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03:19-29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 (1) - 아브라함의 자손

by 웃는사람 posted Sep 0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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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03:19-29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 (1) - 아브라함의 자손


바울사도는 이제 율법을 주신 목적과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설명하며,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존재의 당위성과 역할을 정리하고 다시한번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세 번째 논증을 정리합니다. 


* 두 번째 주요 주제에 대한 변론(2:15~4:11)

 1. 논제(2:15-2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함)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

  2. 4가지 논증(3:1~4:11)

    1) 현실 경험 : 새 사람 됨(3:1-5)

    2) 언약 인물 : 아브라함 언약의 아들들 됨(3:6-14)

    3) 시간 순서 : 그 언약의 때 순서(3:15-29)

    4) 신분 상태 : 종 vs 아들(4:1-11)

  바울은 이제 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바른 복음이 무엇인지, 율법(환유, 제유)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거짓 교사들의 다른 복음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 갈라디아교회에게 언약과 연관된 네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 19-20절 율법은 죄의 죄됨(자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의 범법함으로 말미암아, 천사들을 통해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풀어 주어진 것으로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 있을 것입니다.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닙니다. 

율법이 왜 있어야 하는지, 왜 주어졌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바울은 율법은 범범함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법 곧 기준이 있어야 죄를 확정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죄됨 곧 무엇이 죄인지 규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약속의 자손이 오기까지 있을 것입니다. 

20절 말씀은 딤전 2: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보면 우선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갈등을 일차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곧 중보자 예수님은 이 둘 중 어느 한편만 위한 중보자가 아니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다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 것이지, 율법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 이 일을 위해 오신 중보자의 신실함(믿음)이 마침내 의를 얻게 하는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이루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분이십니다. 


# 21절 율법은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살리는 율법주의) 죄를 알려준다.

그렇다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율법이 살리는 것이라면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속이 먼저이고 율법이 뒤에 주어진 것이라면 앞의 약속과 충돌되는 것인가? 그래서 불연속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에 대하여 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당대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생각한 것에 대해서 ‘살게 하는 율법’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율법주의(라고 쓰고 행위 구원론자로 이해한다)와 새관점 학파의 주장대로 언약적 신율주의(언약 자손으로서 이미 의로운 백성이기에 율법은 거룩한 백성의 유지와 표지로서 또는 언약 백성으로 그 안에 머무르려고 은혜와 선택을 강조하며 머물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를 포함하여 결국 율법이 의롭게 해주고 자신들을 살려 준다고 생각하는 ‘살리는 율법주의’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1은 그래서 당대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살리는 율법주의’로 대부분 공통분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살려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법)이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라는 것을 계속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상반되는 개념으로서 ‘믿음의 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롬 3:27). 그리고 이 ‘믿음의 법’을 상징하고 요약하는 표현으로 ‘믿음’(헬라어로 ‘에크 피스테오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말 번역에는 믿음에 대해서 세 가지 용법들을 구분 없이 ‘믿음으로’라고만 번역되어 통상적으로 예수를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해석하다 보니 여러 부분에서 앞뒤가 모순되거나 어색한 해석들이 난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국 율법(유대인들은 율법이 자신들을 살려준다고 생각하여, 살리는 율법주의로 이해합니다)이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려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 22-25절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믿음(의 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 

율법이 살리는 기능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가? 먼저 율법은 죄를 알려 주고 죄 아래 우리를 가둡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2절).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23-25절). 

먼저 율법은 소극적으로 죄를 드러냅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율법이 여러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율법은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를 몽학선생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롬 7장 - 죄가 드러나 사망에 이르는 것). 결국 율법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죄를 알려주고 그것이 드러나면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망하게 됩니다. 이 곤경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면서 율법을 진정으로 아는 자는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그래서 롬 7:24은 인간 내면의 싸움이 아니라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곤고한 외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기능, 가리키는 기능이 있습니다. 23-25절에 나오는 네 개의 ‘믿음’은 모두 ‘믿음의 법(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해석하면 모두 이상한 말이 됩니다. 믿음의 주체도 뜻도 은혜로 앞뒤가 맞지 않게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도 이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모든 믿는 자들은 이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 새 피조물, 새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말미암아 곧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이 나타나기 전과 후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적용되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라도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으면 율법에 매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율법에서 풀리게 됩니다. 자유케 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바울은 사실 아브라함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이 그것으로 의롭다 하기 때문에 믿음(의 법)이 적용된 후로 볼 수 있습니다(여기서 믿음이 오기 전과 후는 첫째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후의 대비도 아니고, 둘째 그리스도가 오기 전과 후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의 법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이 나타나기 전과 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사건이 적용된 전과 후를 말합니다. 이는 신약뿐 아니라 구약에도 동일하게 예수님의 사건이 적용됩니다(이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신약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진노아래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거듭나게 역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시니 이를 은혜라 하고 우리의 반응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모두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도 공로도 그 어떤 것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전적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것입니다. 


# 26-29절 (최종정리)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제 바울은 바른 복음에 대한 주요 주제를 논증하는 가운데 세번째 논증을 정리합니다.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고 말합니다. 지위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선포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칭의, 하나님 나라, 의의 소망)을 이을자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 백성, 새 이스라엘, 새 사람, 새 피조물, 새 인류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예수님과의 연합을 염두한 표현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 모두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말합니다.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시 사는 것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라면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 곧 새 이스라엘, 새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을 따라 살게 되고 이어가게 됩니다. 그런 우리의 신분의 변화와 하나님의 은혜를 잘 이해하고 믿고 누리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 거둠의 기도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아래 있던 우리를 구원하사

자유케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선한 백성되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소유로, 주님 나라의 백성으로, 주님의 자녀로
유업을 이을 자로 든든하게 설 수 있게 하옵시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 주를 따라 온전히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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