, 알고 있는 바를 잘못 적용하고 오용하고 남용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모르고 지은죄도 문제이지만 알고 교묘하게 범죄하는 일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고, 그에 다라 자신들의 신앙을 합리화하면서 한편으로는 음행하면서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알량한 지식과, 얕은 신학과, 무게없는 믿음과, 경망스러운 말씀의 오용과 남용의 사례들과, 아전인수격의 해석과 적용, 그리고 여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일탈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우리의 공동체는 안팎으로 비난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 결국 성경을 바로 알아가는 일이 이러한 문제와 위기에서 우리가 지금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행동양식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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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이스라엘의 창녀짓) _ 묵상 도움글

1-5절은 ‘음란’의 모티브에 의해 2장 다음에 놓여집니다.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할까?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받아주실까? 1-5절은 두 가지 근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재출발이 불가능함을 주장합니다. 먼저 법적인 측면에서 본남편을 떠난 이스라엘과의 재결합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놀아난 이스라엘을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명기 24:1-4에 규정된 금지된 재혼규정에 위반됩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돌아옴에는 진실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과오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단호한 결단이 없이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직면했는가? 적어도 법적으로는 이미 남남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태도도 절망적이기에 완전한 결별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신학’에 근거해서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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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전반절은 신명기 24:1-4의 금지된 재혼규정을 그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신명기 규정에 의하면 재혼했다가 혼자가 된 여자를 처음 남편이 다시 아내로 맞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처음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간 행위와 같기에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재결합은 원칙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거듭 정부들과 놀아나며 몸을 더럽힌 이스라엘이 어쩌다 본남편에게 다시 돌아온다 해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1절 또는 1-5절에 근거한다면, 적어도 법률적인 측면에서는, 이스라엘의 회개나 재출발의 가능성은 ‘이미 상실해버린 가능성’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관계는 회복 불능으로 완전히 끝장이 난 것일까? 본문은 법적으로는 다른 길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3장은 하나님의 은총만이 법적 한계와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길임을 보여줍니다.]

공식적으로 야훼와 이혼하지 않았음에도(→ 4-5절) 수많은 정부들과 창녀짓(‘많은 무리와 행음’)을 즐기는 이스라엘의 더러움은 [합법적으로] 이혼 후에 재혼한 여자에 비교할 정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창녀입니다. 그의 창녀짓으로 야훼의 기업에 속하는 가나안 땅이 완전히 더럽혀졌습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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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1절에 언급된 ‘땅의 더러움’의 주제를 받아 가나안 땅이 어떻게 더럽혀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진술합니다. 하나님께서 풍요제의의 성적 의식에 빠진 이스라엘을 고발하십니다. 산당과 푸른 나무 아래서 이스라엘은 바알에게 풍요를 기원하며 성적 의식을 즐겼습니다. 우상숭배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 타락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바알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성적 제의로 모든 산들(언덕들)이 더럽혀졌습니다. 우상숭배는 그 만연(蔓延)함뿐만 아니라 그 심각성에 있어서도 정도를 완전히 지나쳤습니다. 이스라엘은 자발적이며 적극적으로 우상을 숭배합니다. 사막의 베두인 사람(아라바 사람)이 대상(隊商)을 약탈하기 위해 숨어 기다리는 것처럼, ‘발정 난 암나귀’(→ 2:24)처럼 정욕에 휩싸여 분별력을 상실한 이스라엘은 욕정을 만족시켜 줄 자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부끄러움을 상실한 창녀가 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것처럼(cf. 창 38:14) 이스라엘은 공개적으로(‘길 가에 앉아’) 창녀짓을 즐겼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땅을 우상숭배로 철저하게 더럽혔습니다.

‘헐벗은 산’에는 조롱과 풍자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풍요와 번성을 바라며 바알에게 제사를 드렸던 푸른 나무들이 자라는 언덕이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벌거벗은 언덕이 되었습니다. 산당의 풍요제의가 산당이 있는 작은 산들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풍요를 바라고 우상을 쫓다가 모든 것을 잃고 헐벗은 신세가 된 이스라엘의 비참한 운명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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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전반절은 우상숭배의 결과를 이중적 관점에서 기술합니다(cf. 사 5:6).
1) 가나안 땅을 휩쓴 가뭄과 흉작은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가나안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빗물에 의존하여 농사를 지었기에 때에 따라 내리는 비는 생존에 절대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징계하시려 야훼께서 땅에 비를 금하셨기에 거둬들일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땅의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며 우상을 숭배하였지만 결과는 그 반대로 재앙뿐이었습니다.
2) 비를 내리게 하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가나안의 풍요제의에서 비는 바알의 정액으로 간주되었다. 남신 바알이 비를 통해 여신 땅과 성적으로 결합하여 결실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비와 땅의 결실이 당신의 축복에 속함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가나안 땅의 우기는 10월에 시작하여 늦어도 5월에는 끝납니다. 비는 12월과 1월과 2월에 집중적으로 내립니다. ‘이른 비’는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내리는 가을 비를 가리킵니다. 3월과 4월에 ‘늦은 비’가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금하며 우상숭배를 징계하시지만 수치(부끄러움)를 모르는 이스라엘은 야훼께 돌아가길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창녀의 낮(이마)’은 창녀임을 보여주는 장식품보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징계를 받아도 창녀짓을 마다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에 전혀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들은 우상숭배에 빠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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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4-5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바알의 풍요제의에 빠졌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친구)’로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범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배반했다고 이들을 고발하시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계약은 완전히 파기되었지만, 이스라엘은 계약관계가 여전히 유효하다가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시절의 신실함을 이미 상실하였음에도 하나님이 처음 좋았던 시절처럼(→ 2:2) 자신들의 보호자(친구)로 남아있으리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주셔야만 하는 아버지로, 처음 사랑에 매여서 맹목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어주셔야 하는 보호자(친구)로 간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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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이 생명을 잃고 교리(敎理)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아버지와 보호자(친구)’로 믿어버리는 이스라엘에게 그분의 진노 또한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면 풀어지는 분노였기에 자신의 길을 심각하게 되돌아볼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분이지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구원자로만 이해하였던 이스라엘은 자신의 잘못을 피상적으로 인정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이자 보호자(친구)인 하나님은 부탁만하면 언제나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기에 진정한 뉘우침은 차라리 사치에 속했습니다. 설혹 잘못했을지라도, 바알에게 예배를 드렸다 할지라도, 다시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받아주시는 분이었습니다(→ 2:27). 잘못된 하나님 이해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은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우상숭배 또는 위선)에 빠져있는지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바알종교에 빠져 음란을 범하면서도 바알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고 변명합니다(2:23). 이스라엘의 회개는 진정성이 전혀 결여된 입술의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조상들의 전통과 교리로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버리기에는 아까운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를 악용합니다. 긍휼과 노를 품지 아니함에 대해서, 이기심을 가지고 악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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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1절 역사를 타산지석, 반면교사로 삼고 동일한 전철을 밟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요시야 왕 때에 다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행음에도 돌아오기를 바랬지만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마침내 멸망했는데, 그것을 보고도 유다는 두려워하지 않고 동일하게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고, 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 오지도 않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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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회복을 위해 열심이었던 요시야왕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의 많은 이들이 온전히 여호와께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행한 이들이 많았슴을 알 수 있습니다(10절). 여호와를 배역한(하나님께로 돌아서버린)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길 바랬으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 모든 일들을 유다는 고스란히 보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은 722년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이혼서). 지금 예레미야가 활동한 시기는 그로부터 100여년이나 지난 시기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멸망에도 유다는 두려워하지 않고 행음을 가벼이 여기며 북이스라엘과 동일한 전철을 밟아 약속의 땅을 더렵혔습니다. 그런 시간들의 이미 오래 된 상태에서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일들에 대하여서도 진심이 아니라 거짓으로 할 뿐이라고 이미 여호와께서는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우상숭배를 하다가 멸망한 북이스라엘이 그런 파국적인 운명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동일한 길을 간 유다보다 상대적으로 낫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11절). 북이스라엘이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뻔히 역사를 보고도 배우지 않는 유다가 상대적으로 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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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 그리고 수많은 악인들의 말로를 역사적으로 보고, 우리에게 증언하는 말씀과 허다한 증인들을 보고도 우리가 배우고 돌이켜서 온전히 의의 길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필경 망하는 길입니다. 참으로 복과 지혜가 있는 자들은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우리의 삶의 내용과 방향을 주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배역과 반역(불출)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충실함으로 채워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고도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고 거짓으로 채워진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오늘 듣게 하신 주의 말씀의 교훈들을 새기고 결단하는 일을 더이상 미루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약하오니 진실한 마음으로 돌이켜 주께로 행하는 믿음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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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11(이스라엘의 역사로부터 배우기를 거절한 유다)-고발 _ 묵상 도움글

유다 왕 요시야(주전 640/39-609)가 통치할 때(6절)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준 독백적인 말씀인 6-11절은 ‘음란과 이혼’이라는 주제에 의해서 앞 단락에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에 의해서 주전 722년에 멸망 당한 북 왕국의 파국적 운명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 유다를 고발하십니다(cf. 겔 23장). 이스라엘은 풍요제의에 빠져 높은 산에 올라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바알과 음란을 즐겼습니다(6절). 우상을 숭배하며 풍요제의에 빠졌던 이스라엘이 언젠가는 잘못을 깨닫고 당신을 찾으리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기대는 결국 수포로 돌아갔습니다(7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다림을 무시하고 온갖 간음을 저지르며 돌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이혼서(이혼장)을 들려주고 내보내셨습니다(8a절). ‘이혼서’는 앗수르에 의한 북 왕국의 멸망(722년)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배반과 멸망의 과정을 자세히 지켜보았던 유다(7b절)는 누이 이스라엘의 비참한 운명으로부터 어떤 가르침도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처럼 창녀짓을 즐겼습니다(8b절). 유다 역시 북 왕국처럼 가나안의 풍요제의에 빠져 ‘돌과 나무’를 만들어 세우고 이것들과 더불어 간음하며 땅을 더럽혔습니다(9절).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유다는 자신의 불성실과 거짓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겉으로만 찾을 뿐이었습니다(10절). 유다는 자신이 범한 죄악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우상을 숭배하다 멸망에 떨어진 북 왕국 이스라엘이 누이의 파국적 운명을 보고도 두려워함이 없이 동일한 길을 간 유다 보다 낫습니다(11절).

722년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건을 보고도 아무런 교훈을 찾지 못했다고 고발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차라리 이스라엘은 유다에 비해서 차라리 더 의롭다 합니다(진짜가 아니라, 유다의 악함을 고발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과 교회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로부터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역사를 배우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드러나게 됩니다. 역사는 반면교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일반역사도, 교회사도 배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더 나아가 기독교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의 폐허가 된 사건들, 하나님의 의지를 벗어나서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있는데 우리는 배우질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과 예루살렘을 치셨기에 오늘 교회도 얼마든지 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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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3절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자복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북으로 가서 선포하라 하십니다. 배역한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더이상 노를 품지 않고 긍휼을 베푸시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죄를 자복하라는 것입니다. 그 죄는 여호와를 배반하고 제길로 간 죄, 이방인들에게 가서 우상을 숭배한 죄,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한 죄를 언급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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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르에 멸망해 버린지 이미 100여년이 지났으나 여호와께서는 북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 ‘북을 향하여’가 의미하는 것은 북이스라엘과 앗수르(메소포타미아)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을 말하고, 배역한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향한 긍휼을 여전히 품고 계십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돌이킨다면 더이상 노를 품지도 않으시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돌이켜야 할 죄는 우선 여호와께로부터 돌아서서 각기 제길로 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따라 각기 제(악인의 길) 길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에게로 가서,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여기며 종노릇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환난날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헛된 신을 따라 간 것입니다. 그래서 저악 들어야 할 여호와의 목소리 곧 생수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의 인도를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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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긍휼은 지금도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고, 주님 아닌 것을 주님처럼 섬기면서 살고 있는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거나 우상과 더불어 섬기는 혼합주의적인 신앙에서도 돌이켜야 합니다.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들어야 할 여호와의 목소리 청종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더 즐거워하고 있는 삶의 모습에서 또한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이 간절한 호소에도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여서 여호와의 긍휼하심과 오래참으심을 외면하는 패역하고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죄인된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긍휼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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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2-13(이스라엘[북왕국]의 회개와 구원가능성) _ 묵상 도움글

앗수르에 멸망 당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구원을 선포하는 12-13절은 11절에 의해서 현재의 위치에 놓여집니다. 앞 단락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마찬가지로 우상을 숭배하며 배교했다고 고발하면서(6-10절), 그래도 이스라엘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끌어내지 못하는 유다 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말합니다(11절). 이에 상응하여 이스라엘의 회개 가능성이 먼저 언급됩니다. 긍휼이 넘치시는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진노하지 않으십니다(12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주실 준비가 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을 숭배한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13절). 이스라엘은 멸망의 원인이 자신의 잘못에 있었음을 깨닫고 도와주시려는 그분의 손길을 잡기만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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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8절 우리의 진정한 주인은 여호와 이시며, 마침내 주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돌이여 선한 일을 하는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호소합니다. 여호와께서 남편(바알; 주인, 임자)으로서 너희 중에서 택하여 데려오리라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세워서 지식과 명철로 양육하리라 하십니다. 그 때에 다시금 약속의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지게 되면 더이상 언약궤가 필요없는 관계로 회복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때에는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서 더이상 악한 마음과 완악한 대로 행하지 않을 것이라 하십니다. 마침내 유다와 이스라엘 족속이 동행하여 귀환하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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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지금 예레미야가 활동하고 있는 남유다는 결국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고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이 전제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대언하라신 메시지를 40년동안이나 전했음에도 결국 유다가 돌아오지 아니하고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고통을 안고 이 말씀들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긍휼은 배역한 자식들(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하여 돌아오라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당신이 참된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이 남편(바알)은 임자와 주인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바알우상과 같은 단어입니다(동사:지배하다, 소유하다, 주인이 되다; 보통명사:주인, 소유주, 남편; 고유명사:가나안의 신 바알). 그래서 바알신이 아닌 여호와께서 진짜 남편이요 주인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돌아와야 할 모습은 가증한 것을 버리고, 두려워 말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맹세하는 삶입니다(이후에 계속 다뤄지는 내용입니다.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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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없기에 냠편되시는 여호와께서 직접 택하여 데려오겠다고 하십니다. ‘성읍중 하나와 족속 중 둘’은 소수의 사람이나 일부의 사람만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택하여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새롭게 세워질 백성들은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지도자, 왕들)을 통해서 지식과 명철 곧 여호와를 바르게 알고(지식), 말씀에 순종하는 명철에 의존하여 여호롸를 온전히 믿을 수 있도록하고 푸른풀밭으로 인도해 배불리 먹이고 안전하게 보호할 것(양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일차적으로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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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택함을 받아 시온으로 돌아오지만 이들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목자들을 통해 번성하고 수가 많아질 것(번성)입니다. 이들에게는 이전에 성전에 있던 언약궤가 필요 없게 될 것을 강조합니다(다섯가지 부정 동사(말하지않고, 생각지않고, 기억지않고, 찾지않고, 만들지 않음)를 통해서 강조합니다). 이제 여호와의 법을 사람들의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렘31:33). 실제로 언약궤는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질 때에 함께 소실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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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호와의 임재는 언약궤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확대됩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이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회복의 대열에 이방 민족들도 동참하게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새롭게 양육된 백성들은 이전의 배역하고 반역한 악한 마음과 완악함으로 행동한 이스라엘처럼 살지 아니하고 선한 일에 열심인 백성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다시한번 포로로 북(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앗수르, 바벨론) 으로부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동행하여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리라 약속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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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백성됨은 주님의 택하심과 양육하심의 은혜과 공로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순종했고, 다른 신을 섬기고, 여호와 목소리 청종에 게을렀으며, 주님을 찾지도 않고 각기 제길로 가는 자로서 아무런 희망도 없는 가증한 것들의 종노릇으로 살아가던 이들이었지만 그런 우리를 주님이 택하셔서 지금 거룩한 백성 되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내주하시는 임마누엘 주님과 함께하게 하시고, 우리를 지식과 명철로 양육하여서 번성케하시고, 날마다 주님과 소통하고 주의 인도를 따라서  악한 마음과 완악함으로 살지 않고 온유와 겸손 그리고 사랑으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우리의 심비에 새겨진 말씀, 진리와 계시의 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 유일한 중보자 되시며 임마누엘하시는 주님과 함께 오늘 이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통치)를 (배역과 반역 곧 돌아섬과 불충실이 아니라)순종하며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새사람, 새백성, 새이스라엘, 새인류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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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4-18(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_ 묵상 도움글

미래에 있을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개와 구원을 다루고 있는 14-18절은 내용에 따라 14-15절, 16-17절, 그리고 18절의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14-15절에서 야훼께서는 당신이 여전히 ‘배역한 자식들’의 남편임을 주장하시며 일부 남은 자들에 의한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십니다. 회복된 공동체는 과거처럼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목자(왕)들에 의해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야훼께서 당신 마음에 드는 목자를 세워 ‘지식과 명철’로 양들을 돌보게 하십니다. 16-17절은 야훼의 현존과 그분 왕권의 확대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가 불필요해집니다. 그분의 통치권이 누구나 볼 수 있는 넓은 공간으로 나옵니다. 예루살렘 전체가 야훼의 보좌가 되어 모든 민족들이 그분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올라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구원에 이방민족들도 함께 참여하여 야훼의 통치를 맛보게 됩니다. 18절은 다시 시선을 좁혀 유다와 이스라엘의 밝은 미래를 내다봅니다. 분열되었다가 각자 유배의 쓰라린 운명을 맛본 유다와 이스라엘이 함께 상속재산으로 준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유다와 이스라엘이 화해하고 한 하나님 백성으로 통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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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 유다 사람들도 미래의 구원에 초대를 받습니다. 유다가 야훼께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분이 유다의 남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 간 아내 유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결혼(계약)이 파국적 위기에 처했지만 남편은 아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야훼의 긍휼’이 북 왕국에 속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준 것처럼, ‘야훼께서 남편/주인 되심’이 유다에게 새로이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야훼께서는 당신 아내 유다가 돌아오기를 그냥 기다리지 않으시거, 관계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십니다. 도처에서 사람들을 직접 뽑아서 시온으로 데려오실 것입니다.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합니다. 이방나라로 유배당한 자들 가운데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말하는가? 또는 유다의 성읍들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 야훼께 신실한 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형성될 것을 내다보는가? 또는 단순히 회복을 약속하는 말인가? 행위의 주체(야훼)와 목적지(시온)와 선택(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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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 유다의 돌아옴에 야훼께서 의로운 통치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은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이상적인 왕을 가리키기보다는 왕정시대의 불의한 목자들에 대한 대칭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cf. 23:1-4). 불의와 불법을 자행하며 폭력으로 백성을 다스렸던 이전의 왕들과 달리 미래의 구원공동체를 위해 야훼께서 세우실 목자들은 ‘지식과 명철’로 백성을 돌볼 것입니다. 야훼를 아는 지식과 말씀에 순종하는 명철에 의존하여 양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배불리 먹이고 안전하게 보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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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 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이 야훼의 택함을 받아 시온으로 돌아오지만, 이들은 야훼께서 세운 목자들의 통치 아래 번성하여 그 수가 많이 불어날 것입니다. 심판으로 많은 주민들을 잃고 초라해진 유다가 다시 큰 민족으로 재건될 것입니다(cf. 창 1:28; 9:1, 7). 이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된 ‘야훼의 언약궤’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미래에 회복될 시온공동체에서는 언약궤가 불필요해질 것을 부정문을 다섯 번이나 사용하면서 최상급으로 강조합니다. 언약궤와의 완전한 단절을 말합니다. 어떤 연유에서 이스라엘의 고대전통에 속하는 언약궤가 필요 없게 될 것을 이처럼 강조하여 말했을까? 야훼께서 당신의 법을 사람들의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기에(렘 31:33) 십계명을 담고 있는 상자로서의 언약궤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일까? 또는 지성소에 하나님을 가둬두려는 성전신학에 대한 비판일까? 언약궤는 아마도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왕궁과 성전이 화염에 휩싸일 때 함께 소실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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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 언약궤가 상징하였던 야훼의 임재가(cf. 민 10:35-36; 삼상 4:1이하; 삼하 7:2, 6) 예루살렘으로 확대됩니다. 예루살렘이 ‘야훼의 보좌’가 되고,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야훼의 이름을 위해 그리로 모일 것입니다. 야훼께서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왕권을 행사하시고, 민족들이 그분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올 것입니다. 야훼의 구원이 보편적 차원으로 확대됩니다. 미래에 있을 유다 공동체의 회복에 이방민족들도 동참하게 됩니다. 야훼를 왕으로 인정하기에 이방민족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함’은 예레미야서에서 이곳을 제외하고는 독점적으로 이스라엘/유다의 악한 태도를 기술하는데 사용됩니다(cf. 7:24; 9:13; 11:8; 13:10; 16:12; 18:12; 23:17; cf. 신 29:18; 시 81:13). 이스라엘과 이방민족들이 그 악함에 있어 별다른 차이가 없었음을 암시해줍니다. 마지막 때에 유다가 회개하고 야훼께 돌아오는 것처럼 이방민족들도 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야훼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입니다(cf. 사 2:2-4; 미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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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 솔로몬의 통치 이후 분열되어 반목을 거듭하다 멸망 당했던 남북왕조가 미래의 회복에 함께 참여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모두 올라왔던 것처럼 유다의 유배민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유배민들도 야훼께서 상속재산으로 준 가나안 땅으로 함께 귀환할 것입니다. ‘북에서부터 나와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유배민들이 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정착했음을 전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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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를 거룩한 신부된 교회로 택하시고 

사랑과 은혜 속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친구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 거룩한 신부로 

온전히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행음에도 큰 용서로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성령을 근심케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게 지켜 주옵소서

우리 삶의 자리에 자행되는 죄악을

말씀의 거울앞에 속히 발견하게 하시고

지금도 미혹되는 음행에 관하여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주옵소서. 

수치를 아는 신앙 갖게 하옵소서. 

나의 아버지요 친구로 허락해 주신 주의 은혜 앞에

믿음의 오용과 남용을 막고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사이에서

하나님이 선을 오용하고 악행하지 않도록

또한 탐욕의 종이 되지 않도록

무릇 마음을 더욱 지켜 주옵소서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사랑하고 신앙하는

믿음 갖게 하옵소서. 

노를 한없이 품지 않으시고 

긍휼에 풍성하시고 우리를 택하시고 양육하시며

소망가운데 살게 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

역사와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깨닫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행음을 가벼이여기며 두려워하지 않은 죄도 또한 용서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여호와께로 돌이켜 충성되게 하옵시며

주님을 배반하고 각기 제길로 간데서 돌이키고

주님 아닌 것들을 섬겼던 것을 다 버리고

날마다 주의 음성 청종하기를 즐겨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택하여 주심을 감사하오며

지식과 명철로 양육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과 순종케 하심을 따라

악한 마음과 완악한 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부드러운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날마다 주의 통치와 인도에 순종하여

거룩한 백성의 길로 온전히 행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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