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04:01-12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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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맺는 화평을 말한 뒤, 곧바로 교회 안의 싸움과 다툼이 어디서 오는지 묻습니다. 그 뿌리는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이며, 그 정욕은 기도마저 제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만든다고 진단합니다(1-3절). 이어 세상과 벗하는 성도를 간음한 여인들이라 부르며, 우리 영을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4-6절).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며 주 앞에서 낮추라는 열 개의 명령이 쏟아지고(7-10절),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는 당부로 단락이 닫힙니다(11-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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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는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오늘 야고보는 그 그림을 뒤집어 보여 줍니다. 화평이 위로부터 난 지혜의 열매라면, 싸움과 다툼은 땅 위의 지혜가 맺는 열매입니다. 3장 13절에서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물었던 그는, 이제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고 묻습니다. 두 물음은 짝을 이루어 우리 공동체가 어떤 지혜를 따라 살고 있는지 묻습니다. 지혜의 문제는 결국 관계의 문제로, 관계의 문제는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 흩어진 열두 지파의 교회는 가난과 차별과 박해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더 아프게 본 것은 바깥의 압박보다 안에서 벌어지는 다툼이었습니다. 부와 지위를 가진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가르치는 이들이 지혜를 자랑하며 서로를 깎아내렸습니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손에 쥔 작은 것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도 커졌을 것입니다. 이 공동체에게 정욕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예배당 안의 이야기였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을 꾸짖되 내쫓지 않고, 돌아올 길을 함께 보여 줍니다.
# 이 단락은 구약의 언약 전통과 지혜문학, 주님의 말씀이 한데 어우러집니다. 호세아와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남편을 버린 아내로 그렸고, 잠언은 여호와께서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노래합니다(잠 3:34). 주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하셨고, 애통하는 자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7:7; 5:4; 23:12). 베드로도 같은 잠언을 인용하며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권합니다(벧전 5:5-9). 야고보는 이 모든 목소리를 모아 겸손으로 돌아오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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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싸움은 정욕에서 난다
성부 하나님은 정욕의 기도가 아니라 당신을 구하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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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두 개의 물음으로 단락을 엽니다. 너희 중의 싸움과 다툼이 어디서 오느냐고 묻고,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에서 나는 것이 아니냐고 스스로 답합니다.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니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취하지 못하니 다투고 싸운다고 그 과정을 그립니다. 그리고 얻지 못하는 까닭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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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으로 옮긴 말은 본래 전쟁을 뜻하고, 다툼은 전투를 뜻합니다. 야고보는 교회 안의 갈등을 단순한 말다툼이 아니라 전쟁의 언어로 부릅니다. 그리고 그 전쟁터가 어디인지 짚습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입니다. 정욕으로 옮긴 말은 쾌락을 뜻하는 낱말로, 쾌락주의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남보다 위에 올라섰을 때 느끼는 짜릿함, 내 것을 지키고 더 가지려는 이기심이 그 속살입니다. 지체라는 말은 3장 6절에서 혀를 가리킬 때 쓰인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 싸움은 몸의 작은 지체에서 시작되어 공동체라는 한 몸 전체를 무너뜨리는 싸움입니다. 참된 지혜는 화평하게 하지만, 우리의 정욕과 욕심은 싸움과 전쟁을 넘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으며 자신과 공동체를 분열하게 하고 망하게 합니다.
야고보는 그 과정을 맞물린 구조로 보여 줍니다. 싸움과 다툼이 어디서 나느냐는 물음과 다투고 싸운다는 결론이 바깥을 감싸고, 그 안에 정욕과 채워지지 않는 욕심이 들어 있습니다. 살인이라는 말이 지나쳐 보이지만, 유대 전통은 가난한 자를 짓밟거나 그의 필요를 외면하는 일을 살인이라 불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아합이 나봇을 해친 이야기도 모두 시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한한 타인의 몫을 빼앗으려고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며 싸움을 일삼습니다. 지금도 이 욕망의 전쟁은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마저 여러 가지 변형된 모양으로 자리하며 시기와 다툼을 낳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뜻밖의 처방을 내립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 7:7). 그러나 야고보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알맞은 말만 외우면 움직이는 주술이 아니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내 욕망의 도구로 쓰는 일이 아니라, 내 욕망을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놓는 일입니다. 1장 5절에서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신다던 하나님은, 당신을 구하는 자에게는 무엇보다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그러니 싸움의 반대말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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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한 가족과 동료를 돕는 이로,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기와 경쟁의 대상으로 보다가 스스로 무너져 간 사울의 인생을 기억합니다. 지금도 목회와 신앙생활에서 함께한 이들을 향한 마음이 경쟁과 시기로 얼룩진 이들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런 욕망의 부추김에 은근한 동요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잘되는 것에 박수를 쳐 주지 못하고 시기하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내 안의 싸움이 어디서 오는지 정직하게 물어봅시다. 가정에서 다툼이 일어날 때 그 밑에 내가 더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봅시다. 일터에서 동료의 성공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을 감추기보다 그것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구합시다. 내 기도 제목을 한 번 소리 내어 읽어 보고, 그 가운데 정욕으로 쓰려는 것이 있다면 오늘 내려놓읍시다.
우리교회가 서로를 경쟁자가 아니라 한 몸의 지체로 바라보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누군가의 은사가 빛날 때 함께 기뻐하고, 누군가의 자리가 높아질 때 시기하지 않고 박수 쳐 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회가 각자의 욕심을 하늘에 들이미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으로 충만하고 주신 것으로 자족하기를 배우는 자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 분수를 아는 사람이 되어 욕망의 부추김에 넘어가지 않고 오직 주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함께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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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절 세상의 벗, 하나님의 원수
성령 하나님은 우리 영을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시며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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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부릅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단언합니다. 이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영을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는 말씀을 헛된 줄로 아느냐고 묻고,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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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한 여인들이라는 호칭은 거칠게 들리지만, 구약을 아는 이에게는 낯익은 말입니다. 호세아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간 이스라엘을 남편을 떠난 아내로 그렸습니다(호 2:5-7; 렘 3:20). 주님도 당신 시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부르셨습니다(마 12:39). 이 말은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남남 사이에는 간음이 없습니다. 야고보가 이 말을 쓴 것은 성도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신부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벗이라는 말도 가볍지 않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벗은 존재와 운명을 함께 나누는 관계였습니다. 야고보는 2장 23절에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 불렀습니다. 세상의 벗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셈법에 충성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둘 다의 벗이 될 수는 없습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계관은 물신숭배와 약육강식과 폭력이 주를 이루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쾌락을 탐닉하는 풍조입니다. 사람들은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고 그것이 지혜로운 인생인 양 살아갑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 우리의 생사화복을 우리의 힘과 지식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 끝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생각입니다. 5절은 신약에서 풀기 어렵기로 이름난 구절입니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문맥으로 보면 숨은 주어는 하나님이시고, 영은 하나님이 창조 때에 사람 안에 불어넣으신 생명의 영입니다(창 2:7).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 안에 두신 그 영을 질투하시듯 간절히 그리워하십니다. 성경은 이 질투를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랑으로 거듭 말합니다(출 20:5; 34:14).
하나님의 질투는 버림받은 자의 분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야고보는 이 한 구절로 판을 뒤집습니다. 더욱 큰 은혜라는 말은 이미 받은 은혜를 전제합니다. 간음한 아내를 다시 찾아가 값을 치르고 데려온 호세아처럼, 하나님은 떠난 백성을 기다리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신부로 삼으십니다(호 3:1-2). 동사가 현재형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은혜를 주고 계십니다. 야고보는 잠언 3장 34절을 끌어와 그 은혜가 누구에게 흐르는지 말합니다.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주십니다. 이 은혜의 가장 깊은 자리는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는 신부 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엡 5:25).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시는 사랑은 마침내 아들의 피로 값을 치르시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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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구별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이 이 영적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 싸움을 이길 수 없기에 겸손히 주의 은혜를 구합니다. 오늘 내 마음이 어디에 벗을 삼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내 시간과 돈과 관심이 가장 많이 흘러가는 곳이 내 벗이 사는 곳입니다. 가정에서 자녀에게 무엇을 가장 큰 성공으로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갈릴 때 우리는 어느 쪽을 고르고 있습니까. 일터에서는 남들이 다 한다는 이유로 넘어가는 작은 타협이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욕망의 부추김 앞에 절제로 맞서고, 교만을 부추기는 지식 앞에서 제 분수와 정체성을 말씀 앞에 되새깁시다.
우리교회가 세상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들여와 교회를 평가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숫자와 규모와 영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신실하게 살아 내는가로 우리를 돌아보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해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그 사랑 앞에서 다시 첫사랑을 회복하는 교회가 됩시다. 넘어진 지체가 있다면 정죄하기보다 더욱 큰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로 함께 손잡고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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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성자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신 길로 우리를 하나님 가까이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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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그러므로라는 말로 잠언의 약속을 명령으로 바꿉니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라 하며, 그러면 마귀가 피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도 가까이하실 것이라 하고, 죄인들에게 손을 깨끗이 하라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명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 하고, 주 앞에서 낮추면 주께서 높이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7-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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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 절에는 열 개의 명령이 쏟아집니다. 그 명령들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세상을 향한 태도를 번갈아 가며 짝을 짓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라와 마귀를 대적하라가 짝이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라와 손을 깨끗이 하라가 짝입니다. 그리고 첫 명령 복종하라와 마지막 명령 낮추라가 단락을 감쌉니다. 복종으로 옮긴 말은 군대에서 지휘관 아래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그리는 낱말입니다. 억지로 굽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따르려고 늘 깨어 있는 신하의 자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복종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마귀를 대적하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은 오직 주의 말씀에 대한 순복뿐이고, 그렇게 순종하는 길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길입니다.
가까이한다는 말은 제사장이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던 모습에서 온 말입니다. 손을 씻는 것도 성막에 들어가는 제사장의 정결 의식이었습니다(출 30:19-21). 그러나 시편은 이미 그것을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의 문제로 읽었습니다(시 24:4). 깨끗한 손은 우리가 날마다 행하는 일을 구별하는 것이고, 성결한 마음은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려는 두 마음을 버리고 한 마음으로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두 마음이라는 말은 1장 8절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물결을 떠올리게 합니다. 가까이 나아갈수록 우리는 자신이 더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깨끗한 이가 나아가고, 나아간 이가 자기 더러움을 더 깊이 보는 것이 성결의 역설입니다. 그래서 애통이 따라옵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는 말은 감정을 짜내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기 형편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달은 사람의 반응입니다. 세상에 아무 긴장도 없이 웃고 즐기던 삶을 끝내라는 부름입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셨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셨습니다(마 5:4; 23:12). 그 말씀을 몸으로 사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6-8).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는 명령은 우리를 짓누르는 짐이 아니라,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따라오라는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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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며 씨를 뿌리러 나아가는 일을 근신하며 해야 할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겸손히 주께 순복할 때 마침내 주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작은 걸음 하나를 정해 봅시다.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드리는 것, 그것이 가까이 나아가는 길입니다. 내 손에 묻은 것이 무엇인지도 살펴봅시다. 부당하게 얻은 것, 갚지 않은 미안함, 남을 해친 말이 있다면 오늘 씻어 냅시다. 가정에서는 먼저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 봅시다. 낮추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높이실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일터에서는 공을 내 이름으로 쌓기보다 함께한 이들의 이름을 먼저 불러 줍시다.
우리교회가 주 앞에서 함께 낮아지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잘한 일을 자랑하기 전에 우리의 무딘 마음을 먼저 애통하고, 세상의 웃음에 취하기보다 이웃의 눈물에 함께 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두 마음을 부추기지만, 하나님께 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공동체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한 걸음 다가가면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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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2절 서로 비방하지 말라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입법자요 재판관이시며 능히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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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다시 형제들아 하고 부드럽게 부르며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며, 율법을 판단하는 자는 더 이상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재판관 노릇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능히 구원하기도 멸하기도 하시는 한 분뿐이니,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묻습니다(11-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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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으로 옮긴 말은 남을 깎아내려 말한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험담하든 뒤에서 수군거리든, 형제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그 인격을 무너뜨리는 말입니다. 형제를 낮추어 말하여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그 밑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 두 절은 바로 앞의 주 앞에서 낮추라는 명령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지 못한 사람이 형제 앞에서 높아지려 합니다. 이 말씀은 혀를 다룬 3장 1-12절과도 앞뒤로 짝을 이룹니다. 야고보는 4장의 거친 호칭 간음한 여인들, 죄인들을 내려놓고 다시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비방을 멈추라는 권면 앞에서 그 자신이 먼저 형제라는 말로 손을 내밉니다.
그런데 왜 형제를 비방하는 것이 율법을 비방하는 일이 될까요. 야고보가 염두에 둔 율법은 2장 8절에서 말한 최고의 법,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레위기는 그 바로 앞에서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고 명합니다(레 19:16, 18). 형제를 비방하는 사람은 그 계명이 자기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정하는 셈입니다. 율법 아래 서야 할 사람이 율법 위에 올라앉은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재판관이 된 것입니다. 주님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하시며,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내 눈 속의 들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마 7:1-5).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입법자와 재판관으로서 우리를 구원하기도 멸하기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교만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위협만이 아니라 위로입니다. 우리를 재판하시는 분이 구원하실 능력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재판관이 친히 재판을 받는 자리에 서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비방과 거짓 증언을 들으시면서도 주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습니다(벧전 2:23). 하나님은 우리 이웃을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주셨고, 서로 돕고 함께 세워져 가는 공동체로 허락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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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내신 이들을 향한 판단과 비방은 그를 지으신 주님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일이 되어, 우리 스스로 주님의 자리에 서는 교만이 됩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마음과 다르다고 해서 비방하는 일이 사람들과의 교제 가운데 불쑥불쑥 나옵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그를 지으시고 보내시고 붙여 주신 뜻을 생각하며, 그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고 품으려는 긍휼의 마음으로 오늘 사람을 대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누군가에 대해 말하고 싶어질 때, 그 말을 그 사람 앞에서도 할 수 있는지 먼저 물어봅시다. 가정에서는 자리에 없는 가족의 흉을 보지 않기로 합시다. 일터에서는 험담이 오가는 자리에서 한마디를 보태는 대신 조용히 화제를 돌리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교회 안에서 말이 사람을 무너뜨리는 일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들었을 때 퍼뜨리기 전에 먼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요,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요, 땅은 다스림의 대상임을 혼동하지 않고 언행심사에 겸손히 행하기를 원합니다. 재판관의 자리는 하나님께 돌려 드리고, 우리는 서로를 세우는 형제와 자매의 자리에 머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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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나를 지으신 주님,
정욕으로 다투고 시기로 싸우던 저를
오늘 말씀 앞에 다시 세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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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벗하려던 두 마음을 내려놓고
시기하기까지 저를 사모하시는 사랑 앞에
간음한 자의 부끄러움으로 엎드립니다.
그래도 더욱 큰 은혜를 주시는 주님,
그 은혜로 다시 신부의 자리에 서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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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히 주의 통치에 순복하며
주신 것으로 자족하고 주의 은혜를 구하게 하시고
마귀의 속삭임은 단호히 물리치게 하옵소서.
손을 깨끗이,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주 앞에서 낮아지는 길을 걷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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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여 주신 형제들을 판단하지 않고
긍휼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품게 하시고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아니하고
거룩한 길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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