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8:01-15 나의 힘이 되시는 반석의 하나님 : 하늘을 드리우고 내려오시니
*
다윗은 나의 힘이신 여호와를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노래를 엽니다(1절). 이어 반석과 요새와 방패와 구원의 뿔 같은 이름을 쏟아 내며 자신을 지키신 하나님을 부릅니다(2-3절). 그는 사망의 줄과 스올의 올무에 얽혀 꼼짝할 수 없던 날을 돌아보며, 그 밑바닥에서 드린 부르짖음이 하늘 성전에 닿았다고 증언합니다(4-6절). 그러자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드리워지며, 하나님이 먹구름과 우레와 번개 가운데 내려오셔서 원수를 흩으십니다(7-15절). 한 사람의 작은 신음에 온 우주가 움직이는 노래이며, 사흘에 걸쳐 읽을 긴 감사의 첫 마디입니다.
*
# 표제는 이 노래가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들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지신 날에 부른 것이라고 밝힙니다. 다윗은 여기서 스스로를 여호와의 종이라 부릅니다. 같은 노래가 사무엘하 22장에도 거의 그대로 실려 있어, 다윗의 생애를 마무리하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쫓기고 싸우던 평생을 돌아보며 부른 신앙의 총결산입니다. 사무엘하는 이 노래 바로 뒤에 다윗의 마지막 말을 이어 놓아, 이 감사가 그의 유언처럼 들리게 합니다.
# 이 시편은 신약에서도 여러 번 울립니다. 바울은 49절을 인용하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말했고, 히브리서 기자는 2절의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는 고백을 그리스도의 입에 두었습니다. 사가랴는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이 다윗의 집에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고 노래했습니다. 다윗의 감사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됩니다.
# 형식으로 보면 이 시는 왕이 전쟁에서 건짐을 받은 뒤 드리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쉰 절에 이르는 긴 시라서 매일성경은 이 노래를 사흘에 나누어 읽습니다. 오늘 1-15절은 사랑의 고백과 하나님의 이름들로 시작해 죽음의 위협과 부르짖음, 그리고 하나님의 장엄한 강림으로 이어집니다. 내일과 모레는 건져 내시는 손과 왕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읽습니다.
# 어제 17편에서 다윗은 노려보는 원수들 가운데서 주께서 일어나 자신을 건져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오늘 18편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읽힙니다. 16편이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17편이 억울함 속의 탄원을 노래했다면, 18편은 마침내 응답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17편의 일어나소서라는 외침은 18편에서 하늘을 드리우고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메아리칩니다.
*
# 1-3절 바위에 붙인 이름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 피할 반석이 되어 주십니다.
.
다윗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이어 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하나님,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이라는 이름을 숨 가쁘게 이어 부릅니다. 그리고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감사의 노래가 지난 이야기보다 먼저 사랑 고백과 이름 부르기로 시작되는 단락입니다.
.
1절의 사랑하다로 옮긴 말은 라함인데, 어머니의 태를 뜻하는 레헴과 뿌리가 같습니다. 이 말은 보통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품으시는 애끓는 긍휼을 말할 때 쓰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이 말을 쓴 곳은 구약 전체에서 여기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본문을 고쳐 읽기도 하지만, 고대 근동에서 이 계열의 말이 언약 관계 속의 충성과 헌신을 뜻하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대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왕이 자신의 참된 대왕이신 하나님께 온 마음을 바치는 고백입니다. 또 힘으로 옮긴 헤제크라는 명사도 구약에서 이곳에만 나옵니다. 다윗은 다른 데서 빌려 올 수 없는 낱말로 자기 사랑과 자기 힘의 근원을 말한 셈입니다.
2절의 이름들은 다윗이 실제로 숨어 지낸 유대 광야의 지형에서 나왔습니다. 반석으로 옮긴 셀라는 깎아지른 절벽이고, 요새로 옮긴 메추다는 엔게디 같은 산속의 굴을 가리킵니다. 사울의 군대가 산 이편과 저편으로 에워쌌을 때 다윗을 가려 준 것이 바로 그런 바위였습니다. 피할 바위로 옮긴 추르는 모세의 노래에서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거듭 쓰인 말입니다. 산성 미스갑은 원수가 오를 수 없는 높은 곳입니다. 방패와 구원의 뿔은 전쟁터에서 나온 말인데, 뿔은 들소의 힘처럼 원수를 밀어내는 능력을 뜻합니다. 지켜 주는 이름과 싸워 주는 이름이 함께 놓여, 하나님이 막으시는 데서도 이기시는 데서도 모자람이 없는 구원자이심을 보여 줍니다. 한 개의 이름으로 시작한 고백이 세 개, 네 개로 늘어나며 겹겹이 두른 성벽처럼 두꺼워집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여 줍니까. 하나님은 다윗이 숨었던 바위와 굴의 진짜 이름이셨습니다. 다윗은 돌 틈에 몸을 숨겼지만, 지나고 보니 그를 지킨 것은 돌이 아니라 그 돌을 지으신 분이었습니다. 1절의 나의 힘이신 여호와와 3절의 찬송 받으실 여호와가 이 단락을 감싸며, 고백과 찬송이 하나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약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따르던 신령한 반석이 곧 그리스도였다고 말합니다.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섭니다.
.
우리는 위기 앞에서 먼저 손에 잡히는 바위부터 찾습니다. 통장의 잔고, 든든한 인맥, 쌓아 온 경력이 우리의 요새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것들이 고마운 그늘이 되어 줄 때도 있지만, 결국 우리를 지키신 분이 누구였는지 이름을 바르게 불러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다윗처럼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나를 숨겨 준 바위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 보는 감사의 목록을 적어 보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는 식탁에서 함께 이번 주 우리를 지켜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씩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는 일이 잘 풀린 날에도 내 실력이라는 이름 대신 나의 힘이신 여호와라는 이름을 마음에 새길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위기 때만 하나님을 찾는 공동체가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친 지체에게 하나님이 어떤 반석이셨는지 서로 증언해 주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일 예배 때 한 사람의 짧은 감사 고백이 다른 이의 무너진 마음에 바위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 많이 배워 가는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
# 4-6절 사망의 줄
하나님은 스올의 밑바닥에서 드린 부르짖음을 성전에서 들으십니다.
.
다윗은 자신이 겪은 위기를 사망의 줄과 불의의 창수, 스올의 줄과 사망의 올무로 그려 보입니다. 죽음이 사냥꾼처럼 줄을 던져 그를 얽었고, 거센 물살이 그를 덮쳤습니다. 빠져나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서 그는 여호와께 아뢰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의 성전에서 그 소리를 들으셨고, 작은 부르짖음이 끝내 그분의 귀에까지 닿았습니다.
.
4절과 5절은 사망으로 시작해 사망으로 끝나며, 그 가운데에 불의와 스올이 놓여 있습니다. 사방이 죽음으로 막힌 모습을 문장의 짜임새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줄과 올무는 사냥꾼이 짐승을 잡을 때 쓰는 도구이고, 창수는 광야의 마른 골짜기를 순식간에 휩쓰는 급류를 말합니다. 묶이는 이미지와 휩쓸리는 이미지가 겹쳐, 손발이 묶인 채 물속으로 가라앉는 사람의 무력함을 그려 냅니다. 불의의 창수에서 불의로 옮긴 벨리야알은 다시 올라오지 못하는 곳, 곧 파멸을 가리키는 말로 읽히기도 합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죽음과 혼돈은 늘 깊은 물과 함께 다녔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단락이 다윗의 어떤 구체적인 전투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대신 누구나 자기 위기를 넣어 읽을 수 있는 죽음의 이미지만 남겨 두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다윗 한 사람의 회고에 머물지 않고, 죽음의 줄에 묶인 모든 시대 성도의 기도가 됩니다. 6절에서 다윗은 2절의 나의 하나님을 다시 부르며 다급하게 매달립니다. 가장 낮은 스올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가장 높은 하늘 성전에 닿는 장면은, 기도가 공간의 거리를 단숨에 건너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땅의 성전은 하늘 성전의 모형이었고, 하나님은 그 하늘 처소에서 몸을 기울여 들으셨습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여 줍니까. 하나님은 큰 목소리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줄에 묶여 숨이 막힌 사람의 떨리는 소리까지 들으시는 분입니다. 스올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끊어진 곳처럼 여겨졌지만, 이 시편은 그곳에서 드린 기도에도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사망의 줄에 묶이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신 그분의 기도는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고, 하나님은 그분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성전에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
우리를 얽는 줄은 저마다 다릅니다. 갑자기 찾아온 병, 감당할 수 없는 빚, 끊어지지 않는 중독, 오래된 관계의 상처가 우리 발목을 묶습니다. 그 줄 앞에서 우리는 흔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버티다가 더 깊이 가라앉습니다. 다윗은 버티는 대신 부르짖었습니다. 오늘 나를 묶고 있는 줄이 있다면 그것을 이름 붙여 하나님께 소리 내어 아뢰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마음속으로만 웅얼거리던 두려움도 입 밖으로 꺼내어 하나님께 아뢰는 순간 이미 그분의 귀에 닿는 기도가 됩니다. 다윗의 부르짖음이 하늘 성전에 들렸듯이 우리의 서툰 한마디도 결코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습니다. 기도는 세련된 문장이 아니어도 됩니다. 가정에서는 가족 중 누군가가 깊은 물에 빠져 있을 때 탓하기보다 먼저 함께 부르짖어 줄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는 무너지는 동료의 신음을 흘려듣지 않는 귀가 필요합니다. 우리교회가 스올의 줄에 묶인 이들의 부르짖음이 들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소리를 하나님께 함께 올려 드리는 중보의 자리가 끊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제목을 나누는 일이 부끄러운 고백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도 줄에 묶인 채 혼자 가라앉지 않도록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
# 7-12절 하늘을 드리우고
성자 하나님은 하늘을 드리우고 낮은 곳까지 내려오십니다.
.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가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숯이 피어오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발아래에는 먹구름이 깔립니다. 그룹을 타고 바람 날개로 날아오시며, 흑암과 비구름을 장막처럼 두르시고, 그 앞의 광채로 빽빽한 구름이 갈라지며 우박과 숯불이 쏟아집니다. 한 사람의 부르짖음에 하늘과 땅이 함께 응답합니다.
.
이 단락은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장면, 곧 신현을 그립니다. 7절의 진동하고 요동하였다는 비슷한 소리의 두 낱말을 나란히 놓아, 땅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모습을 귀로 듣게 합니다. 8절은 연기에서 불로, 불에서 숯불로 점점 거세지는 장면을 세 줄로 이어 갑니다. 화산이 터지는 듯한 이 모습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연기와 불 가운데 강림하셨던 기억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의 코와 입을 말하는 것은 그분이 사람처럼 생기셨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종을 괴롭히는 악을 향해 타오르는 거룩한 분노를 보여 주는 시인의 그림 언어입니다.
9절의 드리우다로 옮긴 말은 장막을 펼치거나 가르는 데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휘장처럼 가르고 내려오십니다. 이 절은 강림하시니를 가운데 두고 위로는 갈라진 하늘, 아래로는 발밑의 먹구름을 배치해 내려오심 그 자체를 크게 보여 줍니다. 10절의 그룹은 언약궤 위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던 날개 달린 존재이고, 바람 날개로 날아오셨다는 말은 독수리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히듯 빠르게 오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11절에서 하나님은 흑암을 숨는 곳으로 삼으십니다. 오시되 감추어져 계시고, 나타나시되 그 얼굴은 구름 속에 계십니다. 12절에 이르러서야 그 앞의 광채가 구름을 뚫고 터져 나옵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여 줍니까.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머물러 내려다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한 사람을 건지기 위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이사야는 주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기를 탄식하며 구했습니다. 그 기도는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응답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셨습니다. 우레와 번개가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그분이야말로 하늘을 드리우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강림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기도해도 하늘이 닫혀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은 흑암 속에 숨어 계신 것만 같습니다. 이 단락은 그 흑암조차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길에 두르신 장막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 시간에도 그분은 이미 내려오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기도가 막힌 듯 느껴진다면, 먹구름을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오심의 표지로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는 자녀가 어두운 시간을 지날 때 부모가 하늘에서 훈계만 하지 말고 그 자리까지 내려가 곁에 앉아야 합니다. 일터에서는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낮은 곳의 소리를 들으러 내려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우리교회가 하늘에서 설명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고통의 자리로 내려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탄의 낮아지심을 날마다 살아 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병상과 빈소와 실직의 자리에 먼저 찾아가 앉는 발걸음이 우리교회의 설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먼저 내려오셨기에 우리도 기꺼이 내려갈 수 있습니다.
*
# 13-15절 드러난 물밑
성령 하나님은 우렛소리로 원수를 흩으시고 숨은 터를 드러내십니다.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발하시자 우박과 숯불이 쏟아집니다. 하나님은 화살을 날려 원수들을 흩으시고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십니다. 그분의 꾸지람과 콧김에 바닷물이 밀려나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납니다. 다윗을 삼키려던 죽음의 물이 하나님의 숨결 앞에서 바닥까지 갈라지는 장면으로 사흘 가운데 첫날 본문이 마무리됩니다.
.
13절에서 비로소 여호와라는 이름이 다시 나타납니다. 10절에서 12절까지 하나님은 그라는 대명사로만 불리며 구름 속에 감추어져 계셨는데, 심판이 쏟아지는 순간 그 이름이 우레처럼 울립니다. 지존하신 이, 곧 엘욘은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렛소리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백성 앞에 나타나실 때 들려온 소리였고, 시편 29편은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다고 노래합니다. 14절의 화살은 번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대 세계는 번개를 하늘의 화살로 그렸는데, 시인은 이웃 민족들이 폭풍의 신에게 돌리던 그 모든 위엄을 오직 여호와께 돌립니다.
15절은 이 강림 장면 전체를 거두어들이는 절입니다. 7절의 산들의 터가 15절의 세상의 터로 다시 나타나 단락을 감싸고, 8절의 콧김과 10절의 바람과 11절의 물이 거꾸로 되짚어지며 마무리됩니다. 물밑이 드러났다는 말은 홍해를 기억하게 합니다. 모세의 노래는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고 깊은 물이 엉겼다고 노래했습니다. 출애굽 때 바다를 가르셨던 그 능력이 이제 한 왕의 위기 속에서 다시 일하십니다. 4절에서 다윗을 덮쳤던 불의의 창수가 하나님의 숨결 앞에서 바닥까지 드러난 것입니다. 내일 읽을 16절은 바로 그 드러난 물속으로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 다윗을 건져 올리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여 줍니까. 하나님은 혼돈과 죽음의 물보다 크신 분이시며, 그분의 숨결 한 번에 깊은 물의 바닥이 드러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물이 물러가 뭍이 드러났습니다. 같은 숨결이 오늘 본문에서 원수의 물을 가릅니다. 오순절에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며 성령이 임하셨을 때, 두려움에 숨어 있던 제자들의 마음 밑바닥이 드러나고 새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를 삼키려는 물을 가르시고 굳은 터 위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
우리 삶에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이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 해결되지 않는 갈등, 잠잠해지지 않는 두려움이 우리를 덮칩니다. 그 물이 아무리 깊어도 하나님의 숨결 한 번이면 바닥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나를 덮고 있는 물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어놓고, 그 물을 꾸짖으실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은 그 음성 앞에 귀를 여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가정에서는 두려움에 잠긴 가족에게 해결책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을 함께 읽어 줄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는 소문과 불안이 물처럼 차오를 때 그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말씀이라는 굳은 터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세상의 혼돈 앞에서 두려워 숨는 공동체가 아니라 성령의 바람으로 새 창조를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물밑이 드러나는 그날을 함께 기다리며 서로의 손을 붙드는 교회이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움의 물살이 아무리 높아도 말씀의 터 위에 함께 서 있다면 우리는 쉽게 휩쓸리지 않을 것입니다.
*
# 거둠의 기도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숨어 지낸 바위마다
주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음을 압니다.
.
사망의 줄이 저희를 얽고
불안의 물살이 덮쳐 올 때
혼자 버티며 가라앉지 않게 하시고
가장 낮은 곳에서도
주님께 부르짖게 하옵소서.
.
하늘을 드리우고 내려오신 주님,
흑암 속에 계실 때에도
이미 오고 계심을 믿게 하시고
저희도 고통의 자리로
낮아지며 내려가게 하옵소서.
.
주의 숨결로 깊은 물을 가르시고
굳은 터 위에 저희를 세우소서.
우리교회가 반석이신 주님을 증언하며
지친 이들의 피난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