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02:29-37 여호와를 잊고 약자를 돌보지 않은 죄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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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2:29-37 여호와를 잊고 약자를 돌보지 않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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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완고한 부분을 고발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재앙이 왔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깨우기 위해 보낸 징계와 선지자를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 합니다. 심지어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오히려 죽음과 저주의 하나님처럼 간주합니다. 가나안의 풍요속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될 하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고 망각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우상숭배가 도덕적 해이로 이어지는데도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를 왜곡하고 급기야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면서도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하기 위해 기회주의적 대외 정책을 펼쳐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그들이 의지하는 것들을 통해 수치를 당하고 형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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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0 혼합주의 신앙에 대한 무지는 징계와 선지자의 외침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선지자를 위협하기까지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범죄하고도 대항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징계가 무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깨우는 선지자마저 죽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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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여호와를 바알처럼 섬겼고 그것이 혼합주의 신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잘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계약을 위반했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대항합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잘못을 오히려 하나님께 떠넘기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다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들의 문제를 깨닫게 하고 돌이키기 위해서 내린 하나님의 징계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서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이후에 남은 것은 유기와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징계에 대해서도 수용하지 않는 이들이 더 패역하게도 자신들을 깨우기 위해서 보낸 선지자마저 위협하고 예언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생명을 위협하고 급기야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을 폭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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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의 왜곡이 심해지면 더이상 귀를 닫고서 오히려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대항 합니다. 특별히 이단들의 모습을 보면 가이 이러한 모습이 극명한데, 문제는 정통 교회에 있다고 하면서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징계도 선지자들의 가르침에도 자신들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징계와 가르침들을 공격하기까지 합니다. 자정능력의 상실이요, 개선과 개혁의 여지가 없는 상태로 치닫는 현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가르침에 대해 귀를 닫는다면 결국 우리도 하나님의 유기와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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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9-37(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 / 29-30절 _ 묵상도움글

29절 하나님께서 다시금 법정 용어를 사용하시며 이스라엘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소송을 제기하셨던 것처럼(→ 2:9)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법적으로 따졌음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내용을 갖고 하나님께 소송을 제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계약 관계의 위반과 관련되었음을 문맥으로부터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약을 위반한 당사자는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바알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섬겼음에도(→ 23절, 35절) 약속하신 축복대신에 재앙이 주어졌다고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혼합주의에 빠져있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책임을 전가하려는 이스라엘의 태도를 ‘잘못’(반역, 불순종)으로 정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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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절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그 배경으로 갖는 진술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역사의 개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단순히 심판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려는 견책이었음을 보여줍니다(cf. 암 4:6-11).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거듭 징계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회개를 거절하고 그분의 징계에 이의를 제기할 뿐이었습니다(→ 29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치시는 의도와 이유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불순종의 파국적 결과를 막기 위해 예언자들을 보내 경고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이들의 선포를 무시할 뿐만 하니라 이들을 죽여버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수고는 전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잔인하게 죽여버리듯이 이스라엘의 굶주린 칼(폭력)이 예언자들의 피로 배를 채웠습니다. 이스라엘은 심판을 선포하는 야훼의 참된 예언자들보다는 평화가 없음에도 평화를 선포하는 거짓 예언자들(8:11; → 2:8)의 듣기 좋은 소리를 청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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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32절 이스라엘은 풍족한 약속의 땅에서 정작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고 망각해 버렸습니다. 

이 세대를 향하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향하여 오해하고 다시 주께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선언하는데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베푸신 은혜와 긍휼은 처녀가 패물을, 신부가 예복을 잊을 수 없듯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날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결국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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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예레미야의 예언은 기원전 627년부터 587년으로 약 40여년의 기간동안 진행됩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 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예레미야가 선포한 그 말씀은 오늘 대한민국에 있는 우리에게도 너무도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메시지입니다. 당대 남유다의 상황과 오늘 대한민국의 정치, 외교적 상황이 너무도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더욱 그 안에 있는 교회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점에 이 쉐마는 지금 우리가 깊이 새겨 들어야 우리도 남유다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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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과 구덩이의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곳으로 다니지 않고 살 수 없는 그 광야에서 생명과 축복의 하나님은 그 땅에서 안전하게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은혜를 이스라엘은 망각해 버리고, 하나님이 광야를 캄캄한 땅이 되게 한 것처럼 하나님은 죽음과 저주의 하나님으로 간주해 버리면서 은혜를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풍요가 광야의 하나님을 망각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나안에서 정치적 자유와 번영을 허락해 주신 여호와를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정치적 안전과 양식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더이상 하나님을 불필요하다고 등지고 자신들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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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에 대한 망각은 결국 배은이며 패역이며,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은 오늘의 정체성과 삶의 내용과 방향을 달라지게 합니다. 지금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외침을 귀 기울여 듣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날마다 말씀의 거울앞에 비춰서 빚어주신 손길들을 확인하고, 지금도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고백하면서 이후로도 주님의 손에 우리의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믿으며 날마다 그 은혜를 기억하는 자리에서 묵상하며 나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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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32절 묵상 도움글

31절 다시금 수사적 질문을 활용해 이스라엘의 이해할 수 없는 완고한 태도를 탄식합니다. 이때 수사적 질문은 2:6에 대조적으로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2:6)을 안전하게 이끌어주셨던 하나님이 인간의 실존에 적대적인 광야나 흑암인 것처럼 그분께 등을 돌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생명과 축복의 하나님(2:13[생수의 근원])을 죽음과 저주의 하나님처럼 간주합니다. 하나님께 의존하여 메마른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는 그분의 도움과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지만 도시문화의 질서와 농경사회의 풍요를 즐길 수 있는 가나안 땅에서는 그분의 존재가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삶에 적대적인 광야와 달리 문명화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고 야훼로부터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허락해주셨던 분을 버리고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정치적 안전과 양식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스라엘이 잘 몰라서 하나님을 등진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더 이상 하나님이 불필요하고, 등지고 자신의 길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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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절 결혼을 앞둔 젊은 여자(문맥상 처녀 보다는 젊은 여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가 결혼선물로 받은 패물을 잊을 수 있겠는가? 결혼한 새색시가 혼례식 때 입었던 신부복의 화려한 장식 띠를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에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광야의 짧은 신혼기간(→ 2:2)을 보낸 후에 신부 이스라엘은 신랑 야훼를 버리고 다른 애인들을 찾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족함과 자신감이 하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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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5절 하나님의 정의를 왜곡하면 부도덕함과 심지어 살인마저도 죄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음란함은 이제 악한 여자들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탐욕이 점철된 우상숭배의 결과는 결국 도덕적 해이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덤덤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고도 자신들은 무죄하고 지금 하나님의 침묵이 오히려 자신들의 무죄의 증거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결국 심판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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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우상숭배는 이제 기존의 우상숭배자들과 정치적인 주변 열강들에게 가르칠 정도로 그 음란함이 심각해 졌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은 이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상숭배자들이나 이방 나라들과 이스라엘에 대한 변별력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나라의 법을 따라서 구별된 자들로 택하였고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해서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시고 여호와를 섬기면서 여호와의 법을 따르는 이들로 세우셨건만 이제는 그러한 것들을 다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나라들과 다를 바 없는 말과 병거를 의지하고 폭력과 기만과 술수로 살아가려는 모습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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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숭배는 탐욕의 산물입니다. 제의적으로 아무리 완벽하게 여호와를 예배한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나타나는 도덕적 열매는 공평과 정의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매가 없다면 아무리 제의적으로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온전한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결국 당대 혼합주의 신앙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탐욕으로 점철된 신앙은 결국 외형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지만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바알 또 탐욕을 채우는 물질이 주인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 나누지 않고 가난한 자(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노인)를 돌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힘없는 이들을 착취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아 부해지면 그것을 하나님의 응답이나 축복으로 고백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형식적일 뿐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데는 이르지 못한 껍데기 경건으로서 공평과 정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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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자신들의 패역한 삶의 내용에 대하여서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하나님의 진노가 피부로 와 닿지 않고 있다고 오히려 자신들의 무죄가 증명되는 것이라고하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된것이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정의에 대한 심각한 왜곡과 오해로 가득차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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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하나님의 정의를 왜곡한 신앙이 교회안에 가득합니다. 혼합주의 신앙을 갖고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진리에 대해 무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우상숭배하듯 말씀과 하나님을 믿으니, 탐욕스런 권력자와 부한 자들의 선동에 부화뇌동하여 소외된 자들을 억압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일에도 생각없이 동조하고 있는 모습이 허다합니다. 카톡교(카톡으로 온 소식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제대로 분별하거나 검증하지도 않고 온갖 유언비어를 퍼나르는 기독교인들을 폄하하는 표현)로 퍼나르는 폭력적 행동들은 이제 쓰레기처럼 돌아다니면서 무지한 성도들이 휩쓸려 자기도 모르는사이에 말씀을 거역하는 심각한 행동을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믿음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성도의 모습과 진리가 무엇인지 다시금 말씀 앞에서 심각하고 겸손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알고 믿고 따르고 행하는 것이 진리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혼합주의적인 왜곡된 신앙과 전통에 기인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 신앙의 근간이 너무도 허술한 터 위에 세워진 무속적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고, 너무도 무지하고 어리석은 신앙과 신학적 기반위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얕은 신앙으로 조그만 바람에도 출렁거리는 얇팍한 신앙을 자각하고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니 소망을 가지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우리가 진정 가야할 진리와 정의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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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5절 묵상 도움글

33절 이스라엘은 의도적으로 음란에 몸을 맡겨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됩니다. 야훼께서 아무리 막아도 이스라엘은 애인을 찾아 갑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창녀들을 가르칠 정도로 남자를 유혹하는데 도가 튼 창녀가 되었습니다. 33절에서 이스라엘의 음란은 일반적으로 종교적 우상숭배를 가리키지만 36-37절과 관련시키면 정치적 우상숭배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바알, 앗수르, 애굽도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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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절 종교적 우상숭배의 필연적 결과로 도덕적 불법이 자행됩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무시하는 사회는 더 이상 ‘죄 없는 가난한 자들’의 고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웃은 탐욕의 대상일 뿐으로, 이들의 권리는 전혀 존중되지 않습니다. 사적인 이익을 위해 거리낌없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착취합니다. 이들은 죄가 없음에도 마치 도둑질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자들처럼 피흘림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더 이상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약자들의 부당하게 흘린 피가 그 원통함을 울부짖는 사회입니다. 힘과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cf. 호 4:1-3; 미 3:2-3).

마지막 구절(‘이 모든 것들 때문에’)은 문법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전혀 불분명합니다. 구문상 어려움이 있지만 때로는 내용에 일치시켜 ‘아무 때나 그들을 잡는다’로, 때로는 35절에 연결시켜 ‘이러한 짓들에도 불구하고’ 등으로 번역합니다.

이스라엘은 가진자에 의해 가난한 자들이 희생을 당합니다. 마치 남의 집을 몰래 도둑질 하다 들켜 맞아 죽는 것처럼 가진자는 자신의 부와 권력으로 가난한 자를 유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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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절 이스라엘은 자신의 악행을 시인하기보다는 무죄를 주장합니다(→ 23a절). 종교적 간음(우상숭배)과 그로 인한 도덕적 부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야훼의 분노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주장합니다. 잘못이 없기에 징계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고발하신 분이 직접(‘보라’)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나는 죄가 없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은 이들이 바알제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시사해줍니다(→ 27-28절). 이스라엘은 야훼 제의 안에서 바알제의의 수용이 가능하다고 보았기에 자신들을 우상숭배자들로 정죄하는 예언자의 고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신들을 곁에 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야훼께 이스라엘의 시도는 배교적인 혼합주의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정의 : 죄를 범한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죄 : 하나님의 진노를 초월하는 그 무엇입니다. 죄를 범했는데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지 않았기에 무죄를 주장합니다. 내가 흉악한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정의 따라 진노가 내 위에 임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죄인으로 정죄하지 않고 있다는 논리로 들어갑니다.

오늘날도 이런 논리로 들어갑니다. 축복받았다?=예수잘믿었다, 교회가 커졌다?=기도많이 하고 성령이 역사한다고 연결시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성질 급하시지 않습니다.. 죄인의 입장에서는 멀쩡하지만 하나님은 심각하게 생각지 않으신다? 자신들의 기만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변명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더 죄를 범하고, 당당하게 범합니다. 진짜 죄인이면 벼락맞아야 하는데 안맞고 지켜줍니다. 그러니 내 죄가 하나님 앞에 범죄 아니라고 하나님의 정의를 왜곡시켜서 자신의 죄를 주장하는 근거로 삼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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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37절 이스라엘의 정치적 간음과 우상숭배는 결국 그들이 의존하는 것을 통해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도 간음(기회주의적인 대외정책)을 합니다. 그래서 길을 바꿔서 돌아다니며 앗수르로 애굽으로 외교적 도움을 구걸하러 갑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나라도 그리고 이스라엘도 모두 여호와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형통은 결코 여호와 외에 다른 나라와 함께하는 길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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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통치를 따라 가는 길로 행해야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길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앗수르, 애굽) 사이를 오가면서 줄타기 외교를 통해서 살아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 나라가 이스라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도 계약에 불성실 했다면 이들과의 계약에 있어서도 불성실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다면 강대국은 더더욱 그들의 계약을 제대로 이행할리 만무합니다. 결국 어느 길로 가든지 이스라엘은 이들을 통해서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앗수르도 결국 망하고, 애굽도 신흥 바벨론의 횡포에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들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고 특히 이런 나라들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형통은 결코 이런 나라들의 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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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람과 돈의 힘이 더 우리를 형통하게 하고 행복과 노후를 보장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도 돈도 결코 우리의 안녕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사람도 변하고 돈도 헛되다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일반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추구하고 신봉하는 가치관에서 전환하여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진리로 믿고 신앙하는 성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혼합주의 신앙을 가지고 겸하여 섬기려하고, 예배당에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세상에서는 다른 것들의 종노릇하거나 씨종이 된다면 우리도 결국 우리가 의지하던 것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용기있는 그 믿음을 다시금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계산해도 세상의 방식이 훨씬 현실적인 것 같지만, 가장 현실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실을 잘 아는 지혜로우는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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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37절 묵상 도움글

36절 36-37절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간음(기회주의적 대외정책)을 고발합니다. 야훼 대신에 주변의 정치적-군사적 강대국에 의존하여 생존을 도모하려는 시도는 이스라엘과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야훼의 역사 의지를 무시하는 행태로 정치적 형태의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에 있어 불성실했던 이스라엘은 마찬가지로 이방나라들과의 조약에 있어서도 신실함이 없었습니다. [국가간의 조약들은 신들의 이름으로 체결되며 증인의 역할을 담당하는 신들에 의해서 그 준수가 감독됩니다. 이스라엘이 배반하는 경우에는 이스라엘의 국가신인 야훼가 상응하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지조 없는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애굽과 앗수르/바벨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의존하던 강대국에 의해서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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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절 이스라엘은 거듭 애굽에 의존하여 메소포타미아 세력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의존한 결과는 앗수르에 의존한(cf. 사 7장; 왕하 16:5이하; 21:1-18) 결과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강대국 의존정책을 야훼께서 용납하지 않으시기에 애굽이 이스라엘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도움인 야훼를 버리고 ‘가만히 않은 라합’(사 30:7) 애굽에 의존하다가 수치를 당합니다(cf. 렘 2:14-19; 사 30:1-7; 31:1-3; 호 7:11). 손을 머리에 얹는 행위는 수치나(cf. 삼하 13:19) 포로 됨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전자의 경우 이스라엘은 동맹정책에 실패하고 애굽을 떠난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 애굽에 원조를 청하던 유다가 도움을 받지 못하고 포로로 잡혀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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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징계와 가르침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온전한 길로 행하게 하시는

긍휼과 자비에 풍성하시고 공평과 정의를 행하시며

마침내 우리를 행한대로 보응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을 통한 가르침과 징계에 무디었던 삶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세대를 향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못하였음을 용서하옵고

다시금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주께서 행하신 역사와 은헤들을 늘 상기하며

그 사랑을 기억하고 누리고 증거케 하옵소서.

공평과 정의를 행해야 할 가난한 이들을 향한 긍휼을

믿음의 분량만큼 행할 때에라야 온전한 자임을 깨닫고

삶의 자리에서 믿음과 행함이 일치된 성도로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침묵에 심판의 유보이지 사면이 아님을 깨닫고

더욱 유기와 심판의 길이 아닌 구원의 길로 행하게 하시고

말과 병거와 다른 하나님 아닌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만 바라며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수치의 길이 아닌 영광의 길을 사모하며

주님이 허락하신 그 길을 올곧게 걸으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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