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01:01-11 모든 위로의 하나님 : 받은 위로로 위로하는 사람들

by 평화의길벗 posted Oct 3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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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01:01-11 모든 위로의 하나님 : 받은 위로로 위로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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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된 자신을 소개하며, 갈등을 지나온 고린도 교회를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요 성도라 부르고 은혜와 평강을 빕니다(1-2절). 이어 감사 대신 찬송으로 입을 열어,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환난 중에 자신을 위로하신 까닭은 다른 이들을 위로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고백합니다(3-7절). 그리고 아시아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던 일을 털어놓으며, 그 사형 선고 같은 시간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했다고 말합니다(8-10절). 편지의 첫머리는 기도로 함께해 달라는 부탁과 많은 사람의 감사로 닫힙니다(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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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넷째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 뒤에도 관계는 좋아지지 않았고, 바울은 급히 찾아갔다가 상처만 안고 돌아온 '고통스러운 방문'을 겪었습니다. 그 뒤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내고, 소식을 기다리며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교회가 돌이켰다는 디도의 소식을 듣고 위로와 기쁨 가운데 이 편지를 씁니다(7:6-7). 그래서 이 편지에는 아물어 가는 상처의 통증과 다시 만난 기쁨이 함께 묻어 있습니다.

# 그러나 교회 안에는 여전히 바울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이들 가운데 말솜씨와 추천서와 혈통을 내세우던 이들의 눈에 매 맞고 갇히고 쫓겨 다니는 바울은 실패한 지도자로 보였습니다. 고린도후서는 그 의심 앞에서 바울이 자기 사역과 사도직을 변호하는 가장 자전적인 편지입니다. 그 변호의 중심에는 환난 속 위로, 질그릇 속 보배, 약할 때 강함이라는 역설이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역설의 문을 '위로'라는 낱말로 엽니다. 보통 편지라면 받는 이를 위한 감사로 시작했겠지만,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첫 문장을 엽니다.

# 어제 묵상한 시편 19편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를 부르며 끝났습니다. 오늘 바울은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하나님을 찬송하며 편지를 엽니다. 시인이 고백한 구속자의 이름이 바울에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한 위로의 이름으로 바뀌어 불립니다. 하늘과 말씀으로 말을 거시던 하나님이 오늘은 환난의 바닥까지 내려오셔서 곁에 서시는 하나님으로 오늘 우리를 만나십니다. 앞으로 열여드레 동안 이 편지를 읽으며 그 위로의 길을 날마다 함께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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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하나님의 교회

성부 하나님은 문제 많은 교회도 당신의 교회라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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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사람이라 소개하고, 디모데를 형제라 부르며 함께 편지를 보냅니다. 받는 이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의 모든 성도입니다. 바울을 의심하고 서운하게 했던 교회지만 그는 그들을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요 거룩한 무리로 부르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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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에서 바울은 자기 권위의 출처를 분명히 합니다. 그는 사람이 써 준 추천서나 말솜씨, 이룬 성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 자기를 높이려는 말이 아니라 자기를 내려놓는 말입니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니 내 것으로 지킬 이유도 없고, 사람의 인정이 떨어져도 무너질 이유가 없습니다. 고린도의 반대자들이 바울에게 추천서를 내놓으라고 할 때,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내놓습니다. 디모데를 아들이 아니라 형제라 부른 것도 같은 결입니다. 바울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부름받은 일꾼의 자리에서 편지를 씁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둘째 편지를 들고 고린도에 다녀온 사람이었으니, 교회의 아픔을 직접 본 증인이 편지의 첫 줄에 함께 서 있는 셈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수신자를 부르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도자를 따라 편을 가르고, 바울을 비방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고린도 교회'가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부릅니다. 교회라는 말은 당시 도시의 시민 모임을 가리키던 말이기도 했지만, 이 모임은 세상의 경쟁과 차별로 모인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모인 모임이기에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라는 말도 그들의 도덕적 성취를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따로 구별되어 속한 사람들이라는 신분의 말입니다. 거룩함은 그들이 도달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옮겨 놓으신 자리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만 머물지 않고 온 아가야의 모든 성도로 받는 이를 넓힌 것도, 한 교회의 문제가 그 지역 모든 교회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은혜와 평강을 비는 인사는 바울 편지의 익숙한 첫머리지만 오늘은 무게가 다릅니다. 깨어졌던 관계를 다시 잇는 일은 바울의 노력이나 고린도 교인들의 반성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가 먼저 오고, 그 은혜가 평강을 만듭니다. 순서가 바뀌면 화해는 협상이 되고, 평강은 서로의 양보로 겨우 유지되는 휴전이 됩니다. 은혜가 먼저일 때 비로소 서로를 탓하던 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 전체에서 말하려는 화목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옵니다(5:18-19). 하나님은 문제 많은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당신의 이름을 그 위에 두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키시려고 상처 입은 사도를 다시 그 교회 앞에 세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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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에 실망할 때 쉽게 '저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가장 속을 썩인 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이름은 우리가 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 주신 것이기에, 우리가 함부로 떼어 낼 수도 없습니다. 실망이 깊을수록 그 이름을 다시 불러 보는 것이 화목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지체를 부르는 이름이 곧 우리가 그를 대하는 태도가 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이름으로 서로를 부를 때 교회는 다시 교회가 됩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내 자리의 정당함을 무엇으로 증명하려 하는지, 사람들의 인정이 줄어들 때 쉽게 흔들리지는 않는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서운하게 한 식구를 향해 마음속으로 이름을 지우고 있지는 않은지,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이를 동역자가 아니라 경쟁자로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살핍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이 자리에 부름받았다는 사실 하나를 붙들면 칭찬에 들뜨지도 비난에 무너지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은혜와 평강을 먼저 빌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인사 한마디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담아 건네기를 원합니다. 오래 말을 섞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 먼저 짧은 안부를 보내겠습니다.

우리교회가 서로를 하나님의 교회요 성도로 부르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섭섭한 일이 생겨도 이름을 거두지 않고, 다툼이 있어도 은혜와 평강의 인사를 먼저 건네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와 성도가 위아래가 아니라 함께 부름받은 형제와 자매로 서기를 원합니다. 우리교회가 세상의 모임과 다른 모임, 하나님이 부르셔서 모인 모임이라는 것을 서로의 말투와 얼굴로 증언하게 하옵소서. 새로 온 이들도 이곳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으로 환대받게 하옵소서. 지난날의 서운함보다 오늘의 은혜를 먼저 기억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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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절 흘러넘치는 위로

성자 예수님은 고난 속에서 넘치는 위로로 우리를 위로하는 자로 빚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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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시되, 그 위로로 다른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 만큼 위로도 넘친다고 말하며, 자신의 환난도 위로도 고린도 교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 밝히고 그들도 같은 위로에 참여할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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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에서 '위로'라는 말은 명사와 동사로 열 번이나 되풀이되고, 그 사이사이에 환난과 고난이 끼어듭니다. 하나님, 아버지, 위로, 환난이 엇갈려 반복되며 듣는 이의 귀에 한 가지를 새겨 넣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 위로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위로로 옮긴 말은 곁으로 불러 세운다는 뜻을 품은 낱말입니다. 멀리서 힘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곁에 와서 서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보혜사도 같은 뿌리의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모든'은 어떤 환난이 닥쳐도 그에 맞는 위로를 주시는 완전한 위로를 가리킵니다. 환난에도 '모든'을 붙이고 위로에도 '모든'을 붙여 둘을 나란히 세운 것입니다. 환난의 종류만큼 위로의 얼굴도 다양하다는 뜻입니다.

이 고백의 뿌리는 이사야에 있습니다. 포로 된 백성에게 하나님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셨고,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40:1; 51:12). 이사야가 바라본 종말의 위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입니다. 포로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위로가 이제는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위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요 아버지라 부릅니다. 자비의 아버지라는 말도 언약을 깨뜨린 백성을 다시 품으시던 하나님의 긍휼을 담고 있습니다. 고난을 실패의 증거로 여기던 고린도의 눈에 바울의 환난은 부끄러움이었지만, 바울은 바로 그 환난을 하나님이 찾아오신 자리로 읽습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한쪽은 버림받은 증거를 보았고, 바울은 찾아오신 증거를 보았습니다.

5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환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겪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넘친다는 동사가 고난과 위로에 똑같이 쓰였습니다. 고난이 넘칠수록 위로도 넘칩니다. 그리고 그 넘친 위로는 그릇에 고여 있지 않고 다른 이에게로 흘러갑니다. 바울은 위로받은 사람이었기에 위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듯 바울도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 길에 참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의 종착지가 아니라 위로가 지나가는 길로 삼으십니다. 그 위로는 고린도 교인들 안에서도 같은 고난을 끝내 견디는 힘이 되어, 다시 다른 이에게로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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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난을 피해야 할 것으로만 여기고, 위로는 내 것으로 간직하려 합니다. 오늘 말씀은 고난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위로가 다른 이를 살리는 위로가 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위로는 쌓아 두면 마르고 흘려보내면 다시 채워집니다. 우리가 지나온 눈물의 골짜기는 누군가에게 길을 내어 주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으십니다. 상처를 지나온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 위로는 말보다 눈빛과 기다림으로 먼저 전해집니다.

나는 어떤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는지 떠올려 봅니다. 그 위로를 마음 깊은 곳에 넣어 두고 꺼내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같은 아픔을 지나는 식구에게, 일터에서 비슷한 실패 앞에 선 동료에게 내가 받은 위로를 건넬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설명이 아니라 곁에 서 주는 일입니다. 위로하려다 가르치려 들지 않고, 말보다 먼저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 연락이 끊긴 한 사람에게 안부를 묻는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위로를 받을 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맙게 받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우리교회가 위로가 흘러가는 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픔을 지나온 성도가 지금 그 아픔 속에 있는 성도의 손을 잡아 주는 교회, 고난을 숨기지 않고 나눌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소그룹마다 서로의 환난을 듣고 서로의 위로가 되어 주는 자리가 끊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위로를 받은 사람이 위로하는 사람이 되는 선순환이 우리교회의 일상이 되게 하옵소서. 병상과 장례식장과 실패의 자리에 먼저 찾아가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위로하는 일이 몇몇 직분자의 몫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몫이 되게 하옵소서. 위로받은 기억이 감사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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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1절 사형 선고 너머

성령 하나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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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교인들이 알기를 바랍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졌고, 스스로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건지셨고 건지실 것이라 고백한 뒤, 기도로 도와 달라고 부탁하며 많은 사람의 감사를 내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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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무엇이었는지 바울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의 소요, 감옥에 갇힌 일, 생명을 위협한 병 등 여러 추측이 있지만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몸에 난 상처는 아물어도 그 흔적이 오래 남듯, 편지를 쓰는 지금까지 그 기억은 바울 안에 생생히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사건의 내용이 아니라 그 무게입니다. 힘에 겹도록이라는 말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넘어섰다는 뜻이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는 말은 빠져나갈 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도라고 해서 절망의 바닥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난 없는 영광을 자랑하던 이들 앞에서 자신이 무너졌던 시간을 감추지 않고 먼저 꺼내 놓습니다. 강한 척하지 않는 이 고백이야말로 그가 참 사도라는 가장 정직한 증거입니다.

9절의 '받은 줄 알았다'는 말은 이미 판결이 내려졌으나 아직 집행되지 않은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형 선고문을 품에 지닌 채 날마다 살아가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판결문이 그를 다른 자리로 데려갔습니다. 자기를 의지하던 자리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리로 옮겨 간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날마다 드리던 기도 속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바울에게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판결문을 찢어 버리는 대신 그 판결문 위에 부활의 하나님을 적어 넣습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교리이기 전에 오늘 절망의 바닥에서 경험되는 능력이었습니다. 끝이라고 생각한 자리가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시는 자리였습니다. 내 힘이 바닥나야 비로소 보이는 하나님의 힘이 있습니다.

10절은 건지셨고,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리라는 세 시제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신뢰가 되고, 현재의 신뢰가 미래의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지나온 길에서 건지신 하나님이 오늘도 건지시고 마지막 날에도 건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구원이 혼자의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교인들의 간구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드는 통로가 되고, 그 은혜를 받은 일로 많은 사람이 함께 감사하게 됩니다. 처음 3절에서 바울 혼자 시작한 찬송이 11절에서 많은 사람의 감사로 넓어진 것입니다. 성령은 무너진 한 사람을 일으키실 때 공동체의 기도를 함께 쓰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나누어 주시는 길에 우리를 함께 세우시는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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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도 사형 선고처럼 들리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진단서 한 장, 해고 통지 한 통, 끊어진 관계 하나가 살 소망을 끊어 놓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자리가 끝이 아니라 나를 의지하던 손을 펴고 살리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자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바닥에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끊어진 줄 알았던 소망은 우리 손에서 끊어졌을 뿐 하나님의 손에서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손을 붙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봅니다. 건강과 경험과 계획이 무너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아닌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아픔을 혼자 끌어안고 식구에게 기도를 부탁하지 못하는 자존심은 없는지, 일터에서 실패를 감추느라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핍니다. 바울처럼 나의 무너짐을 정직하게 꺼내 놓고 기도를 청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기도를 부탁할 때 그 이름을 끝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기도해 주겠다는 말이 인사치레로 끝나지 않게 하겠습니다. 지난날 건지신 일을 적어 두고 다시 흔들릴 때 꺼내 읽으며, 오늘도 건지실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우리교회가 서로를 위해 간구함으로 돕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형 선고 같은 소식을 들은 지체가 혼자 남지 않도록 기도의 손을 모으고, 하나님이 건지신 일을 들으면 함께 감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종들과 먼 선교지의 동역자들을 위한 기도도 끊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로 돌아오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응답의 소식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가 늘어나기를 원합니다. 수요일과 찬양의 골방과 각자 갖는 첫시간 묵상과 기도의 자리가 서로의 이름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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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

문제 많은 우리를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라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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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이 넘칠 때마다

그리스도의 위로도 넘치게 하시고

우리가 받은 그 위로를

움켜쥐지 않게 하옵소서.

아픔 속에 있는 이의 곁으로 가서

말없이 서 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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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소망이 끊어지는 날에도

나를 의지하던 손을 펴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붙들게 하옵소서.

건지셨고 건지실 주님을 신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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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위해 간구하는 기도로

우리교회를 하나로 묶어 주시고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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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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