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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01:01-20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이사야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에 대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과 상실 곧 타락 그리고 다시금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전하게 세워지길 바라는 신탁을 전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팽창으로 당시 가나안과 고대 근동이 격동하던 시기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지난 200여년을 지내오면서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지기는 커녕 이방과 다를바 없는 부정한 백성이 된 데에 대한 고발과 더불어 다시금 일어 설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문제는 자식된 도리와 피조물과 택한 백성의 도리를 망각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만홀히 여기며, 껍데기 뿐인 제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만하며 마당만 밟는 가식을 행하므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그들이 다시 선행과 정의를 행며 즐겨 순종하면 다시 약속의 백성이 될 수 있겠지만 거절한다면 멸망 뿐인진데 지금 그들의 모습은 멸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 1-3절 자식은 부모를 순종하고, 피조물은 창조주를 아는 것이 도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왕 웃시야로부터 40여년 정도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계시를 전합니다. 후대의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 통치 아래서 톱으로 잘려 죽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 아모스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후대의 랍비 전통에 의하면 아모스는 유다왕 아마시야의 형제로 예언자였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제일 먼저 유다 백성의 하나님 자녀로서, 피조물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한 행위에 대해서 고발합니다. 

*

남유다의 웃시야로부터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까지 근 40여년의 기간은 8세기 중반에서 7세기로 넘어가는 즈음입니다. 이 시기 고대 근동은 앗수르 제국의 팽창과 애굽등 주변국들과의 갈등이 요동치던 시기입니다. 무엇보다 722년에 망한 북이스라엘은 국가 멸망의 마지막으로 치닫는 즈음이고 그런 북이스라엘과 별로 다르지 않는 길로 행하는 남유다는 히스기야의 개혁이 있긴 했지만 내외적으로 순탄치 않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앗수르 제국의 팽창과 애굽을 비롯한 주변국들과의 긴장이 이스라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내외 정세 속에서도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오랜 세월동안 자녀처럼 양육하셨지만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자녀로서의 정체성에 충실하지 못하고 불순종으로 일관합니다. 짐승도 주인과 더불어 주인이 주는 먹을 것을 알고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주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지 못한채 마땅히 품고 살아야 할 행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범죄 행위에 대한 증인으로 하늘과 땅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천지가 다 아는 죄악을 이스라엘만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약속의 외인이었던 우리들을 하나님은 구속하사 양자로 삼아 우리의 안고 섬, 그리고 길과 생명을 이어갈 양식으로 먹이시고, 또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날마다 양식을 먹는 것처럼 마땅히 주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양식을 만나처럼 먹고, 그런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서, 모든 만물의 주이시며 창조주이신 주님을 알고,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의 신탁을 듣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우리와 멀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반면교사 삼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는 이사야 묵상의 여정이 되길 빕니다. 


# 4-9절 아직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범죄 사실을 낱낱히 고합니다. 범죄한 나라, 허물 진 백성, 행악의 종자, 행위가 부패한 자식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만홀히 여기고 멀리합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돌이키게 하기 위하여 주변국들로부터 점령당하고 황폐해 졌지만(5절)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7절). 결국 만군의 여호와께서 남겨주시지 않았다면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했을 것입니다. 

*

본 사건은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의 총체적 모습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701년 산헤립에 의한 유다의 점령과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에 대한 상황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깬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것도 무지나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만홀히 여김은 비웃고 조롱하고 업신여겼다는 말입니다. 지금 유다의 문제는 온 몸이 상처 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완악하여서 자신들의 무엇이 문제인지 자각증상을 느끼지 못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약속을 깬 이들은 자기 땅에서 난 소산을 먹지 못하는 저주에 떨어집니다. 

유다는 지금 이토록 총체적 난국에도 자신들을 택하고 살리고 인도하시며 이러한 위기에서 구원하실 분이 여호와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나아가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그들의 교만이 결국 여호와를 만홀히 여긴 범죄라는 것입니다. 

*

징계의 채찍은 멸망이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해 죄악된 길에서 돌이키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요 자식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만홀히 여기고 멀리 하며 찾고 두드리고 구하지도 않는다면 이는 심각한 교만입니다. 가장 큰 교만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며 가장 큰 겸손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서 날마다 주님의 선하신 뜻을 구하고,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긍정적인 태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주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오래 기다리시는 주님을 더 기다리게 하지 말고 지금 주앞에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 10-15절 예배는 무엇인가를 드림보다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다 백성들을 소돔과 고모라의 지도자와 백성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뜻(법)을 전합니다. 그들이 드린 무수한 제물을 무익하며, 여호와 앞에 제사하러 나오면서도 마당만 밟고 갑니다. 그런 제물을 가증히 여기시며, 그들이 절기마다 모이는 성회도 기뻐하지 않고, 그들의 행악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악에 대한 결과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

여호와의 거듭된 징계에도 그분을 찾지 않았다고 할 때 이들은 열심히 성전을 찾아 여호와게 제사를 드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문제 삼습니다. 여호와를 찾는 이들의 방법과 동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의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이 일치된 온전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예물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대체하고 자기 할일을 다 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고, 제의적인 종교영역 안에만 국한시키고 정작 그들의 삶의 영역에서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면서도 제 할 일을 다했다고 여깁니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으니 어려울 때에도 손을 펴 기도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것은 그들의 행실(손)에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수용할 수 없는 처지인 것입니다. 손에 가득한 피는 폭력과 불의로 이웃의 정당한 권리를 억압하는 모든 부당한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무죄하게 흘린 피의 호소를 들어주시는 분으로, 불의를 행한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의적 열심이 아니라 말씀에의 순종입니다. 성전 밖에서의 삶이 성전 안에서의 경건을 결정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삶의 자리에서 적용되고 그러한 거룩한 삶의 열매가 진정 주님의 원하시는 참된 경건이라 할 것입니다. 예배는 거룩한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달아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그 선하신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기도에 자동적으로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기도의 수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기도에 우선하는 것은 기도자의 바른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행하는 행실을 돌아봅니다.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제의에 목숨 거는 것이 아니라 허락하신 삶의 자리가 예배자로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으로 점철되어져서 공동체 예배와 개인의 예배와 삶의 예배가 일치된 온전한 예배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로 바르게 설 수 있길 기도합니다. 


# 16-20절 하나님은 더 많은 예배가 아니라 선행과 정의를 실현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소극적으로는 악을 제거하고 적극적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약속대로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겠지만 거절하면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 곧 선한 행실은 결국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들을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이들을 향한 처우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의 유무를 판결하는 시금석입니다. 

18절 말씀은 “자 오너라. 우리가 (법적으로) 따져보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희의 죄가 심홍색과 같은데 눈처럼 희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진홍 같이 붉을진데 양털과 같을 수 있겠는가?” 라고 의문문으로 변역하는 것이 본문의 의도와 맞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의적인 행위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를 자기기만으로 평가절하합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길만이 약속의 백성이 먹을 수 있는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우리의 헛된 열심과 헌신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그 통치와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 곧 하나님을 통해서만 거룩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선행, 정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이라는 사실은 공평과 정의의 나라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입니다. 그 큰 사랑이 스스로 설 수 없고, 정결케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떠나 소외된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도울 때마다 우리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겸손히 주의 길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외된 자들을 섬기는 것은 결국 함께 사는 길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며, 약속의 선물을 받아 누리는 삶입니다. 


# 거둠의 기도

우리는 나라와 백성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고

헛된 것 속에서 우리의 안녕을 추구한 어리석음과

우리의 도움이신 주님앞에 기도하지 않는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종교적 제의로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하며

정작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정의를 행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악착같은 탐욕을 

애써 경건으로 가장하며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가는

우리의 모습 또한 참회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행해야 할 주의 뜻을 기억하고

약속의 백성으로 합당하게 행할 수 있길 원합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의 길이 아니라

약속의 열매를 맛본 믿음의 선진들의 길로 행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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