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7:01-15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공의의 하나님 : 깰 때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by 평화의길벗 posted Oct 2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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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7:01-15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공의의 하나님 : 깰 때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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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억울한 고발 앞에서 사람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 자기 사정을 내놓습니다(1-2절). 밤에 마음을 달아 보신 주님 앞에서 입술과 걸음을 지켰다고 아뢰며 무죄를 호소하고(3-5절), 이어 주의 기이한 사랑으로 자신을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날개 그늘 아래 숨겨 달라고 구합니다(6-9절). 기름에 마음이 닫힌 채 사자처럼 노리는 원수들을 고발한 뒤, 일어나 그들을 꺾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10-14절). 그러나 시는 원수의 얼굴이 아니라 깰 때에 뵈올 주의 얼굴로 끝납니다(15절). 밤의 호소가 아침의 만족으로 바뀌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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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는 이 시를 다윗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시편 가운데 많은 노래가 기도이지만 표제에 기도라는 이름이 직접 붙은 것은 17편과 86편, 90편, 102편, 142편 정도뿐입니다. 그만큼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직접 말을 거는 언어로 짜여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서는 마온 광야에서 사울의 추격에 쫓기며 산 이편과 저편으로 숨어 다니던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짓 고발과 목숨을 노리는 추격이 한꺼번에 밀려오던 자리였습니다. 사울의 군대가 산을 에워싸 다윗을 거의 잡을 뻔했을 때 블레셋의 침입 소식으로 추격이 멈춘 그 자리입니다.

# 형식으로 보면 이 시는 억울하게 고발당한 사람이 무죄를 호소하며 하나님의 판결을 구하는 탄원시입니다. 옛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의 법정이 가릴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성소로 나아가 하나님의 판단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성소에서 밤을 지새운 사람이 아침의 판결을 기다리며 드린 기도로 읽기도 합니다. 시는 밤에 시작해 아침에 끝나고, 처음에 주님께 살펴 달라고 구한 눈이 마지막에는 주님의 얼굴을 보는 눈으로 바뀝니다.

# 어제 16편이 주의 장막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노래했다면, 오늘 17편은 그 신뢰가 장막 밖의 거친 현실에서 시험받는 장면입니다. 16편에서 주께 피한다고 고백한 사람이 17편에서는 피하는 자를 구하시는 주님을 부릅니다. 16편 마지막 줄의 주의 앞에 있는 충만한 기쁨은 17편 마지막 줄의 주의 얼굴로 다시 울립니다. 두 시는 같은 신뢰를 기쁨의 날과 고난의 밤에 각각 비추어 보여 줍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사흘 동안 읽을 18편은 이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왕의 감사로 노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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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밤에 오신 재판장

성부 하나님은 밤에 찾아오셔서 마음을 달아 보시는 공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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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여호와께 자기 호소를 들어 달라고 거듭 청하며 시를 엽니다. 들으소서, 주의하소서, 귀를 기울이소서라는 간청이 이어지고, 판결은 주 앞에서 나오기를 구합니다. 그는 주님이 밤에 찾아오셔서 자기 마음을 시험하셨지만 흠을 찾지 못하셨다고 아룁니다. 이어 입으로 범죄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주의 말씀을 따라 폭력의 길을 피했으며, 걸음이 주의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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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두 절은 다섯 개의 간청으로 짜여 있고 그 뒤 3절은 다섯 개의 서술로 이어집니다. 들으소서, 주의하소서, 귀를 기울이소서, 판단하소서, 살피소서라는 다섯 요청에 시험하셨다, 감찰하셨다, 찾지 못하셨다, 결심하였다, 범죄하지 아니하리라는 다섯 진술이 짝을 이룹니다. 간청과 대답이 마주 서서, 나를 살펴 달라고 구한 사람이 이미 살핌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구조입니다. 1절의 의의 호소에서 의로 옮긴 체데크는 15절의 의로운 중에서 다시 나타나 시 전체를 처음과 끝으로 묶습니다. 시험하다로 옮긴 바한과 감찰하다로 옮긴 차라프는 모두 금속을 불에 달구어 불순물을 걸러 내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마음을 용광로에 넣어 보셨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 호소는 바리새인의 자기 자랑과 다릅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를 덮친 고발, 곧 폭력배로 몰아세우는 거짓에 대해서만 결백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그는 강포한 자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5절에서는 자기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길로 옮긴 말은 마차 바퀴가 남긴 자국을 가리킬 때도 쓰이는 말입니다. 주님이 먼저 지나가신 바퀴 자국을 따라 걸었다는 뜻입니다. 1절의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은 4절의 주의 입술의 말씀과 맞물려, 기도하는 입술과 말씀을 따르는 삶이 하나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5절의 실족하지 아니하였다는 고백은 어제 16편 8절의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와 같은 결로 울립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여 줍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겉말이 아니라 마음을 재시는 재판장이시고, 그 재판은 밤의 고요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법정은 증거와 목소리 큰 쪽의 말에 흔들리지만 하나님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십니다. 그래서 억울한 사람에게 이 재판장은 두려움이 아니라 피난처가 됩니다. 이 호소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거짓 증인들 앞에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주님은 자신의 판결을 아버지께 맡기셨고, 하나님은 부활로 그분의 의를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시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도 그분의 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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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먼저 사람들의 법정에 호소합니다. 해명하고 설명하고 내 편을 모으며 밤을 지새웁니다. 다윗은 그 밤을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보이는 시간으로 바꾸었습니다. 오늘 내 마음에 억울함이 있다면 그것을 사람에게 쏟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꺼내 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내 입술이 거짓을 말하지 않았는지, 내 걸음이 주님의 바퀴 자국을 벗어나지 않았는지 정직하게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서운한 일을 다투어 따지기보다 함께 무릎 꿇고 주님의 판단을 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는 오해를 받는 자리에서도 말을 줄이고 정직한 걸음을 이어 가는 것이 가장 분명한 변론이 됩니다. 우리교회가 서로를 고발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함께 주님의 공평한 눈 앞에 서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억울함을 품은 지체가 있다면 그 곁에서 함께 기도의 언어를 찾아 주는 교회이기를 기도합니다. 섣불리 판결하지 않고, 판결은 주 앞에서 나온다는 믿음으로 서로를 기다려 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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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절 눈동자와 날개 그늘

하나님은 피하는 자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날개 아래 숨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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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믿기에 부른다고 말하며 다시 귀를 기울여 달라고 구합니다. 그는 주께 피하는 자들을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님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어 자신을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 달라고 청합니다. 그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이 바로 앞에서 길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탄원이 신뢰로 한 걸음 옮겨 가는 단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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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에서 시인은 응답하실 것을 믿기에 부른다고 말합니다. 1절의 다급한 호소가 여기서 확신의 기도로 한 걸음 옮겨 갑니다. 이 단락에서 시인은 세 가지를 구합니다. 응답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지켜 주시라는 것입니다. 7절의 기이한 사랑은 헤세드, 곧 언약 때문에 끝까지 붙드시는 사랑입니다. 기이하다는 말과 사랑과 오른손이라는 세 낱말은 홍해를 건넌 뒤 부른 모세의 노래에도 함께 나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옛날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출애굽을 자신의 작은 위기 속에서도 다시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8절의 두 이미지는 평행을 이룹니다. 눈동자처럼 지키시고와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가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보호를 두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눈동자로 옮긴 이숀은 직역하면 눈 속의 작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눈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눈동자에 작게 비친 내 모습이 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눈 속에 비친 작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몸은 눈을 지키려고 눈썹과 눈꺼풀과 눈물을 겹겹이 두고, 먼지 하나에도 눈이 먼저 감깁니다. 날개 그늘은 어미 새가 새끼를 품는 모습이면서 동시에 언약궤를 덮은 그룹의 날개를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이 두 이미지는 신명기 32장에서 하나님이 광야의 야곱을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독수리처럼 날개를 펴 받으셨다는 노래와 그대로 겹칩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여 줍니까. 하나님은 멀리서 내려다보며 관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눈 안에 두시는 분입니다. 원수들은 시인을 먹잇감으로 노려보지만, 하나님은 그를 눈동자로 바라보십니다. 같은 사람을 두고 시선이 이렇게 다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너희를 모으려 했다고 우셨습니다. 그 날개는 결국 십자가 위에 펼쳐진 두 팔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숨은 사람은 그 날개 그늘 아래 있으며, 그 무엇도 그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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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날마다 많은 시선 속에 삽니다. 손바닥 위 화면은 하루 종일 누군가의 눈길을 의식하게 만듭니다. 평가하는 시선, 비교하는 시선, 기회를 노리는 시선이 우리를 위축시킵니다. 이 단락은 그 모든 시선보다 먼저 우리에게 와 있는 하나님의 눈을 기억하게 합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나는 하나님의 눈동자에 담긴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 번 소리 내어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는 자녀를 평가의 눈이 아니라 눈동자처럼 아끼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모가 그 눈빛을 배울 때 아이는 하나님의 눈빛을 처음 경험합니다. 일터에서는 경쟁의 시선이 날카로울수록 날개 그늘 아래 숨는 짧은 기도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교회가 지친 이들에게 날개 그늘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로 온 사람, 상처 입고 들어온 사람이 이곳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눈동자임을 처음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하나님의 눈빛을 닮아 가기를 바랍니다. 그 눈빛이 지친 이들을 다시 일으키는 날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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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4절 기름에 닫힌 마음

하나님은 일어나셔서 사자 같은 악인의 손에서 영혼을 건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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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원수들의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고 입은 교만한 말을 쏟아 냅니다. 그들은 시인의 걸음을 에워싸고 노려보며 땅에 넘어뜨리려 하고, 은밀한 곳에 엎드린 사자처럼 찢을 기회를 노립니다. 시인은 여호와께 일어나 그들을 꺾으시고 주의 칼과 손으로 자기 영혼을 건져 달라고 부르짖으며, 이 세상의 몫으로 배를 채우는 자들을 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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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의 기름에 잠겼다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그들이 자기 기름으로 마음을 닫았다는 뜻입니다. 기름은 하나님이 주신 넉넉함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넉넉함에 무디어져 남의 고통에도 하나님의 말씀에도 반응하지 않는 굳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신명기 32장은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다고 노래합니다. 받은 은혜로 배가 부르자 은혜 베푸신 분을 걷어찬 것입니다. 원수들의 닫힌 마음은 교만한 입으로 이어집니다. 1절과 3절에서 시인이 거짓 없는 입술과 범죄하지 않으려는 입을 말했던 것과 정확히 맞섭니다.

11절과 12절에서 대조는 더 날카로워집니다. 하나님이 눈동자처럼 바라보시던 그 사람을 원수들은 노려보고 있습니다. 시인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 달라고 구했던 것처럼, 원수는 은밀한 곳에 숨어 사자처럼 기다립니다. 같은 숨음이 한쪽에서는 보호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매복이 됩니다. 13절의 일어나소서는 언약궤가 행진할 때 외치던 말이며, 7절에서 일어나 치는 자들에 맞서 이제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기를 구하는 말입니다. 14절은 원문이 어려워 해석이 갈리지만, 이 세상에서만 몫을 받아 자기 배와 자녀를 채우는 데 만족하는 자들의 가치관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뜻이 모아집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여 줍니까. 하나님은 악인의 오만을 영원히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이며, 약한 자를 찢으려는 힘보다 크신 용사이십니다. 시인은 스스로 칼을 들지 않고 주의 칼과 주의 손을 구합니다.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탄원시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사자처럼 울부짖는 원수가 둘러싼 자리에서 칼을 빼든 제자를 말리시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맡김을 통해 죽음과 악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이 세상의 몫으로 배부른 자들 사이에서 그분은 아무 몫도 갖지 않은 채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손이 일어나신 자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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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도 기름에 잠길 수 있습니다. 가난할 때 간절하던 기도가 형편이 나아지면서 시들해진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채워지고 삶이 넉넉해질수록 기도는 줄고 남의 아픔은 멀어집니다. 오늘 내 마음이 무디어진 곳은 없는지, 받은 은혜로 배는 불렀는데 감사는 사라진 곳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 누군가를 노려보는 눈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눈을 거두어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자녀에게 재산보다 하나님을 물려주는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14절의 사람들은 남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신앙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일터에서는 힘 있는 쪽이 약한 쪽을 몰아세우는 자리에 가담하지 않고, 억울한 자의 편에 서는 용기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넉넉함에 무디어지지 않고 늘 부드러운 마음으로 이웃의 고통에 반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원수 갚는 일을 주님께 맡기고 화해의 자리를 먼저 찾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넉넉할 때일수록 나눔의 손을 더 크게 펴는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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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깰 때의 얼굴

성령님은 고난의 밤을 지난 우리를 주의 얼굴 앞에서 깨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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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나라는 말을 앞세워 앞의 사람들과 자신을 갈라 세웁니다. 그들이 세상의 몫과 자녀로 만족한다면 자신은 의로운 가운데 주의 얼굴을 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라고 고백합니다. 원수의 위협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시인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탄원으로 시작한 기도가 고요하지만 단단한 확신으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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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은 이 시의 전환점이자 정점입니다. 2절에서 주님의 눈으로 살펴 달라고 구할 때 쓴 동사와 15절에서 주의 얼굴을 보겠다고 할 때 쓴 동사는 같은 하자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나를 보아 달라고 구하던 기도가 마지막에는 내가 하나님을 보게 되리라는 고백으로 바뀝니다. 또 14절의 악인이 자녀로 만족한다는 말과 15절의 시인이 주의 형상으로 만족한다는 말에는 같은 동사 사바가 쓰였습니다. 같은 배부름을 두고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두 길을 가릅니다. 형상으로 옮긴 테무나는 민수기 12장에서 모세만이 여호와의 형상을 보았다고 할 때 쓰인 말로, 구약에서 가장 가까운 대면을 가리킵니다.

깰 때에라는 말은 여러 겹으로 읽힙니다. 성소에서 밤을 지새운 사람이 아침에 판결의 빛을 맞는 장면일 수 있고, 3절에서 밤에 시험받은 마음이 아침에 맞는 위로일 수도 있습니다. 밤에 시작한 시가 아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이 깨어남을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부활의 아침으로도 읽어 왔습니다. 시인이 그것을 다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제 16편의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리라는 고백과 나란히 놓고 보면 이 소망은 무덤 너머까지 뻗어 갑니다. 원수의 눈빛이 가득하던 시야가 마침내 하나님의 얼굴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절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여 줍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서 멈추지 않으시고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시는 분입니다. 시인이 끝내 구한 것은 원수의 패배나 재산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얼굴 맞댄 사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귐 자체로 사람을 배부르게 하십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었고, 성령께서 우리를 그 형상으로 변화시켜 가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이 나타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참모습 그대로 뵈옵고 그분과 같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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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으로 배부르려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자녀의 성공, 넉넉한 통장, 남들의 인정으로 채우려는 마음은 어느 시대에나 강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얼굴만으로 만족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만족은 가진 것이 줄어서 억지로 참는 체념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보았기에 덜 중요한 것을 내려놓는 자유입니다. 오늘 아침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걱정의 얼굴이 아니라 주님의 얼굴이 되도록 하루의 첫 숨을 기도로 드리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 짧게 함께 기도하며 내일 아침 주님의 얼굴로 깨어나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는 성과로 배부르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일하는 것으로 만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세상의 몫을 다투는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얼굴을 함께 바라보는 예배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밤을 지나는 지체들이 이곳에서 아침의 소망을 함께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병상과 슬픔의 자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이들 곁에 함께 머물며, 깰 때에 뵈올 주님의 얼굴을 서로에게 일깨워 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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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밤에 찾아오셔서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억울함을 사람에게 쏟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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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말하던 입술을 용서하시고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바퀴 자국 같은 주님의 길을

한 걸음씩 걷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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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려보는 눈들 사이에서도

저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 주옵소서.

그 품에서 두려움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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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은혜로 배부르면서

마음이 기름에 닫히지 않게 하시고

원수 갚는 일을 주님께 맡기며

이웃의 고통에 반응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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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몫으로 배부르기보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게 하시고

우리교회가 함께 주의 얼굴을 바라보는

예배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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