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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07-01-09> 유다의 머리이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사야 통해 아하스에게 주전 734-732년의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전야에 준 두 개의 말씀(1-9절, 10-17절)중 첫 번째 말씀입니다. 반 앗수르 동맹국의 침공을 두려워하는 아하스와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하며 그들의 일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주전 734-732년; cf. 왕하 16:5+7-9)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표현으로, 주전 734-732년 어간에 시리아의 다메섹과 에브라임의 사마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침략한, 또는 위협한 전쟁을 가리킨다.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Tiglath-Pileser) 3세(745-727)는 주전 740년에 시리아의 북부지방을 합병하고 주전 738년에는 하맛을 점령하여 멸망시킨다.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자리 잡은 대부분의 나라가 앗수르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친다. 주전 734년에는 가나안의 서부 해안 평야에 있는 블레셋의 가사가 점령당한다. 

경제적 형편에 비해 과도하게 강요되는 조공은 이들 나라들로 하여금 앗수르에 반기를 들게 만든다. 다메섹의 르신을 중심으로 아람 국가들과 이스라엘이 반(反)앗수르 전선 구축을 시도한다. 다메섹의 르신과 사마리아의 베가는 반 앗수르 동맹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유다 왕 아하스를 끌어들이기 위해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위협한다(주전 733년).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유다의 아하스는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펼치고 있었던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하스는 앗수르의 도움(?)으로 눈 앞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대가로 유다는 거의 한 세기 동안 앗수르의 무거운 굴레를 져야만 했다. 아하스는 작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더 큰,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을 유다의 안마당으로 끌어들였다. 

주전 733년에 원정을 떠난 앗수르는 다메섹을 우회하고 먼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북쪽과 동쪽의 비옥한 지역(이스르엘 평지, 갈릴리, 해안평지, 요르단 동부)을 빼앗아 앗수르의 변방으로 만든다. 이스라엘은 아마도 베가(735-732년)가 앗수르에 항복함으로써 멸망은 면한 것 같다. 

디글랏빌레셀은 다음 해인 주전 732년에 다메섹을 점령하고 폐허로 만든다. 반앗수르 전선에 가담했던 국가들은 혹독하게 징계를 받는다. 시리아의 맹주(盟主)를 자처하던 다메섹은 완전히 멸망 당하고,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사마리아와 에브라임 산지만 남겨진 이스라엘은 군소국가로 전락해 간신히 목숨만 연명한다. 


# 1-2절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은 아람과 이스라엘의 반앗수르 동맹에 참여하기를 거절한 아하스를 징계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습니다(왕하 16:5). 그런데 르신과 베가의 연합군은 예루살렘 침공에 실패합니다. 하지만 유다 왕과 백성들은 이 동맹 소식에 공황에 빠집니다. 그래서 바람 앞에 흔들리는 숲의 나무처럼 아하스와 그의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예언자로 활동했던 이사야는 일관하여 오직 하나님께 의존할 것을 주장했지만 예루살렘 왕궁의 정치가돌에 의해 거절당했습니다. 위기의 실체를 보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당신 백성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지만 눈앞의 현실에 마음을 빼앗긴 자들에게 그분의 약속(7:1-17)은 너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당시 유다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이스라엘을 상대하기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전면전을 시도하지 않았겠지만 군사 동맹만으로 약소국인 유다는 심각한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거기다 앗수르에 대해서 전통적으로는 친애굽적이었기에 친앗수르와 반앗수르 사이에 내부적인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하시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위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그의 백성’이라는 표현도 여호와와 유다 사이의 간격을 보여줍니다. 유다 백성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아하스 왕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

우리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와 국제정세 속의 위치는 유다와 유사한 면이 많습니다. 다라서 외교적 정책들을 보면 참으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준을 갖고 비기독교 국가의 정부를 향하여 극단적인 판단과 비판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작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대입해야 할 포지션은 혼돈스런 세상 속에 살아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지금 외부적으로 교회를 향한 비난과 유혹과 염려를 한몸에 받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도 좌우 보수와 진보 그리고 신학적 성향에 있어서도 참으로 다양하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 중에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서로 정죄하고 비난하다 보니 내우외환이 현실입니다.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이 이러한 현실 속에서 친앗수르와 친바벨론 사이에서 갈등하며, 외부적으로 오는 연합군의 공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현실과 삶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그런 속에서 지금 우리가 두려워하고 요동치는 것은 내외부의 위협과 문제들인지 아니면 이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주초를 반석위에 지은 집, 시냇가에 심은 나무, 주의 백성, 말씀의 사람, 성령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의 내외적 위협과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세상보다 그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 우리와 세상 모든 나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역사하심의 시간들이 하나님의 시간을 따라 진행되는 것이기에 그 뜻이 이루어 질 때까지 인내로 경주하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믿음입니다. 


# 3-6절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유일한 소망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에게 신탁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함께 갈 사람과 만날 장소를 지정해 주실 때에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을 데리고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로 가서 신탁을 전하라 합니다. 

신탁의 내용은 삼가며 조용하고 두려워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아무리 쳐들어와도 그들은 연기나는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악한 꾀로 아하스를 대적하여 쳐서 쓰러뜨리고 무너뜨리고 다른 왕을 세운다고 협박합니다. 

*

예언자가 아들과 함께 가라는 것과 예언자 부자가 함께 왕을 만난 일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왜 여호와께서 아들 스알야숩을 데려가게 했을까요? 스알야숩의 이름은 “남은 자가 있어서 돌아올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10-17절에는 임마누엘이라는 아이의 이름, 8:1-4에서는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아이의 이름이 연속으로 나옵니다. 뒤에 나오는 두 이름은 시리아와 에브라임의 패배를 상징합니다. 아하스가 다윗왕조를 허락하고 보호해주신 여호와를 전적으로 진뢰하지 않으면 유다에게도 스알랴숩과 같은 패배가 임하게 됩니다. 아하스의 선택 여부가 스알야숩의 의미와 역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스알야숩은 유다나 에브라엠의 패배 모두 가능한 해석입니다. 우선 스알야습은 7절과 관련해서는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패배를 상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9b절과 관련해서는 아하스 왕에게 주는 경고가 됩니다. 

우선 윗못 수로에서의 만남은 예루살렘에 샘물이나 지하수가 없기에 물의 확보가 성을 지키는데 중요합니다. 그 끝에서 여호와의 신탁을 전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다윗왕조의 생명수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잘못된 길을 가는 아하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선택된 장소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군사시설에 의존하려는 아하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세탁자의 밭은 다시 가죽을 세척하는 일에 물이 많이 필요하기에 물가에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던 곳입니다. 

더불어 아하스에게 전해진 신탁은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에서 당혹감에 빠진 아하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4-9절). 적들을 두려워말고 침착하게 대응하고, 아름과 이스라엘 연합군은 부지깽이에 불과할 뿐이고 그 운명 또한 화로나 아궁이에 버려지는 것과 같은 존재이기에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

삼가며 조용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등의 말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전쟁에 나가려고 군대를 소집할 때나 전쟁터에서 싸움을 앞두고 용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들입니다. 눈앞의 상황에 사로잡혀 공황에 빠지지 말고, 이를 직시하며 그 배후에 있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윗못과 세탁자의 밭처럼 우리 나름대로 세상의 힘을 빌고 위협하며 연대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도움을 주시며 말씀하시는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열왕들이 악인들이 악한 꾀로 대적하고 위협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 땅의 왕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왕들도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세워지는 것이지 인간들의 악한 꾀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눈앞에 보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허락하심이 있어야만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 7-9절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머리 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단호하게 무조건적인 구원약속을 선포하십니다. 연합군들의 악한 꾀와 왕을 세우는 일은 결코 서지 못하고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계획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8-9절에서 설명합니다. 아람, 다메섹, 르신, 에브라임, 사마리아, 르말리야의 아들 등으로 그 주도권이 스스로에게 있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그 계획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9절 하반절에서 조건절로 여호와를 굳게 믿을 때에 비로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9절의 말씀은 사무엘하 7장의 나단의 신탁에 "네 집과 내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ef. 시 89:3-4, 23, 38) 연결됩니다.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어진 무조건적인 약속을 상대화시켜 이를 조건적 약속으로 재해석한 말씀입니다. 다윗 왕조의 미래는 여호와께 대한 왕의 신앙적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다윗의 집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위기의 한복판에 여호와께서 계심을, 그분만이 이 위기로부터 구해주실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향한 전적 신뢰에 약속에 신실하실 것입니다. 

*

위기에 직면하여 자신의 능력과 자원의 한계를 인정하고 구원과 생명이 되시 는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역사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반석이신 여호와께 의존하는 자는 나무를 뒤흔드는 폭풍우가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역사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더 믿을만하다고 하나, 전쟁은 현실과 비현실간의 간극이 작습니다. 그러니 목전의 위협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기다리며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구합니다. 


# 거둠의 기도

모든 나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열왕들의 득세와 위협속에서도

두려워하며 흔들린 믿음없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더불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뢰하고 의지하며 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 주옵소서. 

눈에 보이는 허탄한 길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더 의존하려 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

삼가 조용히 주님을 기다리면서

어떤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치 않는 믿음 주옵소서. 

우리를 악한 꾀로 유혹하는 것을 분별하여

믿음으로 인내하게 하옵소서. 

악인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을 멸하시고

모든 계획들을 주의 뜻을 따라 이루심을 믿으며

모든 열방의 주되시는 주님을 굳게 믿으며 살 때

주께서 온전히 세워주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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