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05:01-10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 장막 집에서 영원한 집을 바라며

by 평화의길벗 posted Nov 0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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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05:01-10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 장막 집에서 영원한 집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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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음을 안다고 고백합니다(1절). 그래서 성도는 이 장막에서 탄식하지만, 그 탄식은 몸을 벗어 버리려는 한숨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으려는 갈망입니다(2-4절).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시려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고, 우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며 담대합니다(5-8절). 끝으로 바울은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 말하며,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일깨웁니다(9-10절). 소망과 책임이 한 단락 안에서 서로를 붙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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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이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이룬다는 고백으로 끝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왜냐하면'에 해당하는 접속사로 그 고백을 곧장 이어받습니다. 낡아지는 겉사람이 오늘은 무너지는 장막 집이 되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됩니다. 4장 1절과 16절에서 두 번 되풀이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이 오늘 본문의 뿌리입니다. 앞쪽이 사도가 겪는 고난을 주로 말했다면, 4장 16절부터 5장 10절까지는 그 고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말합니다.

#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는 몸을 영혼의 감옥으로 여기던 헬라의 생각에 익숙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몸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고전 15:12). 한편 바울은 아시아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환난을 지나왔습니다(1:8-9). 죽음은 그에게 책 속의 주제가 아니라 몇 번이나 문턱까지 다가왔던 현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문턱에서 쓴 고백입니다.

#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르침을 장막과 집, 벗음과 덧입음이라는 생활의 언어로 다시 들려줍니다. 바울은 천막을 만들어 생계를 꾸리던 사람이었습니다(행 18:3). 천막이 얼마나 쉽게 해지고 무너지는지를 손으로 알던 사람이 자기 몸을 장막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단락은 다음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새 창조, 화목의 직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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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부활과 삶

성부 하나님은 무너질 장막 대신 영원한 집을 지어 두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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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땅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의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음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장막에서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것은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의 탄식은 몸을 벗어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덧입으려는 것이며,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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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의 '장막'은 유목민이 치고 걷는 임시 거처입니다. 바울은 4장 16절의 낡아지는 겉사람을 이 장막 집에 빗댑니다. '무너지면'으로 옮긴 말은 장막의 말뚝을 뽑고 천을 걷어 내는 철거를 떠올리게 하며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 장막과 맞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입니다. 이 영원한 집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신자가 입게 될 부활의 신령한 몸을 가리킵니다(고전 15:44-49). 바울은 고난 때문에 부활 신앙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눈여겨볼 낱말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입니다. 예수님은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셨고, 그것은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가리켰습니다(막 14:58; 요 2:19-21). 그러니 우리가 받을 집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닮은 새 몸입니다.

2-4절에는 '탄식'이 두 번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의 탄식은 절망의 비명이 아닙니다. 그는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헬라 사람들은 죽음을 영혼이 몸이라는 옷을 벗는 일로 여겼고, 그렇게 벌거벗은 영혼으로 떠도는 것을 구원이라 불렀습니다. 바울은 그 생각을 거절합니다. 성도의 소망은 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영광스러운 몸을 입는 것입니다. '입다'와 '벗은'이라는 말은 창세기의 아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죄를 지은 아담은 벗은 줄을 알고 숨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7, 21). 첫 아담 안에서 우리는 벗은 채 죽음 앞에 섰지만, 새 창조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덧입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탄식은 해산하는 여인의 신음처럼 새것을 기다리는 기도입니다(롬 8:22-23).

4절의 마지막 구절이 이 단락의 심장입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서 이사야 25장 8절을 인용해 사망이 이김에게 삼킨 바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질서에서는 언제나 죽음이 생명을 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에서는 생명이 죽음을 삼킵니다. 바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생명이 죽음을 집어삼키는 문턱입니다. 이것이 1절의 '우리가 아느니라'가 품은 확신입니다. 그 확신은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에 대한 앎입니다(4:14). 다만 바울은 그 일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우리 시계로 다 풀어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죽은 뒤 영혼이 머무는 상태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어 두신 집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붙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막을 걷어 가시는 분이기 전에 집을 지어 두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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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너져 가는 장막을 붙들고 삽니다. 몸은 해마다 조금씩 약해지고, 거울 속 얼굴은 낯설어지며, 병원 가는 날이 늘어 갑니다. 세상은 그 무너짐을 어떻게든 늦추려고 많은 돈과 시간을 쏟으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장막은 아무리 잘 꾸며도 장막입니다. 바울은 무너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어 두신 집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탄식은 한숨으로 끝나지 않고 기도가 됩니다. 부활의 소망은 이 땅의 생을 마감할 때에나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의 현실 곳곳에서 맛보고 경험하게 하는 힘입니다. 주님은 부활을 오늘 여기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몸이 약해질 때 그것을 인생의 실패로 여기지 않았는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늙어 가는 부모님과 지쳐 가는 배우자를 볼 때, 무너지는 장막만 보고 지어지고 있는 집은 보지 못하지 않았는지 살핍니다. 일터에서 내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 조급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합니다. 무기력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 속에서도 오늘 나는 부활의 생명을 덧입은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일어나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탄식을 원망이 아니라 사모함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구하겠습니다.

우리교회가 무너지는 장막 앞에서 함께 탄식하고 함께 소망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병상에 계신 성도, 장례를 치르고 빈집에 돌아온 가족, 노년의 쓸쓸함을 견디는 어르신들 곁에 서서 하나님이 지어 두신 집을 함께 바라보게 하옵소서. 죽음을 말하기를 꺼리기보다 죽음을 삼키시는 생명을 담대히 전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장례 예배가 끝의 자리가 아니라 소망을 고백하는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의 탄식이 해산의 신음처럼 새 생명을 기다리는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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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절 성령의 보증

성령 하나님은 영원한 집의 보증이 되어 우리를 담대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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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 일을 우리에게 이루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담대합니다. 몸으로 있는 동안에는 주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합니다. 바울은 담대한 마음으로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 바람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그리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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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의 '이루게 하시고'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로 이 일, 곧 생명을 덧입는 일을 위해 빚어 오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부터 겨냥하신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확증하시려고 하나님은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말은 1세기 상거래에서 쓰던 말로, 물건값의 일부를 먼저 치르는 계약금을 뜻합니다. 계약금이 건너가면 거래는 효력을 얻고, 나머지 값도 반드시 치러집니다. 하나님은 값을 반만 치르고 거래를 물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첫 몫을 이미 우리 마음에 들여놓으셨다는 것은 남은 몫도 반드시 채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장 22절에서도 바울은 같은 말을 썼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앞으로 받을 부활 생명의 첫 몫이요, 하나님이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겠다는 서명입니다. 그러니 성령은 일부 사람들이 취했던 황홀한 체험의 영이 아니라, 무너져 가는 현실을 영원한 소망으로 넉넉히 살아 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6절과 8절에 되풀이되는 '담대하여'는 이 보증에서 나오는 용기입니다. 바울은 몸으로 있는 동안 주와 '따로 있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고향을 떠나 타향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8절의 '주와 함께 있는'은 고향 집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내려놓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지금도 주 안에 있지만, 아직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 사이에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 놓여 있습니다. 고린도의 어떤 이들은 이미 다 이루었다고 믿으며 신비한 체험에 취했지만, 바울은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을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아직의 시간을 견디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라고 말합니다.

7절은 이 단락의 한가운데 놓인 문장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여기서 '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가리킵니다. 고린도에 들어온 교사들은 화려한 외모와 말솜씨와 체험으로 사도를 평가했고, 바울의 초라한 몸을 업신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런 눈으로 걷지 않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음으로 보며 걸어갑니다. 어제 본문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한다고 한 고백이 오늘은 걸음이 됩니다. 8절에서 바울이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것은 삶이 괴로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만큼 장래의 소망이 확실하다는 고백입니다(빌 1:23). 성령은 우리 눈을 열어 보이는 현실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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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는 데 익숙합니다. 통장의 숫자, 자녀의 성적, 교회의 크기, 사람들의 평판이 우리 걸음을 정하곤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나아지면 믿음도 좋아진 줄 알고, 나빠지면 하나님이 떠나신 줄 압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보이는 것이 다 무너져도 하나님의 약속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보이는 세상과 사람과 일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녹록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롬 1:17).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 주신 계약금을 잊고 사는 날이 많지 않았는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일이 꼬이고 관계가 틀어질 때, 보이는 형편만 보고 성령의 함께하심을 의심하지 않았는지 살핍니다. 일터에서 사람들의 평가 한마디에 하루가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생각합니다. 오늘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성령님,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시고(시 119:18), 삶의 작은 자리마다 주님의 함께하심과 예비하심과 일하심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우리교회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겉모습이 화려한 사람을 앞세우고 가난하고 약한 지체를 뒤로 미는 일이 우리 가운데 없게 하옵소서. 숫자로 교회를 재지 않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하시는 열매로 교회를 보게 하옵소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우리가 서로의 길동무가 되어 고향 가는 길을 함께 걷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과 동역자들의 삶의 자리에서도 성령님께서 동일하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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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0절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성자 예수님은 심판대 앞에서 우리 삶을 끝까지 헤아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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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러므로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각 사람은 선이든 악이든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됩니다. 앞에서 영원한 집과 성령의 보증을 말한 바울은 이제 그 소망이 오늘 이 몸으로 사는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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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의 '힘쓰노라'는 본래 명예를 사랑한다, 큰 뜻을 품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에게도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야망은 사람들의 칭찬이나 교회 안의 영향력이 아니라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표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 있든지 바뀌지 않습니다.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나 성도의 삶을 꿰는 실은 하나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7절의 '믿음으로 행함'과 10절의 '몸으로 행함'을 나란히 놓습니다. 믿음은 마음속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이 몸으로 걷는 걸음이 됩니다. 몸을 감옥으로 여겼던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 말은 놀라웠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몸은 벗어 버릴 껍데기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0절의 '심판대'는 로마 총독이 재판을 하던 높은 단을 가리킵니다. 바울 자신도 고린도에서 총독 갈리오의 재판 자리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행 18:12). 고린도 사람들은 시내 광장 한가운데 솟아 있던 그 단을 날마다 보며 살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익숙한 그 자리를 가리키며 더 높은 재판정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라는 말입니다. 바울 자신도 예외가 아니며 믿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심판이 구원을 취소하는 정죄의 자리는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이 자리는 몸으로 살아 낸 삶이 주님 앞에 드러나고 결산되는 자리입니다. 은혜로 받은 구원이 우리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말씀은 일깨웁니다.

그런데 그 심판대에 앉으신 분이 누구인지 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장막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그 몸이 십자가에서 무너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삶을 헤아리실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심판의 두려움을 거룩한 경외로 바꿉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한다고 말합니다(5:11). 우리 삶은 오늘이라는 점들이 이어져 그려지는 한 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그렇게 한 점 한 점 찍어 간 그림이 마침내 주님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오늘만 살 것처럼 막살아도 안 되고, 오늘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도 안 됩니다. 지나간 어제에 매이지 않고, 오늘 주어진 현실을 올곧게 살며, 주님이 주관하시는 내일을 소망 가운데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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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은혜를 값싸게 여기기 쉽습니다. 구원받았으니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교묘하게 스며들어, 주일의 얼굴과 평일의 얼굴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런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겁주려는 말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귀하게 여기라는 초대입니다. 이 몸으로 사는 날들이 영원 앞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이며 동시에 얼마나 엄숙한 부르심인지요. 사람의 박수가 아니라 주님의 미소를 구하는 삶이 바울이 품은 야망이었습니다. 그 야망이 우리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기뻐하실지를 먼저 묻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를 먼저 묻는지 살핍니다. 가정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의 말과 행동이 주님 앞에 드러나도 부끄럽지 않은지 생각합니다. 일터에서 작은 이익을 위해 정직을 흐리게 만든 적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오늘 하루라는 점 하나를 찍을 때 그 점이 주님 앞에 펼쳐질 그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삶의 흔적으로 한 점 한 점 그려 가는 그림이 아름답게 이어져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교회가 사람의 인정보다 주님의 기쁨을 구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프로그램의 성공보다 한 영혼을 향한 신실함을, 눈에 띄는 봉사보다 숨은 자리의 섬김을 귀히 여기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심판대 앞에 설 날을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경외로 준비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교회 모든 성도의 한 가지 소원이 되게 하옵소서. 마침내 주님 앞에 설 때 우리 모두 주님의 기뻐하시는 얼굴을 뵙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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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무너질 장막에 사는 우리에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지어 두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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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낡고 힘이 줄어드는 날에도

우리의 탄식이 원망이 되지 않고

생명을 덧입기를 사모하는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그날을

오늘부터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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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보증으로 오신 성령님,

보는 것으로 걷지 않고

믿음으로 걷는 나그네가 되게 하시고

고향 가는 길에 서로의 길동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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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해 장막 같은 몸을 입으신 주님,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단 하나 야망이 되게 하시고

그날 주님의 기뻐하시는 얼굴을 뵙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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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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