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02:01-08 여호와를 멀리하고 헛된 것을 따라 행한 죄,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죄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0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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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2:01-08 여호와를 멀리하고 헛된 것을 따라 행한 죄,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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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외쳐야 하는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광야의 때를 기억 가면서 왜 그 사랑을 잊고서 지금 헛된 것을 따르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더니 그곳에서 준 하나님의 선물을 먹고서 오히려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잊고서 그 땅마저 더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버리고 헛된 것을 따라 행한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법대로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신을 바꾼일이 있는지 보라 하십니다. 그렇게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택한 결과는 그들이 자취(스스로 취함)한 것으로 결국 그 행한 악이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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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예레미야를 묵상해 가면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레미야가 외치며 고발하는 그들의 모습들은 모두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 아닌 것을 우상처럼 믿는 우리들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패역하고 무지몽매하고 비열하기까지한 모습들이 결국 우리 안에 여전히 남겨진 죄악된 모습임을 기억하며 하나하나 양파 껍질을 벗기듯 우리의 죄악을 깨닫고 돌이키고 버리고 청산하며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새롭게 빚어져 가는 시간이길 간구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사가 달린 심각함과 긴박함을 갖고 임해야 하는 절박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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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광야학교가 오히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귀에 외치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청년의 때의 인애와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한다고 하는데 그때는 씨도 뿌리지 못하는 광야의 때를 말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따랐다고 회상하십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구별하신 이들이며 첫열매로서 하나님의 소유였기에 그들을 괴롭히면 벌을 받아 재앙이 닥칠 것이라 경고하면서 지키고 보호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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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듣지 않기에 이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보내서 그들의 귀에 외치라고 합니다. 그냥 말해도 들을 수 있고, 기억만해도 알 수 있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관계였거늘 들어도 순종하지 않고, 아무리외쳐고 바뀌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니 그렇게 눈과 귀와 마음을 닫은 이스라엘의 귀에 대고 외치라고 말합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의 절박함과 긴박함과 간절함이 담긴 표현입니다. 또한 우리 귀청을 울릴만큼 그렇게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지만 오늘 말씀의 우리의 가슴에 우리의 귀에 우리의 심령에 나팔소리처럼 크게 들려야 합니다. 주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그 음성 듣기를 기대하고 귀 기울이고 세미한 중에라도 들리는 그 음성을 듣는 일이 가장 우선되어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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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는 광야를 씨 뿌리지 못하는 땅이라고 말합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희망이 없는 땅,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런 땅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랐고, 청년의 때의 인애와 신혼 때의 사랑이라고 표현하면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시간이 청년과 신혼의 때였으며, 하나님이 인애와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대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인애(헤세드; 성실함, 신실함, 지속성, 빗나가지 않는 사랑)와 사랑을 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민수기를 통해서 본 이스라엘의 광야는 불평과 불만 가득한 불신의 모습으로서 이스라엘의 인애와 사랑을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하나님의 인애와 사랑이 그들을 광야에서 살게 하셨는데 지금 여기서는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저지른 패역한 모습들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광야의 이스라엘의 모습이 훨씬 더 하나님을 사랑한 것처럼, 훨씬 더 좋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광야는 예측불허요 의지할 데가 없기에 위로 하늘밖에 의지할 바가 없으니 지금 풍요의 땅 가나안에서처럼 미혹될 일들이 적었기에 비교적 나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호세아서와 더불어 예레미야는 광야의 시간을 긍정적으로 그립니다). 얼핏 학교 다닐 때가 더 좋은 때라고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도 광야학교같은, 광야같은 그 시간들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난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척박하고 앞이 보이지 않고 힘들어도 어쩌면 그래서 더욱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서 더 감사할 수 있는 때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없는 것, 부족한 것, 의지할 데 없는 것이 더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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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첫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구별되어 여호와께 드려진 여호와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지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성물로 첫 열매로 삼으신 뜻이 바로 사명입니다. 열방을 주께로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에게 그런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이며, 지키고 보호하심 때문이요, 통로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나라’라는 표현도 같은 의미입니다. 지금 구원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요 거룩한 백성된 우리들이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이 바로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사명이며 제사장 나라 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된 우리들이 바로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물로 구별되고 택함 받은 새 이스라엘이요, 새 백성이요, 새 인류요, 새 피조물이요, 새 사람 된 성도요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를구원하신 주님의 뜻을 알고 있고 또 아는 대로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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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3(한 때 신실하였던 이스라엘) 묵상 도움글

2-3절[과 4-13절]은 호세아의 선포와 매우 유사합니다. 주전 8세기 후반에 북 왕국에서 활동했던 호세아도 광야와 가나안을 대비시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고발했습니다. 광야시대는 이스라엘이 야훼만 알고, 그분께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았던 시기였습니다(호 2:14-15; 9:10a; 11:1; 12:13). 광야에서 야훼만 사랑하였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 바알을 알게 되면서 부부관계가 파탄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남편 야훼를 버리고 가나안 사람들이 풍요다산의 신으로 섬기는 바알을 쫓았습니다(호 9:10b; 10:9; cf. 겔 16:1이하; 20:1이하; 23:1이하). 바알은 기본적으로 농경사회에 속한 신이었기에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광야에서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호세아와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나안 정착 이전과 이후로 이분하여 이해합니다.

2절 하나님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광야기간을 이스라엘이 당신께 전적으로 의존하였던 ‘신혼의 좋았던 때’로 기억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열심을 다하여 남편 야훼를 사랑하며 그분만 따랐습니다. ‘인애’로 번역한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묘사하는 기본적 단어로 ‘성실함, 신실함, 지속성, 빗나가지 않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특히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의 총체를 헤세드로 표현했습니다(호 6:6). ‘씨 뿌리지 못하는 땅’은 씨를 뿌려서 그 결실을 거두어 살아가는 가나안 땅과 대비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생존에 적대적인 광야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유목생활을 하는 광야에 비하여 농경사회의 가나안 땅은 유혹의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착하기 이전에 바알이 풍요제의를 통해 가나안 땅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호세아 예레미야 : 광야와 가나안을 비교하고 광야를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로 대립합니다. 바알이 없는 여호와만 섬김 곳으로 인식합니다.

3절 이스라엘은 야훼를 위해, 그리고 그분께 성별된(구별된) 백성이었습니다. 수확의 처음 열매가 땅을 축복하신 하나님께 그분의 몫으로 돌려지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땅 위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되어 야훼의 것으로 그분께 드려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야훼의 소유이기에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개인적으로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적대적인 자들은 곧 야훼께 대적하는 자들이었기에 그분으로부터 벌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본문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올릴 때 있었던 애굽(출 14장)과 아멜렉(17장)의 위협으로부터의 구출을 염두에 두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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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절 여호와에게서 어떤 불의함을 보았기에 여호와를 멀리하고 헛된 것을 따라 행하는가?

여호와께서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을 향하여 질문합니다. 조상들의 대체 여호와에게서 어떤 불의함을 보았기에 여호와를 멀리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르고 행하는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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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떠나 헛된 우상을 따르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지금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 집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지금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남유다만 있지만 가나안과 광야의 세대들을 대조하시면서 이스라엘 전체 지파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택하시고 세우시며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신 족속(집)들이 지금은 그 모든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 아닌 헛된 것들을 따르고 행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불의하지 않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불의한 일을 행하고 있으며, 마치 여호와께서 불의하신 것처럼 행동했기에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어떤 불의가 있었는지 되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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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신앙적 행동이 결국은 여호와를 불신하는 것 뿐 아니라 여호와를 불의한 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심각한 죄악일 수 있습니다. 어떤 변명으로도 우리의 죄악에 대하여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하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된 여호와를 버리고 헛된 것을 따른 이스라엘의 문제는 여호와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이제 헛된 것을 따르고 헛되이 행하였기에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상이 무가치하듯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도 무가치한 것이 된 것입니다. 의로우신 주님을 따르면 의로운 자가 되지만, 헛된 우상을 따르고 행하면 헛되고 무가치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따르는 것,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의로우신 하나님이신가요? 불의하고 무가치하고 헛된 것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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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a절 척박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고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풍성한 것을 먹게 하였더니 왜  너희는 여호와를 찾지 않는 것인가?

5절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광야(척박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땅)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그 여호와를 찾지 않습니다. 또한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고 열매와 아름다운 것들을 먹게 하였더니 역시나 여호와를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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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의 종되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척박한 광야에서도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 하셨으며, 마침내 약속의 땅에서 부요케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았는데, 그만 그 풍성한 선물을 받고서는 그것을 허락하신 여호와를 망각하고 더이상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7a절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구속사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늘 기억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기억한다면 주님을 찾고, 사귀며 순종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텐데 과연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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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은 배은이며 무지는 패역입니다. 기억은 믿음이며, 회상은 은혜입니다. 역사(歷史)는 신앙이며, 역사(役事)는 축복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함께하심과 구원하신 은혜를 망각한다는 것은 결국 그 구원을 허락하신 여호와를 부인하는 것이요 불신하는 것입니다. 척박한 땅에서는 여호와를 의지하더니, 이제 풍요의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눈이 어두워 그것을 주신 여호와를 더욱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가 여호와를 대체하고, 망각하게하고, 불필요하게 하여 마침내 더이상 여호와를 찾지도 구하지도 만나지도 않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받아 누리는 것이거늘 그 선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너머에 모든 만물의 주재이신 여호와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어쩌면 황금만능,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불신앙을 조장하는 것들이 아닐까요? 기름진 땅과 열매와 아름다운 것을 먹기 전에 그것을 주신 분을 먼저 기억하고 감사하며 누릴 수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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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b-8절 여호와를 찾지 않고 알지 못하고 반역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약속의 땅을 더럽히고 역겨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인도하신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은 각각 기업으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살아가면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더럽히고 역겨운 땅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를 찾지 않았고,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관리들(왕들)은 여호와를 반역했으며, 선지자들은 바을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헛된 것을 따름으로 그렇게 더럽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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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망각하고 왜곡하며 반역 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전적으로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로 말미암고 여호와와 온전한 관계 가운데 있을 때 이른비와 늦은비로 그리고 허락하신 열매들로 아름다운 소산들로 이스라엘은 배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의지하지 않고 관계가 깨어져 스스로 살겠다하고, 여호와 아닌 것을 찾고 의지하고, 심지어 다른 우상과 사람의 힘을 의지하게 되면 더이상 땅은 소출을 내지 않고 역겨운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파괴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이 여호와를 찾지도 않았고, 율법을 가르치고 지키도록 지도해야 하는 이들이 여호와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도 부족하였으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대리통치자요 청지기인 왕들(관리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신들이 왕인것처럼 행세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하는 선지자들,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지 않고 오히려 바알의 이르므로 예언하고 영원한 하나님이 아닌 무익한 것들을 따라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를 담당하던 이들이 모두다 제 역할을 감당하지 아니하니 백성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무지하고, 그러므로 여호와를 찾지 않고 여호와의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지도 않고, 여호와의 뜻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세상의 가치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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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율법을 다루는 자, 지도자, 선지자들 모두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바른 믿음과 삶으로 인도해야 할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 본분을 망각하는 순간, 자신들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헛된 삶, 사망과 죽음으로 이끄는 영적 소경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정체성을 잃고, 삶의 내용은 부정과 역겨움을고 가득차고, 삶의 방향을 잃어 버리니 표류하는 인생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나라의 거룩한 백성 곧 구원받은 이들이라면 모두가 다 말씀을 맡은 자들, 말씀을 듣는 자들, 말씀을 읽는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호와를 찾고 알아가고 순종하며 주의 이르므로 듣고 소망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러한 일들에 관심이 없이 오직 헛된 것들을 위해서 우리의모든 것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세월을 아끼고 가장 소중한 것이 여호와께 있음을 깨닫는 지혜 있길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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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3절 일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여호와가 아닌 바알을 따르게 됩니다(신앙적 범죄).  

여호와께서 싸우자고(법대로 하자) 말씀하십니다. 깃딤(키프로스 또는 지중해 동쪽 지역을 의미함) 섬에도 게달(시리아에서아라비아-팔레스틴 북동쪽에 사는 아랍족속)에도 이스라엘처럼 자신들이 믿는 신을 다른 신으로 바꾼 일이 없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무익한 것으로 바꿨습니다. 이에 증인된 하늘을 향해 놀라고 심히 떨고 두려워하라 말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행악한 두가지는 생수의 근원된 여호와를 버린 것과, 스스로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만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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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향하여 소송을 걸어서 따져보면 지금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이방나라들도 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지금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신들을 섬기는 이들도 자신들의 신을 다른 신으로 바꾼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다른 신이 있다는 것도 아니고, 이방나라들이 실제로 신을 바꾸는 일이 없다는 것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의 잘못이 무엇인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즉 여호와와 바알을 같이 섬기는, 여호와를 바알처럼 섬기는 신앙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증인된 하늘을 향해 놀라고 떨고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죄악의 심각성을 표현합니다. 결국 ‘내 백성(11, 13)’ 이스라엘이 행한 악은 생수의 근원된 여호와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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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죄악은 가나안에서 바알을 숭배하는 것에 대한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바알을 숭배하게 된 이유, 광야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웅덩이의 물 곧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을  선택한 이유는 농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서는 농사가 중요한데 당대 바알 종교는 계절의 변화와 건기와 우기에 내리는 비가 바알이 알아서 때가 되면 당연히 내리는 것으로 이해한 가나안의 신화를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일년이 순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는 자동적으로 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달라고 해야 합니다. 또한 이른비와 늦은 비를 주관하시는데 이스라엘이 기대한 것처럼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바알을 섬기는 신앙처럼 당연히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고 의당 그렇게 당연히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여호와가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바알이 자기들 마음대로 원하는대로 당연하게 내리는 쪽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섬기되 바알을 섬기듯 주권을 여호와가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에 맡겨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수의 근원된 여호와를 버리고, 제대로 물 곧 생명을 주관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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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대 물을 저장해서 농업용수로 관리하는데 웅덩이의 관리가 중요합니다. 잘 관리하지 못하면 물이 새거나 이물질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선택한 바알이 웅덩이에 있는 고인 물과 같습니다. 마시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리고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마시면 생명을 잃게 되는 웅덩이의 물과 같은 바알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영광을 무익한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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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이 자동으로 당연히 의당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관하심 가운데 진행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런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분처럼 섬기면서 여호와를 우상처럼 우리 욕망의 산물로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때에 주시는 분 정도로 믿는 신앙도 결국 같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를 기억하시고 채우시며 허락하시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공급하심과 채우심 그리고 허락하심 속에 진행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날마다 그분 앞에서 간구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뢰하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지금 내 삶의 주권이 주님께 있음과 내 삶의 모든 것을 주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온전히 믿고 있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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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13(생수의 원천을 저버린 이스라엘) 묵상 도움글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가득 찼던 신혼기간이 지나자(2-3절) 이스라엘은 남편 야훼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남편 야훼께서 원고(原告)가 되셔서 배반한 아내 이스라엘에게 소송을 거십니다(9절). 그분은 이스라엘이 생수의 원천인 당신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우상)를 의존했다고 고발하십니다(13절). 이스라엘은 배반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서는 어떤 잘못/허물도 찾을 수 없습니다(5a절). 그분은 이스라엘을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해방하여 위험한 광야 길을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땅의 좋은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6-7절).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자신의 구원자를 더 이상 찾지 않았습니다. 야훼의 의지를 대변해야 할 자들인 제사장들과 율법을 맡은 자들과 목자들과 예언자들도 그분께 등을 돌렸습니다(8절). 비록 헛된 우상들이기는 하지만 이방인들 조차도 자신들이 섬기던 신을 바꾸지 않는데 이스라엘은 참된 하나님을 버리고 헛되고 무익한 가나안의 신들을 쫓았습니다(10-11절). 이스라엘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못하는 헛것들을 따라다니다가 그들 자신도 마찬가지로 헛것이 되었습니다(5b절).

우상숭배는 오늘 한 세대만의 문제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이어온 뿌리깊은 질병이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 역사를 하나로 묶어 고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이라 합니다. 철저한 심판을 고발하는 선지자들은 현세대 고발 위해 이스라엘 전역사를 고발합니다. 호세아도(예레미야 전 선지)-광야까지, 에스겔도(출애굽에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기원까지) 언급합니다.

4절 예언자는 야훼의 말씀을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에게 전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과 동의어로 아마도 이스라엘의 전체 12지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예언자는 광야시대와 가나안시대를 대조시키고 있기에 남북 왕조를 포함하는 전체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말씀을 선포합니다.

5절 하나님은 수사적 질문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비난]에 대한 당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는가? 이스라엘이 나를 버릴만한 어떤 허물/잘못을 내가 범했단 말인가? 하나님은 당신 백성을 위해 일하셨지만(→ 6절)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절하고 헛된 것(사라져버리는 입김/숨결, 아무 것도 아닌 것, 덧없음, 우상)의 뒤를 쫓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스라엘은 제 잘못으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참된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우상을 따라다닌 결과로 이스라엘은 헛된 것이 되었습니다. 우상이 무가치한 것처럼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은 우상처럼 무가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앗수르에 의한 북 왕국의 멸망(722/1년)이 이를 분명하게 증거해줍니다.

6절 5절의 수사적 질문에 대한 답변의 역할을 하는 6-7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구속사)을 요약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셨고, 사람이 생존할 수 없는 광야 길을 안전하게 지날 수 있도록 보호하며 인도해주셨습니다(6절). 뿐만 아니라 그분은 이스라엘을 기름진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셔서 그 땅의 좋은 열매를 먹게 하셨습니다(7절). 그러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분께서 자신들을 위해 애쓰셨던 일들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야훼를 떠나 이전부터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그 땅의 신들, 특히 바알을 찾아갔습니다.

7절 이스라엘은 야훼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땅을 더럽혀 역겨운/가증스러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원래 야훼의 소유로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땅에 살면서 그 땅을 주신 분을 무시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이 마치 바알에게 속한 것처럼 바알을 섬기며 그에게서 땅의 풍요를 간구하였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이전부터 원주민들이 제사를 드렸던 곳(산당)에서 야훼께 제의를 드렸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농업경제를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저들의 풍요제의도 받아들였습니다. 오랜 기간 지속된 이런 과정을 통해 농경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바알제의가 자연스럽게 야훼제의 안으로 유입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개인의 신앙과 지방의 성소들이 혼합주의의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되었습니다.

광야와 비교된 가나안에서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 오늘의 성도들도 마찬가이다. 어려울 땐 하나님을 찾지만 풍요할 땐 버립니다. 참된 신앙은 잘 되고 있을 때 드러납니다. 어려울 땐 누구나 좋은 신앙, 잘 풀릴 때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살아가기보다 자신의 능력과 업적에 근거해 살아가려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8절 6절이 이스라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데 비하여, 8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오도한 종교적-세속적 지도자들의 배교행위를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일부 집단에만 국한된 부분적 현상이 아니라 상층계급부터 하층계급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만연된 총체적 부패에 속했습니다.

먼저 ‘제사장들’을 고소합니다. 가르침과 제의를 통해 야훼의 의지를 전해야 할 자들이 야훼를 찾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은 형식상 야훼의 이름으로 제사를 드릴뿐, 예배의 대상인 야훼께 정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율법을 손에 잡은 자들’은 제사장들 또는 레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율법은 알지만, 그 율법을 주신 분에 관해서는 참된 지식을 갖지 못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내적(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맡은 자들입니다. 히브리어 ‘목자들’은 [개역개정의 번역과 달리] ‘관리들’보다는 ‘왕들(통치자들)’로 번역해야 합니다.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구현할 책임이 있는 왕들이 이스라엘의 국가 신이신 야훼의 가르침과 의지를 전혀 존중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판단에 따라 통치할 뿐입니다. 야훼의 이름으로 그분의 의지를 선포해야 할 자들인 ‘예언자들’은 가나안의 풍요제의를 주관하는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합니다. 예언자들이 야훼와 바알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합주의에 빠집니다.(여호와의 이름으로 하지만) 이들은 땅을 선물로 주신 야훼를 저버리고 어떤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바알을 쫓습니다. 명목상은 야훼 예언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바알 예언자로 활동합니다.

많은 지식이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알기 위해서 또 만나기 위해서 성경을 배우고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다 하나님을 놓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정치 종교 지도자들 마저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오늘날 종교지도자가 없이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지만 고대세계에서는 제사장, 통치자, 선지자들 없이 하나님을 만나고 배울 기회가 전무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담당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당시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9절 “그러므로 내가 다시 너희에게 소송을 걸고 - 야훼의 말씀 - 너희 자손들의 자손들에게도 소송을 걸겠다.” 9절부터 시점(視點)이 과거에서 현재로 바뀝니다. 지금 세대는 조상들과 다를까?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있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과거 세대나 지금 세대나 한가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지속적으로 계약관계를 무시한 이스라엘에게 이제 법적으로 소송을 제기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계약 파기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손들의 자손들’은 앞으로 태어날 세대도 우상숭배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을 보여줍니다.

10절 10-11절은 이스라엘을 이방민족들에 대조시켜 그 범죄의 심각성을 고발합니다. (이방백성보다 못하다)서쪽으로 가서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을, 동쪽으로 가서 아라비아 북쪽의 나라들을 살펴보아라. 온 세상을 뒤져 이스라엘의 배반과 유사한 예가 있는지를 한번 세밀하게 조사해 보아라. 세상 어떤 나라가 자신들의 신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는가? 깃딤은 원래 키프로스(Cyprus)를 의미하지만, 때로는 여기서처럼 지중해 동쪽 지역(팔레스티나 서쪽의 소아시아 해안 지역)의 주민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게달(Kedar)은 시리아-아라비아(팔레스티나 북동쪽)에 사는 아랍 족속을 지칭합니다(cf. 사 21:16).

- 이방인은 다른 신과 바꾸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꾼 것입니다. 그것도 전적으로 바꾸지 않는 혼합주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11절 “어떤 민족이, 비록 그것들이 신들이 아닐지라도, [자기] 신들을 바꾼 적이 있더냐? 그러나 내 백성은 자기 영광을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과 바꾸었다.” 이방민족들은 참된 신이 아닌 헛된 신을 섬기면서도 한 번 섬긴 신을 중도에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헛것’인 우상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구속하신 참된 하나님(6-7절) 야훼를 버렸습니다. 이방민족들은 신이 아닌 헛것을 섬기면서도 성실함을 잃어버리지 않았는데, 이스라엘은 참된 하나님을 배반하고 유익이 되지 못하는 헛것을 섬기는 황망한 짓을 범하였습니다. 민족 신을 섬기는 성실성에 있어 이스라엘은 이방민족들에게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의 영광’은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해주신 야훼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12절 하나님께서 증인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직접 목격한 하늘을 부르고 계십니다. 고대 근동의 예들처럼 야훼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체결하실 때 ‘하늘과 땅’은 증인으로 참여했기에(cf. 신 4:26; 사 1:2-3) 땅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본 하늘은 신실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이 몸서리치도록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이유는 계약의 증인으로 이스라엘이 범한 과오의 심각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계약을 파기한 자신의 범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깨닫지 못하지만 하늘은 이를 알기에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3절 이스라엘이 범한 ‘두 가지 악’은 물론 내용상 동일합니다. 이들은 생명의 원천인 야훼를 버리고(→ 17:13b) 생명을 줄 수 없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은 생명을 기대하면서 생수의 근원인 야훼를 버리는 파멸적 모순(부조리)을 범합니다. 이들은 야훼께 의존하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을 위해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을 팠습니다. 이들이 축복과 생명을 기대하며 뒤따라가는 우상(바알)은 파멸과 죽음으로 이끄는 터진 웅덩이 일뿐입니다.

당대 물을 저장해서 농업용수로 관리합니다. 그래서 웅덩이 관리가 중요합니다. 잘 관리하지 못하면 물이 새거나 이물질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선택한 바알이 웅덩이에 있는 고인 물입니다. 마시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생수를 버리고,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마시면 생명을 잃게 되는 웅덩이의 물을 마시게 됩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바알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고발하고 심판을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선택한 이유,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웅덩이의 물을 선택했는가? 광야의 좋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서 여호와와 결별하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을 수용했느냐? 이유? 비, 결실이 중요한 농경사회가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비를 주관하시지만 임의적으로 주관하십니다. 내리실수도 안내리실 수도 잇는 임의적입니다. 바알의 종교에서는 농경사회의 사이클에 따라 바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여름의 건기에는 비가 안옵니다. 바알이 지하세계에 있는 시기, 가을의 우기에는 다시 지상으로 바알이 올라오는 신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순환에 따라 사계절에 따라 비가 자동적으로 내려줄 수 있습니다. 바알이 지하에 있을 때는 탄식, 지상에 오를 때는 비가 오고 산천초목이 푸르게 되는 사이클이 있습니다. 농부에게는 이 사이클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 농경사회에 들어간다. 자연스럽게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가나안의 신화적 이해를 그대로 수용합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일년이 순환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비를 달라고 해야 합니다. 계절에 따라 자동적으로 비를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른비와 늦은비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비를 안내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 결국 여호와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현실의 생활과 기대치에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농사에 풍요로운 결실이 중요합니다. 그것과 맞기에 가나안에서 바알을 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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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7절 우리가 대를 이어 종살이하고 포로된 이유는 여호와를 떠나 자취(스스로 취한)한 결과입니다(정치적 범죄).

이스라엘이 씨종(대를 이어 종이 되는 것, 집에서 태어난 종)과 포로가 되고, 어린 사자들(주변의 어리석은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땅을 황폐하게 하고 폭행하며 상하게하는 참담한 결과는 결국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주관하시고 인도해 가시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그런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반역하여 떠난 결과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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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을 말할 수도 있고, 망해가는 남유다에 계속되는 이방의 침입과 포로되는 상황을 본다면 남북 이스라엘 모두를 포함하는 이스라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어리석은 이방 나라의 종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전쟁과 여러 폭행에 노출되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한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유민이 되게했고, 기업을 허락하여 거할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므로 낳은 결과는 하나님 아닌 것들에 종노릇하고 있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보호로부터 벗어난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탐욕에 그대로 노출되어서 참략당하고 약탈당해 포로로 끌려가고 땅은 황폐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가고 만 것입니다. 16절의 놉(애굽을 상징)과 다바네스(애굽으로 여행할 때 제일 먼저 만나는 성읍)는 모두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의지하던 나라들인데 그런 애굽조차도 오히려 유다의 정수리를 치는 것입니다. 믿는 나라에 뒤통수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관심하고 무능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스스로 자초한 재앙인 것입니다. 여호와와 맺은 계약을 파기하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면서 주변의 강대국을 의존한 결과가 지금 이렇게 된 것입니다. 축복의 길을 거절한 이스라엘은 계약 파기의 결과를 고스란히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을 여호와께서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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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 아닌 것들이 더 우리를 살려줄 것처럼, 우리를 부요케하고 온전케 하며 행복하게 해 줄 것처럼 더 힘있어 보여서 여호와를 떠나 그들의 정치력을 기대하고 살아가려 하지만 그 말로는 이와 같이 속는 것입니다. 역사속에서 수없이 이러한 사레들을 접하면서도 여전히 여호와가 아니라 다른 정치, 경제 그리고 여타의 다른 손들을 의지하고 속고 또 속으면서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믿음 없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뒤이어 이러한 부조리한 신앙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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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9절 여호와를 버림이 악이요, 여호와 경외함 없는 것(반역)의 결과는 고통입니다. 

생수의 근원된 여호와를 버리고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고 있고, 앗수르로 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어찌 된 것이냐고 여호와께서 외칩니다. 그런 악의 결과로 오는 징계, 반역으로 인한 책망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린 것이 악이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결과는 결국 고통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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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부조리한 행위는 강대국을 의지하다가 결국 파국적인 위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굽(과 앗수르) 그리고 신흥 강국으로 부상중인 바벨론등을 의존하여 생존을 모색하려 합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수많은 시간동안 이러한 길이 사는 길이 아님을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 즉 이스라엘의 실존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를 버리고 신앙적으로는 우상을 섬기고, 정치적으로는 강대국에 의존하면서 터진 웅덩이같은 물을 마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시홀의 강(나일 강)과 그 강(유브라데 강)이 아니라 생수의 근원되신 여호와를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이러한 경고와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고 악을 행하고 맙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악과, 여호와가 아닌 다른 강대국을 의존한 결과는 결국 국가적인 파멸로 고통을 가져오는 심판을 당하게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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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이유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기에 계약을 어기고, 가르침과 계명들을 소홀히 여기면서 여호와를버리고, 불순종하고 다른 것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향한 두려움 곧 경외심이 없는 신앙은 형식적이고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한 부분입니다. 사랑과 위로와 은혜와 복주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온전히 알지 못하고 내가 편한대로만 알고 믿는 것이 결국 다른 편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다시금 회복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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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4-19(배반의 결과) - 정치적 우상숭배 - 묵상 도움글

앞 단락에서는 야훼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배교와 우상숭배를 고발하셨는데, 여기서는 예언자가 화자로 등장해 이스라엘의 강대국 의존적인 대외정책이 초래한 파국적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에 있어서도 야훼를 버렸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권력을 인정하고 의지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우상숭배와 강대국 의존적 정치는 모두 첫 번째 계명의 위반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활동영역은 성전 울타리 안에 제한될 수 없습니다. 왕궁도 그 안에 포함됩니다. 정치권력이 그분의 절대주권을 존중하지 않을 때 그분의 징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14절 예언자는 두 개의 수사적 질문과 하나의 이유를 묻는 질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현재를 탄식합니다. 야훼를 위해 특별히 구별된 백성 이스라엘(→ 3절)이 이방나라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6절) 자유민으로 만들어주었던 이스라엘이 다시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대를 이어가며 종살이를 합니다(‘씨종’[집에서 태어난 종]). 한 때 이스라엘을 노리던 자들은 야훼에 의하여 직접 징계를 당하였는데(→ 3절), 이제 계약 파기의 결과로 야훼의 보호를 박탈당한 이스라엘은 힘있는 자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종이 되는 경우로 보통 두 경로를 들 수 있습니다(cf. 출 21:2-6). 먼저 한 때 자유민이었던 사람이 경제적 빈곤이나 또는 전쟁 포로와 같은 정치적 이유로 종이 되는 경우가 있고, 두 번째는 종인 부모에게서 종의 신분으로 태어나는 경우입니다. ‘집에서 태어난 종’을 의미하는 ‘씨종’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15절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계약 관계를 위반한 이스라엘의 운명은 굶주린 사자들의 먹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야훼의 보호로부터 벗어난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탐욕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이들은 보호자가 없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성읍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갑니다. 이스라엘 땅은 황폐해져서 사람이 살 수 없게 됩니다.

16절 이스라엘과 유다가 정치적으로 의지하였던 애굽이 적이 되어 이들을 침략했습니다. [16절의 시제는 미완료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애굽조차도 유다의 머리통을 부수었다는 16절이 비유적 표현인지 또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진술인지 불분명합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애굽의 느고에 의한 요시야의 죽음(주전 609년)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멤피스(Memphis)로 더 잘 알려진 놉(44:1; 46:14; 사 19:13; 겔 30:13, 16. 호 9:6에서는 ‘몹’으로 나온다)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대략 20km 떨어진 곳으로 고왕조 시대 애굽의 수도였고, 구약시대에는 애굽의 중요 도성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구약성서는 때로는 놉으로 애굽 전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다바네스(Tahpanhes; 43:7, 8, 9; 44:1; 46:14; 겔 30:18)는 일반적으로 그리스어의 다프네(Da,fnai/Da,fnh)와 동일시 됩니다. 나일 삼각주 동쪽 연안에 있는 군사식민지로 그 주변에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다바네스는 유다에서 애굽으로 여행할 때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성읍이었습니다. 멤피스와 달리 애굽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도성이었습니다.

17절 이스라엘에 닥친 재앙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무능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초한 재앙입니다. 야훼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며 주변의 강대국에 의존한 결과로 이스라엘에 저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축복의 길을 거절한 이스라엘은 계약 파기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18절 예언자는 다시금 수사적 질문을 통해(→ 14절) 이스라엘의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행위를 탄식합니다. 강대국에 의존하여 정치적 생존을 도모하다가 파국적 위험을 경험했음에도 이스라엘/유다는 여전히 애굽(과 앗수르)에 의존하여 생존을 모색합니다. 역사로부터 어떤 가르침도 끌어내지 못합니다. 실존의 근본토대가 되는 야훼를 버리고 종교적으로는 우상을 섬기며, 정치적으로는 강대국에 의존하였다. 예언자들은 정치적-군사적 강대국에 기생하려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기회주의적 정치를 배교행위로 고발하였습니다(사 7장; 30:1-7: 31:1-3; 겔 29:16; 호 5:13; 7:11; 8:9; 12:2; 14:14). 현재의 문맥에서 시홀강과 유브라데강의 물은 13절에 나오는 ‘생수의 근원’에 대조됩니다. 이스라엘은 어리석게도 생수를 주시는 야훼를 버리고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과 같은 애굽과 앗수르에서 생명수를 찾습니다. 시홀은 원래 나일강의 한 지류 또는 나일 삼각주 동편의 한 호수를 가리켰습니다. 여기서는 나일강을 대신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강’은 유브라데를 의미합니다.

19절 이스라엘에 임할 징계는 야훼께서 ‘임의적으로’ 결정한 심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범한 악의 직접적 결과이다. 정치에 있어 야훼의 주권을 부정하고 강대국에 의존하여 생존하려는 시도가 기대와는 달리 국가적 파멸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국가의 운명을 정치적-군사적 강대국이 아니라 야훼께서 결정함을 고통스럽게 경험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배반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지 처절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야훼께서 화자로 등장하는 19b절은 지혜전통에 속한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이유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그분과의 계약을, 그분의 가르침과 계명을 소홀히 여깁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경외심이 없는 신앙은 형식적-피상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cf. 잠 1:7; 9:20; 욥 28:28). 

*

# 거둠의 기도

우리의 무지몽매함을 긍휼이 여기시고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를 깨워주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인애와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

광야학교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이 세대에 헛된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않고

주님만 바라며 의뢰하는 믿음 주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세우신 은혜를 기억하며

부르신 그 뜻을 헤아리는 성숙한 믿음 갖게 하옵소서.

의로우신 주를 가까이하며

주를 따라 순종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지나온 삶의 여정이 모두다

구원의 은혜 베푸신 주님의 허락하심인 줄 믿으며

지금 허락하신 기름진 땅과 열매와 아름다운 것을 먹을 때마다

늘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하옵소서

주께서 허락하신 그 땅을 순종으로 정결케하옵시며

허락하신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주를 알아가는 일들에 순종하며 따르는 일에

더 힘써 행하게 하옵시고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종이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허락하시고 대언케 하시고

살게하시고 증거케하시고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때를 따라 이른비와 늦은 비와 같은 은혜 베푸시고

우리 삶을 주관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의 영광을 무익한 것들과 바꾸고

여호와의 섭리하심을 당연히 여기며

주님의 통치에 둔감하여지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닌 것들에 현혹되지 않는

굳건한 믿음 갖게 하옵소서. 

지금 우리의 행악과 고통의 원인이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것임을 알고서

여전히 주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쏟고

주님 아닌 사람과 돈과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잃어버린 신앙에서 벗어나

주님을 온전히 알고 경외하게 하옵소서. 

혼돈의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다른 샘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생수의 근원 되시는 주님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서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주님으로 해갈하며

주를 경외하는 신앙으로 굳건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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