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06:01-07:01 역설적인 삶을 사는 성도 : 지금 받은 은혜로 넓고 거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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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고린도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하며, 이사야의 약속을 들어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선포합니다(1-2절). 이어 자신이 환난과 매 맞음과 굶주림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견뎌 온 길을 '같으나'의 역설로 펼쳐 보입니다(3-10절). 그러고는 마음을 넓혀 놓았으니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호소합니다(11-13절). 끝으로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니 우상과 한 멍에를 메지 말고,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붙들어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자고 권면합니다(6: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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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을 세우셔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하시는 장면으로 끝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간청을 그대로 이어받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로 시작합니다. 화목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그 은혜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가 오늘의 물음입니다. 화해의 선언이 이제 삶의 초대로 바뀌는 자리이며, 받은 은혜가 열매로 이어지는지를 묻는 자리입니다.
# 고린도교회에는 추천서와 화려한 말솜씨를 앞세운 순회 교사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매 맞고 갇히며 가난한 바울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처럼 깎아내렸고, 성도들 가운데도 그 말에 마음이 기운 이들이 생겼습니다. 바울과 교회 사이에는 고통스러운 방문과 눈물의 편지가 남긴 금이 아직 남아 있었고, 바울은 마케도냐에서 디도가 가져올 소식을 기다리며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마음을 넓히라"는 신학의 권면이기 전에 서먹해진 영적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호소입니다.
# 오늘 본문은 2장 14절부터 이어 온 사도직 변론이 절정에 이르는 자리입니다. 이 편지에 나오는 고난 목록 가운데 두 번째가 여기 있으며, 일곱 쌍의 '같으나'가 그 끝을 장식합니다. 6장 14절부터 7장 1절은 흐름을 끊는 것처럼 보여 따로 끼워 넣은 글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넓히라"(6:13)와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7:2) 사이에 놓여, 마음을 연다는 것이 곧 새 언약 백성답게 거룩하게 사는 길임을 밝히는 한 짜임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다음 본문에서 바울은 디도가 가져온 기쁜 소식으로 넘어가며, 오늘의 호소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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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삶은 오늘의 점철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지금을 은혜 받을 만한 때로 여시고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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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 소개하면서, 고린도교회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 근거로 이사야 49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풀 때에 들으시고 구원의 날에 도우셨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두 번 "보라"고 외치며 그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이 다름 아닌 지금이라고 선포합니다. 미래의 약속이 현재의 부름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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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의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는 바울이 스스로 권위를 세우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화목의 말씀을 바울에게 맡기셨기에 그의 권면은 하나님의 권면이 됩니다. '헛되이'로 옮긴 말은 '빈 것으로', '아무 결과 없이 끝나도록'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같은 말을 자기 달음질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때(갈 2:2; 빌 2:16),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수고가 헛되지 않기를 바랄 때(살전 3:5) 썼습니다. 그러니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는 것은 은혜를 아예 받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삶에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채 끝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고린도교회로서는 십자가의 화목을 전한 바울을 의심하고 다른 복음에 귀를 여는 일이 바로 그 위험이었습니다.
2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 49장 8절은 바벨론 포로 가운데 신음하던 이스라엘에게 주신 회복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받아 줄 만한 때'에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의 날에 그들을 도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말 앞에 "보라 지금은"을 두 번 겹쳐 놓습니다. 선지자가 바라보던 그날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왔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받을 만한 때'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읽으면 뜻이 더 깊어집니다. 지금은 우리가 은혜를 붙잡을 수 있는 때이기에 앞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받아 주시는 때입니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마지막 때의 '지금'을 사는 성도에게, 은혜에 응답하는 일은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삶은 오늘의 점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먼 훗날의 약속이나 지나간 날의 추억으로 머물지 않고 오늘이라는 점 하나하나에 찍힙니다. 구원을 입은 자로 살아야 할 날도 지금이고, 그 은혜를 새로 받아야 할 날도 지금입니다. 오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루하루가 쌓여 한 사람의 삶이라는 풍경이 그려집니다. 하나님은 신음을 들으시고 도우시는 분이며, 그 세밀한 손길을 바로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펼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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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은혜를 너무 쉽게 '나중'으로 미룹니다. 형편이 나아지면 더 열심히 섬기겠다고, 아이들이 자라면 말씀을 더 가까이하겠다고, 이 일만 끝나면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라 지금은"이라고 두 번이나 부르십니다. 은혜의 때는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기로 하신 바로 지금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은 대단한 배반이 아니라 오늘을 흘려보내는 작은 미룸에서 시작됩니다. 받은 은혜가 오늘의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은혜는 기억 속의 장식이 되고 맙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오늘 아침 내가 미뤄 둔 은혜는 무엇인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미뤄 둔 사과 한마디, 식구와 함께 드리지 못한 짧은 기도는 없는지 살핍니다. 일터에서 정직하게 일할 기회, 지친 동료에게 건넬 위로를 다음으로 넘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오늘이라는 점 하나를 은혜로 찍겠습니다. 큰 결심보다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순종 하나를 붙들겠습니다.
우리교회가 '지금'을 사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언젠가 할 선교, 언젠가 할 섬김이 아니라 오늘 우리 곁에 보내 주신 이웃을 은혜의 때로 맞이하게 하옵소서. 예배와 묵상으로 받은 은혜가 주중의 삶에서 열매 맺게 하옵소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서로 깨우고 서로 붙들어 주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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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절 같으나, 보라 살아 있도다
성령 하나님은 고난의 길에서도 일꾼을 살아 있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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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의 직분이 비방받지 않도록 누구에게도 걸림돌을 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많은 인내 가운데 환난과 궁핍과 매 맞음과 갇힘과 굶주림을 겪었고,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으로 그 길을 걸었습니다. 이어서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으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는 일곱 쌍의 역설로 자기 삶을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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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의 "거리끼지 않게"는 문자 그대로 '걸림돌을 놓지 않게'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일꾼으로서 마땅히 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복음과 성도의 유익보다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4절의 "자천하여"는 3장에서 거짓 교사들이 내밀던 추천서와 대조됩니다. 바울에게는 누구의 추천서도 없었지만, 그가 겪은 고난과 그 고난을 견딘 태도가 그의 추천서였습니다. 목록은 "많이 견디는 것"으로 시작해 일반적인 고난(환난, 궁핍, 고난), 사람들에게서 받은 고난(매 맞음, 갇힘, 난동), 일상의 고난(수고, 자지 못함, 먹지 못함)으로 이어집니다. 하나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의 흔적을 닮았습니다.
6-7절은 그 고난을 무엇으로 견뎠는지를 보여 줍니다. 깨끗함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거짓 없는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 한가운데 성령의 감화가 놓여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좌우에 든 의의 무기가 그를 지켰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견딘 힘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 안에 일으키신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8절의 '영광과 욕됨',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은 세상의 평판이 오락가락해도 바울이 같은 걸음으로 걸었음을 말합니다.
8-10절의 일곱 쌍은 같은 사람을 두 눈으로 본 것입니다. 앞쪽은 비방하는 이들이 본 바울이고, 뒤쪽은 하나님이 보시는 바울입니다. 그 한가운데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가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도 "보라"를 외칩니다. 2절의 '보라 지금'이 은혜의 때를 가리켰다면, 9절의 '보라 살아 있고'는 그 은혜가 고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증거를 가리킵니다. 이 대목은 징계를 받아도 죽음에 넘기지 않으셨다는 시편의 고백(시 118:17-18)을 울립니다. 날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사람에게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는 4장의 말씀이 여기서 삶의 모습으로 증명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모습은, 부요하신 이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닮았습니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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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의 평판이 어떻게 엇갈리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은 소유와 이름값과 성공으로 사람을 잽니다. 그 잣대로 보면 복음을 따라 손해를 감수하는 삶은 늘 '같으나'의 앞쪽에 서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같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고, 이름 없는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뒤쪽을 보십니다.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십니다. 우리 삶의 역경과 좌절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 같을 때에도 이 역설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역설을 붙드는 힘은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세상의 인정과 하나님의 인정 가운데 무엇을 더 의식하며 살고 있는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고에 서운해하지는 않았는지, 일터에서 정직하게 일하다 손해를 볼 때 낙심하지는 않았는지 살핍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사람,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오늘 내 처지가 '같으나'의 앞쪽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뒤쪽을 믿음으로 바라보겠습니다.
우리교회가 역설을 살아 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작고 약해 보여도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교회, 세상의 박수가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참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섬기다 지친 지체들이 성령의 감화로 다시 일어서게 하시고, 고난 중에 있는 가정마다 "보라 살아 있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하옵소서. 우리교회의 추천서가 말이 아니라 거짓 없는 사랑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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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3절 마음을 넓히라
성자 예수님은 넓어진 마음으로 우리를 품으시고 서로 품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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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며 자기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바울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심정이 좁아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말하듯이, 보답하는 셈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부탁합니다. 오해와 의심으로 서먹해진 관계 앞에서 바울은 꾸짖기보다 먼저 자기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며, 그들도 같은 마음으로 응답하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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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의 "고린도인들이여"는 바울서신에서 드물게 수신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대목입니다. 긴 변론을 마친 뒤 바울은 목소리를 낮추고 그들의 얼굴을 봅니다. "우리의 입이 열리고"는 숨김없이 다 말했다는 뜻이고, "마음이 넓어졌으니"는 이미 활짝 열려 지금도 그대로 열려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울의 사랑은 생각과 뜻과 감정 어느 한 구석도 닫혀 있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러운 방문과 눈물의 편지, 그리고 그를 깎아내리는 소문 속에서도 바울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습니다.
12절의 '좁아지다'는 상대를 두는 마음의 공간이 줄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자기 자리가 좁아진 것을 압니다. 추천서가 없다는 말, 말솜씨가 없다는 말, 돈 문제에 대한 의심이 그들의 마음에서 바울의 자리를 조금씩 밀어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향한 바울의 자리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심정', 곧 애정을 품는 깊은 속이 좁아진 데 있었습니다. 사랑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범위가 줄어든 것입니다. 좁아진 마음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작은 흠을 크게 보며, 오래된 고마움을 쉽게 잊습니다.
13절의 "보답하는 것으로"는 서로 같은 것을 주고받는 공정한 교환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말하듯 부탁합니다. 내가 넓혔으니 너희도 넓히라는 것입니다. 이 넓은 마음은 바울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원수 된 우리를 위해 팔을 벌리신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바울 안에서 넓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갈수록 마음은 넓어집니다. 그러니 마음을 넓히는 것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또 하나의 모습입니다. 1절의 권면과 13절의 호소는 이렇게 하나로 이어지며, 바로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하시리라'는 약속(6:17)이 그 넓은 마음의 근원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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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앙의 연륜이 쌓여도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지기보다 오히려 더 좁아지는 경우를 봅니다. 사람에 대한 의심과 오해, 복음에 대한 고집, 받은 은혜에 대한 망각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옹졸하게 합니다. 그렇게 좁아진 마음은 남을 쉽게 정죄하고 비판하며 굳어져 갑니다. 이것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화해하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갈수록 더 겸손해지고, 어떤 사람이든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으로 가는 것이 바른 성숙입니다. 성숙의 증거는 아는 것이 많아지는 데 있지 않고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는 데 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지금 내 마음에 원수까지도 넉넉하게 품을 자리가 있는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식구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어느새 좁아져 있지는 않은지, 일터에서 한 번 실망한 사람에게 다시는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 하지는 않는지 살핍니다. 바울처럼 먼저 내 마음을 열겠습니다. 상대가 나를 향해 마음을 좁혔더라도 내 안의 그의 자리는 줄이지 않겠습니다. 오늘 좁아진 마음 한 칸을 주님께 내어 드리며 넓혀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교회가 마음이 넓은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해와 서운함으로 서먹해진 지체들 사이에 먼저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게 하옵소서. 처음 온 이웃과 다른 나라에서 온 지체들이 좁은 문턱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게 하옵소서.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를 향해 입을 열고 마음을 넓혀, 아버지와 자녀처럼 서로를 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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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4-7: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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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명령하고, 의와 불법,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벨리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함께하겠느냐고 다섯 번 묻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한 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구약의 약속들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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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의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매어 밭을 갈지 말라는 율법(신 22:10)을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걸음과 힘이 다른 두 짐승을 한 멍에에 매면 밭고랑이 비뚤어지고 둘 다 상합니다. 바울은 이 말로 불신자와 일상의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와 그에 따른 도덕적 방종이 행해지는 자리에 함께 묶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에는 신전 연회와 우상 제물과 음행이 일상 깊이 얽혀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자'를 바울을 깎아내리며 세상의 경쟁적 가치를 교회에 들여온 거짓 교사들로 읽는 견해도 있는데, 그들과 한 멍에를 메는 것이 곧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 두 읽기는 만납니다.
16절의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예루살렘에 돌로 지은 성전이 서 있던 때에, 바울은 성도들의 모임 자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 부릅니다. 이어지는 인용은 레위기와 에스겔과 이사야와 사무엘하의 약속들을 하나로 엮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두루 다니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언약(레 26:12; 겔 37:27), 그들 가운데서 나와 따로 있으라는 부름(사 52:11), 그리고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삼하 7:14)입니다. 바울은 다윗의 아들에게 주신 약속을 '아들들과 딸들'에게로 넓힙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을 "전능하신 주의 말씀"으로 맺습니다.
7장 1절은 "그런즉"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거룩함은 우리가 성전이 되려고 애쓰는 조건이 아니라, 이미 성전 삼아 주신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가 그의 백성으로 부름 받을 때에도 우리는 불법한 자요 부정한 자였으며 하나님 아닌 것을 아버지로 모시며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다만 주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믿음을 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할수록 예배자는 하나님을 닮아 가고, 그 닮음은 몸과 삶에 흔적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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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전을 건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함은 예배당 안에서만 지키는 예절이 아니라 우리 몸과 관계와 일상 전체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를 묶으려는 멍에가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돈과 성공을 섬기는 문화, 사람을 차별하고 경쟁으로 몰아가는 가치, 은밀한 음란과 거짓이 우리와 한 멍에를 메자고 다가옵니다. 그러나 거룩함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집답게 사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기를 힘써 싸우는 일은 우리를 아버지의 집 식구로 영접해 주신 은혜에 대한 즐거운 응답입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무엇과 한 멍에를 메고 있는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함께 보는 영상과 나누는 말 가운데 성전에 들이지 말아야 할 것은 없는지, 일터에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지는 불의의 멍에는 없는지 살핍니다. 육과 영의 더러운 것을 한꺼번에 다 씻어 낼 수는 없지만, 오늘 한 가지를 내려놓겠습니다. 의와 빛의 사귐과 주님과의 조화 가운데 깨끗하게 살라고 부르신 그 뜻에 즐거이 순종하겠습니다.
우리교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고 두루 다니시는 것이 이웃의 눈에도 보이게 하옵소서. 세상의 차별과 경쟁의 가치가 교회 안에 들어와 서로를 나누지 못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아들딸 된 기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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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은혜의 하나님,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라 하시며
오늘도 우리를 받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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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은혜를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오늘이라는 점 하나를 순종으로 찍어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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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우리를 가난한 자 같다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다 할지라도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으로
보라 살아 있다고 고백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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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아진 마음 한 칸을 주님께 내어 드리니
원수까지 품을 만큼 넓혀 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답게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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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에서도 역설적 삶을 넉넉하게 살며
거룩함을 이루는 날로 매일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