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7-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by 웃는사람 posted Feb 1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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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7-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 만에 베다니에 방문하여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를 만나 오라비가 살아날 것과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선포하시고 마르다를 위로하십니다.


17-19절 우리 삶이 고통과 눈물로 얼룩져 위로가 필요한 인생임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와보신 베다니 나사로의 집은 모든 소망이 끊긴 상태입니다.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의 시간은 이미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며, 평화의 집이라는 예루살렘에 가깝지만 ‘베다니’는 고통과 빈민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곳으로 상대적으로 더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위문하러 온 이들이 많을 수록 그 절망은 더욱 확실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공간에 주님이 오셨고, 보셨으니 이제 주님이 일하실 시간입니다.


20-22절 주님을 아는 만큼 의뢰하는 간구의 제목은 달라집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곧 나아가 맞이하며, 주님의 부재가 아니었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아쉬워하면서 이제라도 주님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면 이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치유하시는 주님은 알았으나 죽은 이를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이요 생명되신 주님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오라비를 살려 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애둘러 의뢰합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믿는 만큼만 구할 수 있고 의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지혜와 능력과 섭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뛰어넘는 분이심을 알 때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간구를 드릴 수 있습니다.


23-24절 삶의 변혁과 결단 그리고 행동하지 않는 신앙 고백은 진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라비가 다시 살아 나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줄 안다고 고백합니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통상적인 위로의 말슴 정도로 듣고 있습니다. 지금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는 말씀을 습관적으로 대하며 자포자기하듯 역사 없는 앎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 우리 삶을 변혁 시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그런 삶의 기대 없이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 신앙을 진부하게 하고 퇴보와 고착으로 귀결 시킵니다.


25-27절 부활이요 생명이며,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부활하실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직설법으로 ‘나는 부활이라’ 말씀하십니다. 죽음의 지배는 끝이 났고 지금 생명과 부활과 살림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부활이 우리 삶이 끝난 후의 가상현실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실제 현실이 되는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의 고백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오늘 선 자리에서 부활과 생명의 삶을 실제로 누릴 수 있길 원합니다.


* 기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부활에 대한 산 믿음과 생명의 믿음을

오늘 우리가 선 자리에서

실제 현실로 고백하고 살고 믿고 누리고 증거케 하옵소서.


<도움말>

* 베다니 : 히브리어로 ‘빈민의 집’, 아람어로 ‘고통의 집’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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