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02:20-28 자신들의 혼합주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죄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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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2:20-28 자신들의 혼합주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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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절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죄, 14-19절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우상숭배의 죄를 고발했고, 이제 20-28절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우상숭배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제의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부정하다 하지 않고 심지어 바알을 섬기지 않았다고까지 주장합니다. 또한 자신들이 야훼 하나님을 떠나 혼합주의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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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절 순전한 참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왜 행음하며 악한 가지가 되었는가?

옛적부터 이미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거룩한 길을 멍에와 결박으로 생각하며, 순종하지 않으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곳(높은 산, 푸른 나무 아래)에서 행음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순전한 참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이들은 가나안에서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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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룩한 길에서의 이탈을, 멍에와 결박을 끊어버리고 주인으로부터 도망하는 소에 비유합니다. 이들의 완고한 불순종의 모습은 오늘 하루 이틀의 모습이 아니고 처음부터(옛적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독립하려 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삶의 규범들을 멍에와 결박으로 생각하며 불순종으로 일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는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참으심에도 불구하고 불순종과 거역으로 범죄한 역사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높은 산과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이들은 우상을 숭배합니다(행음). 바알을 숭배하던 곳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풍요 다산의 제의에 빠져드는데 이 제의에서는 성적인 행위들이 풍요로운 결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여기에 혼합되어버립니다. 바알을 섬겼던 곳에서 여호와를 예배하므로 순전한 참 포도나무가 악한 가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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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주의는 서서히 물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할 때는 이미 늦습니다. 더군다나 일단 물들어 버리면 제거하기가 너무도 힘듭니다. 그만큼 풍요제의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거룩한 최상품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들포도나무로 변해 버렸습니다. 거룩한 신부가 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행음하는 창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풍요를 쫓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올무로 생각하며 외면하면서 불순종의 길을 가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러한 신앙의 모습들이 너무도 오래도록 지속되다보면 스스로 자각하기도 힘들고 제거하기는 더더욱 힘듭니다. 우리가 날마다 바른 신앙 위에 서도록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섞인 혼합주의적인 신앙의 모습들을 말씀 앞에서 발견하고 새롭게 하는 일은 시급하면서도 오랜 인내를 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무처럼 여기거나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죄의 노예로 전락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로 가서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참자유와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마 11:28,29)”_매일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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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4절 지나온 여정에서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도 인지하지 못하는 너희를 돌아보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스스로 씻을 수 없을 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자신들은 더렵혀지지도 않았고 바알을 따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골짜기마다 이미 그들이 행음한 증거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의 행음이 들암나귀들의 성욕과 발정기의 모습과도 같아서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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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정화할 수 없기에 갱신 능력은 진즉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외에는 다른 길이 없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얼마나 더럽혀 졌는지 알지도 못하고, 더더욱 자신들은 바알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행한 일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지 깨닫지 못할 정도가 된 것입니다. 혼합주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문제이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여호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던 곳에서 여호와를 예배하므로 여호와를 바알처럼 우상처럼 섬기는 일이 익숙하게 되고 전통이 되어버려서 급기야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알을 예배하면서도 자신들은 지금 여호와를 예배한다고 자부하고 지극정성과 열심으로 행한 것입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아는 일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일보다 자신들의 의가 더 쌓여가고 하나님을 아는 일보다 자신들의 탐욕을 채울 신(神)이 훨씬 더 커집니다. 골짜기마다 이미 그들의 행한 풍요제의의 우상숭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이러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모습을 광야의 들암나귀들의 성욕과 발정기의 모습에 비유합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 예측불허로 종잡을 수 없을만큼 내키는 대로 처신한 모습을 말합니다. 그들의 산당에서 그토록 열심으로 섬겼던 신은 여호와가 아니라 바알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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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는 모습이 태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세속적인 탐욕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물질의 축복과 번영 그리고 여타 많은 성공이라고 하는 것들을 축복이라는 이름하에 인간의 탐욕이 교묘하게 숨겨져서 그것이 신앙의 목표와 전부인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모습이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너무도 오래도록 고착되어서 그 문제점을 드러내면 마치 모든 것이 무너지는것같은 신앙의 회의가 발생합니다. 역사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과 바른 신앙위에 서가는 일들이 그 어느때나 절박하게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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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절 선지자의 경고를 헛된 말로 여기며 여전히 우상숭배의 길로 가겠다고 하며 돌이키지 않습니다. 

들암나귀의 발정기처럼 예측불허로 쫓아다니는 것을 향하여 조심하라고 말하는 선지자의 경고에 대해 헛된 말이라 무시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이방 신을 사랑하기에 그를 따라 가겠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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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선견자가 발견하고 주의를 주고 교정을 위한 가르침과 바른 지도로 말미암아 경고를 듣는 것이 은혜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죄를 범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유기하지 않으시고 선지자나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서 경고한다면 아직은 우리에게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그런 경고에 대하여 헛된 말이라고 무시합니다. 영적 무지와 어두운 눈과 귀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계시에 귀를 닫아버린 것입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아예 자신들이 지금 이방 신들을 사랑하기에 가던 길 그대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것이 파멸의 길인 줄 알면서도 그럴지라도 풍요를 주는 사랑하는 이방신을 쫓아가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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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지금 통제불능의 상태에 와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과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럽혀 졌는지도 모릅니다. 죄의 무서움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악이 반복되면 급기야 그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돌이킴은 불가능해집니다. 죄에 친숙하므로 생기는 절망적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스라엘은 오래도록 혼합주의에 빠져 있기에 자신들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지금 열심히 여호와를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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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8절 그토록 친밀하게 섬기는 우상은, 정작 환난의 때에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수가 성읍의 수만큼 많습니다. 

도둑이 붙들려서 수치를 당한 것처럼 이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왕, 지도자, 제사장, 선지자)은 수치를 당했습니다. 나무를 아버지라 하고 돌이 자신들을 낳았다고 하면서 여호와를 향해야 할 고백이 헛된 우상을 향합니다. 하지만 정작 환난을 당할 때에 그것들을 향하여 구원을 요청하지만 그들이 만든 신들은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헛되고 무능한 신들의 성읍의 수만큼 만연되어 있음을 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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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우상숭배와 혼합주의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백성의 상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마침내 여호와께서 이들의 악을 심판하는 날에는 지도자들은 더 심하게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나무와 돌을 향하여 자신들을 만든 창조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토템이즘에서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성적인 것과 연관지어서 풍요제의에 사용되는 것으로, 다산과 풍요제의를 위한 신상이나 물건들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징물들은 그들의 성읍의 수와 같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들을 향하여 구원을 요청해 보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고 구원해 낼 수도 없습니다. 그럴 땐 또 여호와를 찾지만 이미 자신들이 찾는 여호와 하나님과 헛된 신들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자신들의 필요로 할 때만 찾고 응답해 주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앙과 탐욕적 신앙이 낳은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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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결코 야웨로부터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섬기는 신들이 응답이 없으면 국가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여호와를 부르며 구원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나누어진 마음은 이미 우상숭배이며 영적 간음입니다. 혼합주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 섬기라는 요청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필요로 할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우상을 숭배하지만 큰 일을 당하면 그제서야 도와달라합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처럼 섬겼던 우상들의 무능력함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은 헛된 우상을 섬기다가 헛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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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죄악이 결국 교회안에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데 그 모습이 우상을 섬기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고, 추구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마찬가지 우상숭배자와 같고,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찾을 뿐이지 여호와의 뜻과 사명과 부르심은 멍에와 결박일 뿐 그저 하나님은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는데 도움을 줄 수많은 신들중의 하나 정도로 여기는 신앙은 온전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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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28(이스라엘의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 _ 묵상 도움글

14-19절이 이스라엘의 정치적 우상숭배를 고발하는데, 비하여 20-28절은 다시 이스라엘의 종교적 우상숭배(바알의 풍요제의)를 고발합니다(→ 4-13절). 이스라엘은 바알제의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부정하지 않다고, 바알을 섬기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가나안의 바알제의를 야훼제의에 편입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을 야훼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혼합주의에 빠져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다.

20절 전반절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이탈을 멍에와 굴레를 벗어버리고 주인으로부터 도망하려는 소에 비교합니다. 소가 완고하게 자신의 일을 거절하듯이 이스라엘은 야훼께 순종을 거절합니다. 이스라엘의 거역과 배반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옛적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그분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이스라엘은 야훼를 버리고 바알을 쫓았습니다. 에스겔에 의하면(20장; 23장; 16장)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미 애굽에 있을 때부터 야훼께 거역하고 불순종한 범죄사(犯罪史)였습니다.

후반절은 이스라엘을 창녀에 비유합니다. ‘모든 높은 산, 모든 푸른 나무’는 가나안의 성소들과 산당들을 가리킵니다(풍요제의).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아마도 별다른 생각 없이] 가나안 사람들이 이전부터 제사를 드리던 곳에서 야훼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특히 농경사회로 옮겨가면서 이스라엘은 바알을 주신(主神)으로 하는 풍요다산제의에 빠져듭니다. 풍요다산제의는 자연의 순환 절기에 일치하는 제의로 자주 [상징적] 성적 행위들을 통해 구현됩니다. 고대농경사회의 주된 관심사가 땅의 풍요로운 결실(추수)이었기에 이스라엘도 바알의 풍요제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창녀처럼 본 남편 야훼를 버리고 정부(情夫) 바알을 섬깁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바알제의를 야훼제의 안에 수용하려는 혼합주의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가나안에서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평소에 제사를 드리는 장소가(절기 때만이 아니라), 지역에서 드렸을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서 드린 것입니다. 상징성 때문에 고대 세계는 다른 종교의 성지는 종교가 바뀌어도 성지가 됩니다. 가나안 신들에게 드린 장소에서 드리는데, 장소만 접수한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제의적 신학적 의미도 수용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긴 시간 동안 벌어집니다. 같은 장소에서 제의행위가 일어나면, 바알과 여호와의 결합, 혼합이 이루어집니다. 제의 장소를 빌어 쓰므로 말미암아 농경사회에 돌입한 이스라엘은 자연스럽게 여호와를 바알처럼 이해하고 섬기게 됩니다.

여호와가 갖는 고유성을 잃어버리고 이름은 여호와지만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 이들은 바알은 또 다른 여호와의 이름이 되어 버립니다. 결국 혼합주의는 서서히 물들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할 때에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일단 들어오면 제거하기 힘듭니다. 유럽의 기독교도, 선교지에서의 기독교등도, 우리나라도 재래적 종교와 혼합, 아프라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을 분리해 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혼합주의의 풍요제의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것입니다. 인류 역사적으로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제례종교에서 갖는 풍요제에서 들어온 기독교의 문화가 많습니다.

21절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최상품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들포도나무로 바뀌었습니다. 순수한 종자이기에 좋은 포도를 맺어야 했음에도 가치 없는 신포도를 맺을 뿐이었습니다. 야훼의 신부로 출발한 이스라엘이(2:2) 창녀가 되었습니다. 이 변질은 외적-일시적 변화가 아닌, 본질적 퇴화였습니다.

22절 이스라엘의 더러움은 이미 본질에 속한 것으로 잿물이나 비누 같은 일상적인 세제로는 깨끗하게 씻어 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씻어도 죄악의 더러운 얼룩은 여전히 남습니다. 죄악으로 완전히 오염되었기에 이스라엘의 갱신은 이미 상실해버린 가능성이었습니다. 심판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23절 전반절에서 예언자 또는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무죄주장에 대해 반박합니다. 더럽지 않다고, 바알들을 숭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자/하나님은 골짜기에 난 길을 살펴보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고 반박하십니다. 바알들을 숭배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골짜기를 찾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의 무죄 주장은 가나안의 풍요제의가 야훼종교 안에 그대로 수용되었음을 전제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바알종교가 야훼종교에 대립적이었다기 보다는 보충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반절과 24절은, 얼마간 관점을 달리 하면서, 암낙타와 들나귀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맹목적인 우상숭배를 고발합니다. 먼저 23b절은 암낙타의 ‘신뢰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암낙타는 발이 빠르기는 하지만 아무 쪽으로나 날뛰기에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행위도 마찬가지로 예측불허로, 종잡을 수 없이 마음에 내키는 데로 처신합니다.

이스라엘은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바알의 길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를 따랐다고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혼합주의입니다. 실질적으로 바알을 따르지 않고, 산당에서 제사도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기에 이렇게 변명합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봤을 때는 너희가 산당에서 드린 제사가 왜 여호와께 드린 제사냐? 산당에서 섬긴 신은 여호와가 아니라 바알이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축복에 매몰되었다 하면 ‘아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한다고 하는데 신구약에 영적+물질적 축복을 준다는 것이 있다. 물질을 무시할 순 없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세속적 탐욕인지 경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다 하나님이 주셨다고 한다. 불의함을 인정하진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는 쉽게 판단할 수 없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당당히 맞섭니다. 바알에게 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24절 24절은 들나귀의 비유를 통해 풍요제의와 관련해서 이스라엘의 제어할 수 없는 욕정을 기술합니다. 발정기의 암나귀는 욕정을 해소하기 위해 사방으로 수컷을 찾습니다. 암컷이 들떠서 수컷을 찾기에 숫나귀들은 암컷을 찾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욕을 통제할 수 없는 이스라엘도 욕정을 만족시킬 자를 찾기에 혈안입니다. 이스라엘은 제 욕망의 노예가 되어 간음을 즐깁니다. 이스라엘은 풍요제의의 성적 쾌락에 빠져 다른 생각 없이 바알을 찾아 다닐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기에 적극적으로 우상을 찾아갑니다.

25절 23b절과 24절의 비유가 얼마간 계속됩니다. 예언자는 조롱하면서 암낙타와 들나귀의 맹목적 행태가 가져올 결과를 지적합니다. 이리저리 날뛰다가 발을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진정시킬 수 없는 성욕에 불타 목이 마르지 않게 조심하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예언자의 경고는 아무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예언자는 빈정거리며 이스라엘이 변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이스라엘의 입을 통해 말하게 합니다. “절망적입니다. 저는 이방 신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신들에 빠져 미래를 전혀 내다보지 못합니다. 우상숭배에 중독된 이스라엘의 유일한 관심사는, 비록 그것이 파멸을 가져올지라도, 사랑하는 이방 신들을 뒤쫓는 것입니다.

통제불능에 빠진 이스라엘의 상태 : 내 삶 자체가 늪이라면 늪에서 허우적 거리는지, 더럽혀졌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너무 그 안에 있으면 인지 못한다. 죄의 무서움이다. 그 안에 있으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죄를 범하고 나서도 인식하지 못하면, 돌이킴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죄에 친숙해지면 생기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스라엘도 오랜 시간동안 혼합주의에 빠져 있기에 자신들의 상태를 인지 못하고, 열심히 여호와를 좇는다고 생각합니다.

26절 도둑이 현장에서 잡혀 수치를 당하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그들의 우상숭배가 드러날 때 마찬가지로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누구도 재앙의 날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특히 정치적-종교적 지도자들이 더 심하게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27절 우상숭배에 물든 자들은 나무와 돌을 창조신들로 부릅니다. 풍요제의와 관련된 나무기둥과 돌기둥은 성적인 상징물로 출생과 아버지 됨을 그 내용으로 갖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민간신앙에서 전제하는 수많은 사적이며 개인적인 수호신이나 또는 가나안의 식물의 신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나무로 된 아세라 상이나 거룩한 돌기둥이 이 신들을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야훼로부터 완전히 떠났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섬기는 신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나, 또는 국가적인 큰 행사에서 이들은 당연히 야훼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27b절). 그러나 이들의 나누어진 마음은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혼합주의적 경향성은 야훼 하나님 한 분만 섬기라는 요청과 양립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때에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평소에는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큰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 찾아와서 도와달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하며, 공적으로는 여호와를 아무 죄의식 없이 섬기는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집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합니다.다.

28절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조롱하면서 재앙이 닥칠 때 수없이 많은 신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신들에게 구해달라고 요청해 보라고?. 이스라엘은 재앙의 날에 그처럼 열심으로 섬겼던 우상들이 전혀 무능력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헛된 우상을 섬기다 헛된 존재가 된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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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나를 지으시고 참포도나무로 접 붙이사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성경을 통해서

거룩한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우리의 어두운 눈과 불신앙이

주의 인도와 말씀을 

멍에와 결박처럼 여기고 있는 부분은 없으까요?

우리를 살리기 위한 생명의 말씀으로 듣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즐거이 순종하는 자이길 원합니다. 

오랜 죄악에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게 하옵시며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 사랑하며 주의 길 따르게 하옵소서

말씀을 맡은 지도자로서의 책무를 잘감당하고

헛된 것들을 향하여 창조주라 고백하지 아니하고

나를 지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합당한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환난때에도 변함없이 응답하실 주님을 기대하옵고

어떤 처치에서도 주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마침내 승리하리라는 약속을 신뢰하면서

내가 만든 신이 아니라

주의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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