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01:11-19 하나님의 약속과 사명 그리고 격려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06, 202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예레미야 01:11-19 하나님의 약속과 사명 그리고 격려

*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두 가지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먼저는 함께하심에 대해 약속하시고, 이어서 예언한 메시지의 내용을 알려 주십니다. 더불어 이러한 환상으로 두려워하는 예레미야에게 다시한번 함께하심에 대한 약속으로 격려하며 권면합니다. 

*

예언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보는 자’입니다. 예언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나비’ 혹은 ‘로에’는 ‘선견자’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언자는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는 자입니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그들은 역사의 이면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꿰뚫어봅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질서, 아니 차라리 보려 하지 않는 질서를 봅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고통스럽습니다. _ 김기석 목사님의 <끙끙앓는 하나님>(꽃자리)에서 발췌

# 11-12절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말씀이 그대로 이뤄지도록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레미야는 먼저 살구나무 가지 환상을 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환상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지키고 그대로 이루기 위함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살구나무(샤케드)와 12절의 ‘지켜보다’의 현재분사(쇼케드)는 어원은 다르시만 히브리어로 읽으면 거의 유사한 발음입니다. 언어유희적인(말장난 ; 동음이의어나 각운 등을 이용하여 재미있게 꾸미는 말의 표현)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지켜보고 계십니다. 또한 선포된 말씀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게 지켜 보시다가 알맞은 때에 또한 그대로 성취하십니다. 살구나무 환상은 바로 이와 같은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말씀에 대한 권위(정당성)를 부여해 주고 계십니다. 

.

오늘 우리가 보는 약속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된 이들을 통해 전해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주셨기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며, 지켜보고 계신 말씀이며, 또 마침내 그 약속이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그 말씀을 상고하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고백이요, 그 말씀의 능력을 입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순종하며 이루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때가되면 그 모든 일들을 다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 13-16절 하나님은 심판을 선고 하고 모든 죄악을 징계하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 환상은 끓는 가마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가마가 북에서부터 남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는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부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북방 왕국들을 하나님께서 불러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자리를 정하고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리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분향하며 절하였기 때문에 심판을 선고하고 죄악을 징계한다는 것입니다. 

.

끓는 가마에 대한 환상은 하나님께서 북방 왕국들(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모두 북방에서 온 족속들이다)을 불러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선고하고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도 결국 ‘하나님께서 불러서’ 온 것입니다. 이방 나라들도,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하나님께 주권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도구로 쓰임받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들의 악행이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의 한계와, 자신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헛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북방 왕국들을 택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징계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심판은 여호와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내가(15절), 나를, 나의 심판(16절)등의 표현은 심판과 징계에 대한 주권이 여호와께 있음을 강조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북쪽 민족들의 이스라엘 침공은 약소국인 이스라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들도 결국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모든 열방을 주관하고 계시니 우리가 그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알고 계십니다. 바로 그러한 죄에서 우리는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도 섬겨야 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둘째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에 절합니다. 재앙과 죄악은 히브리어(라아)로는 동일합니다. 재앙은 죄악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 모든 만물의 주 되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다른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면서 여호와께 범죄하고 있는 일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하나님 아닌 것이 우리에게 주인 노릇한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모두 다 우상입니다. 차라리 우상이라고 버젓이 만들어져 있는 외형적인 형상이 있는 우상보다 오히려 내면에 있는 우상이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교회안에 있는 이들이 복음과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접할 때 이 계약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

# 1:11-16(두 환상) 도움글

11-12절과 13-14절은 질문-답변-해석의 동일한 구조에 따라 환상을 서술합니다(cf. 24:1-10; 암 7:7-9; 8:1-3). 먼저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고 질문하면(11a절과 13a절), 예언자가 자신이 본 것의 내용을 말하고(11b절 13b절), 뒤이어 하나님이 예언자가 본 환상의 의미를 해석해 주십니다(12절과 14절).

.

1:11-12(살구나무 환상)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주시고 그 의미를 해석해 주십니다(11-12절). ‘살구나무’(편도나무)는 이른 봄에, 때로는 일월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살구나무(dqev' 샤케드)와 12절에 나오는 동사 ‘지켜보다’의 현재분사(dqevo 쇼케드)는 어원은 다르지만 히브리어로 읽으면 거의 유사한 발음을 갖는다. 여기서 언어의 유희를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된 말씀이 그대로 이뤄지도록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예언자들의 선포가 헛되이 사라지지 않게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다가 알맞은 때에 이를 그대로 성취하십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살구나무 환상은 예레미야의 선포에 신적 권위(정당성)를 부여해 줍니다.

.

1:13-14(끓는 가마 환상)

첫 번째 환상이 예레미야 예언의 질적인 면과 관련된다면, 13-14절의 ‘끓는 가마’ 환상은 그 내용과 관련됩니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가마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기울어진 채 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환상을 통해 하나님은 북쪽으로부터 재앙이 와서 유다를 덮칠 것을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십니다.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14절). 북쪽에서 내려와 유다를 침략할 적의 정체는 아직 언급되지 않습니다. 단지 유다의 심판이 야훼의 의지에 따라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에 의해 이루어질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북쪽으로부터 오는 재앙’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야훼께서 예레미야를 당신의 예언자로 부르신 목적입니다.

.

1:15-16(징계의 심판과 그 원인)

15-16절은 ‘북쪽으로부터 오는 재앙’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야훼께서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군대는 자국의 군인들로 이뤄진 정예병뿐만 아니라 피점령지에서 징집한 군대들과 용병들로 구성된 다민족-다국적 군대였다. 이들은 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사방에서 빈틈없이 포위하고 유다의 다른 성읍들을 공략할 것이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멸망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는 이방민족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위협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함락될 때까지 지속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이방민족들에 의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침공은 정치-군사적 강대국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약소국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포위와 유다 모든 성읍들의 침략은 야훼의 심판의지에 속합니다. 야훼께서 이방민족들을 불러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cf. 10:3; 25:6, 7; 32:30)을 섬긴 당신 백성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배교와 우상숭배가 북쪽에서 재앙을 불러들이기에 앞으로 닥칠 파국적 재앙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죄악’과 14절의 ‘재앙’은 히브리어(라아)로는 동일합니다. 재앙은 죄악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

# 17-19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할 것이니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두 가지 환상을 본 예레미야가 두려워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명령합니다. 첫째로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서 명령한 바를 말하라고 합니다. 둘째로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두려움 당하지 않게 해 주신답니다. 셋째 여호와께서 땅과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넷째 그들이 너를 치지만 이기지 못할 것이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함께하사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사명 앞에서 두려워하는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하심에 대한 약속으로 용기까지 주고 계십니다. 우선 허리를 동이는 것은 어떤 일을 하거나 멀리 떠날 때 겉옷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긴 겉옷을 걷어 올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호하게 사명에 임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원문에 가까운 번역은 ‘너는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두려워 떨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주권 그리고 함께하심을 알고 믿는 자로서 두려움을 갖는다면 결국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기에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편에 서서 그분의 명령에 따라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셋째 많은 공격과 비난을 받을 것을 아시고 아예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해서 함부로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공격과 비방에도 무너지지 않는 굳건한 성읍과 쇠기둥과 놋성벽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강력한 위로와 격려는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구원할 것이라는 약속 때문입니다. 예언자가 하나님께 의존하면 누구도 함락시킬 수 없는 견고한 성읍과 쇠기둥과 놋성벽이 됩니다. 고난은 있겠으나 결국은 승리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백성이 싫어하는 내용을 선포해야 하기에 고난은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상황입니다. 

.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는 예언자는 자신이 본 것, 들은 것, 알게 된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패역하여 여호와를 찾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며 살 때 예언자는 역사 이면에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봐야하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질서를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통스러운 길을 가야 하는 것도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일이기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임마누엘하신 주님을 단순히 신앙고백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신앙하고 고백하는 말입니까? 

*

# 1:17-19(예언자의 파견: 권면과 약속) 도움글

17-19절은 예언자에게 주는 권면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는 ‘그러나’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언자가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허리를 동이고’는 구체적 행동을 내포하는 표현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일을 하거나, 여행을 떠날 때, 또 전쟁에 나갈 때 겉옷이 방해가 되지 않게 허리를 묶었습니다. 긴 겉옷을 걷어 올려 매라는 명령은 예언자에게 단호하게 사명에 임할 것을 요청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선포는 부차적인 임무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말씀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全) 존재를 예언자적 직분에 내맡겨야 합니다. 

.

그러나 너는 네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두려워 떨게 하겠다(17절 사역)

17절은 소명기사의 일부 내용을 반복한다. 전반절은 7절을, 후반절은 8절을 다시 받습니다. 듣는 자들의 반응이 어떠하든지 예언자는 야훼께서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원문에는 독립인칭대명사(‘내가’)를 사용해 예언자가 복종해야 할 상대가 명령의 주체이신 야훼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는 원문에서 벗어난 번역입니다. “너는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두려워 떨게 하겠다”로 옮겨야 합니다. 당신께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야훼께서 직접 예언자를 징계하여 그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 떨게 만드실 것입니다. 예언자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그분께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그분의 명령에 따라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에만 그분께서는 예언자를 도와주십니다.

.

야훼께서 예언자에게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해줄 것을 약속하십니다(18절). 예언자와 청자의 관계가 매우 적대적일 것을 시사해줍니다. 예언자가 유다 백성 전체로부터, 특히 정치-종교-사회지도자들에 의해 집요하게 공격받게 될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고위관료계급을, ‘그 땅 백성’은 지주계급에 속한 사회의 유력자들을 가리킵니다. 적들에 포위당한 성처럼 예언자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사람들에 에워싸여 고립무원의 신세가 될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며 홀로 모든 사람들에 맞서 그분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언자가 하나님께 의존할 때 그는 누구도 함락시킬 수 없는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됩니다. 그는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겠지만 결국은 그분의 도움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예언자의 유일한 위로와 도움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19절).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예언자로 남아있는 한 적대적인 환경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유다 백성이 듣기 싫어하는 내용을 선포해야 하기에 그에게 고난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구원약속에 의지해 그분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사회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

# 거둠의 기도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고, 

모든 민족과 왕국의 주권자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함께하심에 대한 약속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의 성취를 바라보면서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시며,

모든 열방의 주권도 주님께 있음을 신앙하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우상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허리를 동이고 두려워 말고 여호와의 명령을 다 전하고

우리를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용기를 얻어서 주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또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주옵소서. 




Articles

2 3 4 5 6 7 8 9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