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01:01-10 여호와께서 열방의 선지자로 세운 감독자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0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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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01:01-10 여호와께서 열방의 선지자로 세운 감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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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종교에서 배제된 지역에 살던 제사장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예레미야가 부르심에 대해 두려워하자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심에 대해 약속하시고 예레미야를 세우신 뜻 곧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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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모두가 왕이라고 하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가 말씀을 맡고 전한 시기는 40년이 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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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땅 아나돗은 레위지파에게 분배된 성읍입니다. 이곳은 종교적으로 예루살렘 정통에서 배제된 지역의 제사장들이 거하던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이 아니라 정통노선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지역의 제사장에게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이스라엘(남유다)의 신앙의 현주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을 만한 자도 없고 그것을 들을 만한 이도 없을 정도의 영적 혼돈의 시기였음을 보여줍니다. 

더불어 그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의 운명도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40여년 동안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실제 예레미야가 선지자 활동을 한 시기는 40여년(유다 왕 여효야김~마지막 왕 시드기야까지)이 넘지만(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해도 친애굽파들에 의해 애굽으로 끌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서두에서 소개하는 기간은 40이라고 하는 숫자에 맞춥니다. 한 세대와 한 평생을 말하는 숫자이면서 고난의 시간이며, 이전에 모세와 엘리 그리고 다윗이 활동한 시간들도 모두 40여년입니다. 예레미야가 갈 길도 그와 같은 선진들 곧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활동한 자라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앗수르가 멸망해가고 새롭게 바벨론이 부상하는 시기이면서, 남으로는 여전히 애굽이 위로 세력을 넓히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 그 사이에 있는 이스라엘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하늘이 아닌 주변 열강과의 외교력을 통해 생존을 위한 사활이 걸린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기간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는 오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아예 시작부터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갈 것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도 않고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일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전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예레미야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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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시기, 혼돈의 시기, 예측할 수 없는 열강들의 득세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할 이들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혼돈의 시기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분주하고 혼란스럽고 어렵고 힘든 세월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우선순위는 위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이 가장 소중한 우선순위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우리를 기억하시고 말씀하시며 다스리고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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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도움글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cf. 11:21-23; 29:27; 32:7-9)은 베냐민 지파의 영역에 속한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대략 5km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21:18에 의하면 아론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성읍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cf. 대상 6:60). 다윗의 후계 자리를 놓고 아도니야와 솔로몬이 다툴 때 아도니야 편에 섰던 아비아달(왕상 1:7)은 왕위에 오른 솔로몬에 의해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당했습니다(왕상 2:26-27). 엘리가 제사장으로 활동했던 실로 성소의 운명에 관한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7:12-15; 26:6, 9) 예레미야의 집안이 아비아달의 후손에 속하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복수로 사용된 ‘제사장들’은 아나돗에 많은 제사장들이 모여 살았음을 시사해줍니다. 예레미야의 아버지 힐기야는 요시야 왕 때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이를 사반에게 주었던 제사장 힐기야(왕하 22:8)와 이름만 같을 뿐 서로 구별되는 인물입니다. 예레미야가 제사장이었는지 또는 단지 제사장 가문에 속할 뿐이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제사장으로 활동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의 선포에는 에스겔의 경우와 달리 특별이 제사장적 전통에 속하는 언어나 개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문체나 표현 또는 내용 어디에서도 제사장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름 ‘예레미야’의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야훼께서 기초를 놓으셨다” 또는 “야훼께서 높이셨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2-3절은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활동했던 기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줍니다.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은 주전 627/6년에 해당합니다. 곧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주전 639-609)이 주전 622년에 종교개혁을 시작하기 전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시드기야 왕 십일년’은 주전 587 또는 586년이 되기에 예레미야는 대략 40년간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머리글에는 요시야의 왕권을 삼 개월 간 계승하였던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 사후에 왕위에 올라 잠시 통치하였던 여호야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들의 통치 기간이 짧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유다가 멸망한 이후의 활동(40-44장)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했던 예언의 핵심적 내용이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유배에서 모두 성취되었기에 유배에 관한 언급으로 대체했던 것 같습니다. 40년의 긴 기간 동안 말씀을 전했지만 요시야 시대에 관한 언급은 매우 단편적으로 등장합니다(cf. 3:6; 25:3; 36:2). 예레미야서에 수집된 대부분의 말씀은 여호야김(22:18; 25:1; 26; 35:1; 36; 45:1; 46:2)과 시드기야(21; 24:8; 27; 32; 34; 37; 38; 39; 51:59; 52:1)가 왕으로 활동할 때 선포되었던 예언들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후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기를 거절하고 유다에 남습니다(40:4-6).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의 총독으로 세운 그다랴가 다윗 가문에 속한 자들에 의해서 암살당하자(41:1-3) 가나안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그의 충고를(42장) 무시하고 예레미야와 그의 동료 바룩을 강제로 데리고 애굽의 다바네스로 내려갑니다(43:6-7). 애굽에서도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활동하지만(43:8이하) 그의 종말에 관해서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애굽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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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절 말씀을 맡은 자는 여호와께서 지으시고 성별하시고 세우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알았고, 태어나기 전에 성별하였고,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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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우리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도 여호와시고, 생명을 허락히신 분도 여호와이시며, 우리를 지으신 이유도 여호와께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소개하는 내용이 그의 출생과 거룩하게 구별하심과 부르심 곧 여러나라의 선지자로 세우심 모두 여호와를 기준으로 하는 예레미야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내용과 방향은 여호와를 중심으로 세워질 때 온전한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되시는 주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과 삶의 내용과 살아갈 이유와 소망은 흔들리고 희미하고 갈바를 알지 못하는 어둠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가 이러한 여호와를 중심으로 하는 분명한 정체성과 사명을 깨닫길 원하셨습니다. 지금 이 고백은 예레미야의 고백입니다. 자신을 부르시는 여호와에 대한 회상과 고백을 통해서 말씀을 맡은 자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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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를 주님의 몸된 성전 곧 교회로 세우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택하심과 구별하심과 사명주심을 통해서 우리는 온전한 인간, 사명을 가진 인간, 비전을 품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지으신 분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서 세상과 구별되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원하는 하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온전한 하늘시민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자기 정체성의 확립과 삶의 이유와 소망을 품을 수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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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절 나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보내고 명령하시고 주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예레미야는 슬퍼하고 두려워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보내고 명령한대로 말하라고 함께 할 것이니 두려워 말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고 그렇게 여호와의 말을 예레미야에게 맡기셨다는 퍼포먼스를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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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실존 앞에 선 인간의 첫번째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부르심 앞에는 한없이 부족함을 느끼는 아이가 됩니다. 예레미야도 지금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아이라 하지 말라 합니다. 어딜 가든지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서 주님이 명령하신대로 말씀 주신대로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확신할 수 있도록 여호와께서 친히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술에 대시며 여호와의 말씀을 예메이야게 주셨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입술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결국 상징적 의미로 보입니다. 지금 예레미야의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사실과,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주신대로 전해야 하며,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능력 주셔서 말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가감하지 아니하고 정직하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입술에 닿음이 정결과 정직과 약속에 신실함과, 여호와의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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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들은 주의 말씀에 겸손과 두려움과 경외가 있는지 돌아봅니다. 또한 말씀을 맡은 자로서 선포한 말씀 전에 여호와 앞에서 나의 부족함과 두려움은 가지고 있는지도 돌아봅니다. 그러므로 주의 손이 우리의 입술을 주장하시길, 그 이면에 진행될 가르침에 깊이 귀 기울여 주의 말씀을 가감없이 듣고, 전하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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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절 묵은 땅을 완전히 새롭게 기경해야만 새 희망을 심고 건설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여러나라 왕국의 선지자로 세워서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새롭게 건설하고 심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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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다스림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열방입니다. 당대 앗수르와 바벨론 그리고 애굽까지 모두가 자신들의 세상을 지배하고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격변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나라와 왕국들 위에 세우셔서 모든 열방의 흥망성쇠를 주관하고 계심을 또한 미리 전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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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묵상 말씀, 또 말씀을 맡은 우리가 전하는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에, 그리고 우리 나라 안에서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릴 것들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감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게서 변혁, 개혁, 혁신, 회개, 결단, 부인할 것이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다시 건설하고 심을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빚어지길 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사는 거듭난 인생으로 사는 우리가 오늘 함께 심고 건설할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천국의 씨를 뿌리고, 개인적 가정적 교회적인 공동체 내에서도 우리가 뽑아 버리고, 파괴하고, 파멸시키며, 넘어뜨릴 것에 대해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내 삶에 기경해야 할 묵은 땅과 쓸모없는 잡초와 같은 것들을 충분히 찾아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심고 세워야 할 것은 주의 나라와 의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의와 공평과 진리 그리고 사랑으로 심고 선한 열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고 추수할 날을 고대하며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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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0(예레미야의 소명기사) - 도움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이 단일한 집단이 아니며 또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도 다양하지만, 중재자로 부름을 받는 특별한 신적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관계에 들어간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제사장들이 제사장으로 태어남에 반하여 일반적으로 예언자들은 삶을 살아가는 도중에 하나님에 의하여 예언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특정 시점에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분 말씀의 전달자로 택함을 받는 경험을 통해 예언자가 됩니다. 예언자의 소명체험에 관한 기사는 아모스 7:15의 간략한 언급을 제외한다면 이사야(6:1-13), 예레미야(1:4-10) 그리고 에스겔(1:1-3:15)과 같은 대예언자들에게서만 발견되지만, 그렇다고 다른 예언자들에게는 그러한 체험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적 자의식의 밑바탕을 형성하는 소명체험은 ‘예언자 됨’의 전제조건에 속하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지는 경우가 차라리 예외적입니다. 대예언자들의 경우는 아마도 이들이 선포한 말씀들이 수집되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소명기사는 파견과 선포의 신적 정당성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뒤따르는 말씀을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도록 도와줍니다.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사건은 신적 사건에 속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고, 그분 말씀의 선포자로 파견을 받습니다. 이 신적 체험은 일반적으로 자아를 상실하는 황홀경(ecstasy)의 체험하고는 구별됩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초자연적 사건이기는 하지만 기계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예언자는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부르시는 분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생각을 이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름을 받는 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예언자로 선택해서 파견하는 사건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도로 이뤄집니다. 부름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수동적으로 응답할 뿐입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소명기사의 구조는 신적 대면(4절), 사명의 위임(5절), 예레미야의 거절(6절), 하나님에 의한 이의제기의 거절(7절), 도움의 약속(8절), 표적 행위(9절), 사명의 재위임(10절)으로 이뤄집니다.

4절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사건은 신적 사건에 속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고 그분 말씀의 선포자로 파견을 받습니다. 예언자적 실존의 근본 토대를 형성하는 이 신적 체험은 일반적으로 자아를 상실하는 황홀경(ecstasy)의 체험하고는 구별됩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초자연적 사건이기는 하지만 기계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예언자는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부르시는 분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생각을 이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6절).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의 말씀’은 환상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사용됩니다(cf. 11-16절).

5절 중심단어 - 예언자로서의 출생, 민족들의 지도자 : 예레미야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언자로 택함을 받습니다. 그는 야훼에 의해 그분의 사명을 감당할 예언자로 지음을 받습니다. 그는 생애의 어느 단계에서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언자로 태어납니다. 예레미야의 존재와 삶이 그의 예언자적 사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에게 예언자 직분은 그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10절의 ‘오늘’은 단지 예언활동의 공적 시작을 보여줄 뿐입니다. 개인적 실존을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소명은 다른 예언자들과 구별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의 범위와 역할도 그의 예언자적 실존에 일치하여 보편적으로 확대됩니다. 예레미야는 단순히 예루살렘과 유다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선지자’(민족들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다. 그는 야훼에 의하여 민족들과 나라들 위에 세워져서 이들을 파괴하고 또 건설하는 자가 됩니다(10절).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가 유다의 좁은 범위를 넘어 세계사적으로 확대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민족들의 역사와 운명을 결정하시는 유일한 분임을 시사해줍니다.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적 차원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소명은 이스라엘의 예언전통에 상당히 예외적입니다.

6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지 못합니다. 그는 능력과 자격이 없음을 이유로 신적 소명을 거절합니다. 그의 부정적 반응은 물론 형식적-의례적 차원에서 나온 예의 바른 말(겸손)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한계와 사명의 위험성과 어려움에 관해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합니다. 예언자의 직분은 명예와 권위가 주어지는 영광스런 자리가 아닙니다. 예언자는 개인적 삶을 즐기지 못하고 자신을 부르신 분의 의지에 따라 예상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는 기존의 모든 권리와 특권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사회의 주변부에서 고독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거절 이유가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면, 예레미야는 아직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나이에 예언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7절 예레미야의 거절은 하나님에 의해 수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니은 예레미야의 이의제기를 인정해주지 않으시고 명령하시는 분으로 그에게 사명을 위임하십니다. 예언자의 소명과 파견은 하나님의 결정에 속하는 것으로, 개인이 사사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또 개인의 자격에 의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의 결정은 일방적이고 절대적이기에 그 근거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야훼의 명령이 매우 포괄적으로 주어집니다. 그분께서 예레미야를 어디로, 또는 누구에게로 보내는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보냄을 받는 이사야(6:9-10)나 에스겔(2:3; 3:4)과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집니다. 예레미야는 야훼께서 보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야 합니다. 예언자의 활동영역이 예루살렘과 유다로 한정되지 않고 야훼의 주권에 맡겨집니다. [이런 면에서 ‘민족들의 예언자’라는 표현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레미야가 선포할 말씀의 내용이 매우 포괄적으로 언급됨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6:9-11)와 에스겔(2:10)이 심판예언자로 부름을 받는데 반하여 예레미야는 폭넓게 말씀의 대변자로서 보냄을 받습니다. 그는 야훼의 명령에 따라 주어지는 말씀을 - 그것이 심판의 말씀이든 또는 구원의 말씀이든 - 전하는 자입니다.

8절 예레미야의 이의제기가 일부 수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불러 보내시면서 그에게 도움을 약속하십니다. 예언자의 사명 완수는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두려운 일로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사회적 고립을 경험하는 것은 일반적입니다. 열매가 없기에 좌절을 겪기도 하며, 때로는 신체적 위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예언자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만 의지하며 어둠의 현실을 뚫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수행하는 중에 직면하게 될 적대적 환경으로부터 구해 줄 것을 약속하시지, 어려운 상황이 닥치지 않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함께 하신다(임마누엘) : 하나님의 함께하심? 예수님과 함께하심, 제자들에게도 함께하심, 우리는 함께하심에 대해 밝은 의미로만 바라봅니다. 성경에 함께하심은 결코 밝은 색조는 아닌 어두운 색조로 그려집니다. 예레미야와 무엇을 함께한다는데... 말씀을 전하면 다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못느낍니다. 그러나 반전으로 깨닫게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9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만한 개인적 능력이 없는 예레미야가 어떻게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변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는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뿐만 아니라 이를 수집하여 모아놓은 예레미야서에 신적 권위를 부여해줍니다. 5절이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특별한 실존적 관계를 주장한다면 9절은 말씀 선포에 있어서의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일치를 보여줍니다. 후에 예레미야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15:16)라고 고백합니다. 예레미야의 입술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불’이요 ‘반석을 쳐서 부서뜨리는 방망이’(23:29; cf. 5:14)입니다.

언어 능력이 부족하다고 거절하는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만들어 주는 9절의 표적행위와 표상적 일치를 보여주는 표적행위들이 다른 예언자들의 소명기사에도 등장합니다. 이사야의 표적행위(6:6-7)에서 한 스랍이 부집게로 제단에서 취한 타는 숯을 손에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며 그의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합니다. 표상에 있어서는 얼마간 차이가 있지만 기능과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한 표적행위(2:8-3:3)를 에스겔도 소명 받을 때 경험합니다. 야훼께서 손을 내밀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에스겔에게 주면서 이를 받아먹으라고 명하십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경우는 예언자의 직무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신적 권위를 부여해 줍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표적행위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이들의 예언활동 전체를 지배하는 포괄적 사건입니다.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순간에 이들에게는 앞으로 선포하게 될 모든 말씀의 신적 권위에 관한 보장이 주어집니다. 이들의 표적행위에는 야훼의 참된 예언자로서의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대한 평가가 이미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말을 하는 거짓 예언자들과 달리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만 전하는 참된 예언자들입니다.

10절 야훼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민족들과 왕국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하는’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여기에 부정사로 사용된 일련의 동사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예레미야서에 거듭 사용되는데(cf. 12:17; 18:7, 9; 24:6; 31:28, 40; 42:10; 45:4), 이 때 언제나 야훼가 주어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10절에 사용된 동사들은 야훼께 속한 세상의 통치권이 예레미야에게 위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세상이 이제 예레미야의 [말씀 선포에 의한] 통치적 권위 아래로 옮겨짐으로써 그의 활동 범위와 능력에도 세계사적 지평이 주어집니다. 예언자는 단순히 말씀의 선포자가 아닙니다. 말씀의 선포를 통해 민족들을 멸망시키기도, 또 나라들을 세우기도 하는 능력이 그에게는 주어집니다. 그는 온 세상의 심판자이며 동시에 구원자가 됩니다.

내용상 10절은 5절의 ‘민족들의 예언자’에 대한 구체적 설명입니다. ‘민족들의 예언자’로서의 예레미야의 역할을 부가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민족들의 예언자’로 태어난 예레미야는 10절에서 민족들과 왕국들의 예언자로 선포됩니다.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예레미야는 야훼에 의하여 선재적(先在的)으로 선택되었기에 생애의 특정 시점에(‘오늘’) 다시 사명을 위임 받아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 하나님의 왕권을 예레미야에게 위임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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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소외된 자를 돌아보시며,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

어려운 시기 시대 상황속에서도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과 듣는 귀와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날마다 서는 말씀 앞에 경외와 겸손과 지혜를 더해 주옵소서.

그리고 주께서 우리의 입술에 친히 손을 대 주셔서 

우리의 말과 행실에 정결함과 능력과 진리를 담아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내용과 방향을

주의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닫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기억하면서 

나와 교회와 소속된 공동체와 이 민족에게서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려야 할 부분

그리고 건설하고 심어야 할 부분들을 알아

부지런히 변혁해 갈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의 믿음 

허락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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