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02:14-26 산 믿음(참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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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지 말라는 권면을 마친 야고보는 이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믿음이 있노라 말하면서 헐벗고 굶주린 형제에게 평안히 가라는 말만 건네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고,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14-17절). 믿음과 행함을 서로 다른 사람이 나눠 가질 수 있는 은사처럼 여기는 생각은 허탄하며,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아는 지식만으로는 귀신의 믿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18-20절).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는 순종으로, 라합은 사자들을 맞아들인 환대로 그 믿음이 살아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21-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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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영광의 주를 믿는 사람이 가난한 자를 차별해서는 안 되며,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는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긍휼이 실제로 어떤 모양인지를 보여 줍니다. 긍휼은 마음에 품은 고운 생각이 아니라 헐벗은 형제의 몸에 쓸 것을 건네는 손입니다. 1장에서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라고 했던 권면이 여기서 믿음과 행함의 문제로 깊어지고, 3장에서는 그 믿음이 다시 혀와 말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차별과 빈말과 혀는 모두 같은 병의 다른 얼굴입니다. 믿는다는 말과 사는 삶이 서로 갈라진 두 마음의 병입니다.
# 흩어진 열두 지파의 성도들 가운데는 오늘 먹을 양식이 없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날품으로 하루를 살던 사람에게 일이 끊기면 그날 저녁이 끊겼고, 겉옷 한 벌이 밤의 이불이던 사람에게 그 옷이 해지면 겨울이 그대로 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 형제자매가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낯선 이방이 아니라 한 식탁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던 지체들입니다. 야고보가 그리는 장면은 가상의 예이지만, 그들이 날마다 겪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권면은 책상 위의 신학 토론이 아니라 오늘 저녁 누가 굶는가 하는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 이 단락은 잠언과 예언서의 오랜 목소리를 잇습니다.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고 헐벗은 자를 입히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는 말씀이 그 뿌리입니다(사 58:7). 주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마 7:21).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본문 전체에 울립니다. 야고보는 그 가르침을 자기 말로 되새겨, 믿음의 진정성은 고백이 아니라 열매가 보여 준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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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7절 행함 없는 믿음은 무익하다
성부 하나님은 헐벗은 자녀의 몸에 쓸 것까지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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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다시 내 형제들아 부르며 묻습니다. 믿음이 있노라 말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으며,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한 장면을 그립니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자매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 하고 몸에 쓸 것은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14-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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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믿음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구원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그 믿음은 바로 앞에서 말한 믿음, 곧 있노라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방식입니다. 믿는다는 고백이 입술에서 끝나고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이름만 남은 믿음입니다. 14절과 16절에 되풀이되는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는 물음이 이 단락을 감싸 안습니다. 말만 있는 믿음은 굶주린 형제에게도 유익이 없고, 그렇게 말하는 자기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형제는 여전히 춥고 배고프며, 말한 사람은 자기가 믿음이 있다는 착각 속에 더 깊이 갇힙니다. 그래서 행함 없는 믿음은 두 사람을 함께 해칩니다.
16절의 평안히 가라는 당시 사람들이 헤어질 때 나누던 인사입니다. 그 평안은 구약의 샬롬을 떠올리게 합니다. 샬롬은 싸움이 없는 상태에 그치지 않고, 몸과 삶과 관계가 온전히 채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샬롬은 옷이고, 주린 사람에게 샬롬은 빵입니다.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말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알면서 주지 않은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은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넉넉한 지체가 손을 펴지 않는 동안, 가난한 형제의 그 기도는 응답을 기다리며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었던 셈입니다. 17절은 그런 믿음을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부릅니다. 겉으로는 믿음의 모양을 갖추었으나 속에 생명이 없다는 뜻입니다.
2016년에 이 본문을 묵상하며 적은 말이 있습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닌 관계이고, 신념이 아닌 신뢰이기에 거창한 이론과 말이 아니라 진실한 행함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몸에 쓸 것까지 아시고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을 맡기신 손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 헐벗은 형제 앞에서 빈말로 돌아서는 것은 아버지의 손을 거두는 일이 됩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하나님이 보시는 곳을 함께 보고, 하나님이 채우시는 일에 손을 보태는 믿음입니다. 율법은 일찍부터 이웃의 겉옷을 전당 잡았으면 해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이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이의 밤 추위까지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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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믿음은 행함을 동반하며,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합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두려움과 고난과 궁핍함 가운데서 아무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말로만 도와준다 하고 실제로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참 쉽게 합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그 말로 대화를 서둘러 끝내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 돌아봅니다. 나의 믿음은 실제로 나에게 구원 얻는 유익을 누리게 하고, 그 유익이 이웃에게 증거되고 있습니까. 가정에서는 배우자와 자녀가 말보다 먼저 손을 보고 자랍니다. 위로의 말 한마디와 함께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차리는 것이 믿음의 언어입니다. 일터에서도 형편이 어려운 동료에게 힘내라는 말만 하고 돌아서지 않고, 내가 덜어 줄 수 있는 짐 하나를 찾아봅시다. 우리교회 안에도 말하지 못하는 형편으로 겨울을 맞는 지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의 사정을 조용히 살피고, 드러나지 않게 쌀 한 포대와 겉옷 한 벌이 건너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평안히 가라는 인사가 우리교회에서는 몸에 쓸 것과 함께 건네지는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제부와 목장 모임이 서로의 형편을 나누는 통로가 되게 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가 부끄럽지 않게 손을 내밀 수 있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이번 주에는 기도하겠다고 말했던 한 사람을 떠올리고, 그 기도에 손을 하나 더 얹어 봅시다. 전화 한 통, 반찬 한 그릇, 함께 가 주는 병원 길처럼 작은 것이면 충분합니다. 큰일을 하려다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다 작은 것 하나를 오늘 건네는 편이 낫습니다. 도움을 받는 이의 체면을 지켜 주는 조심스러움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조용히 건넵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은 그것이 우리를 거쳐 가난한 형제에게 흘러가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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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0절 행함 없는 믿음은 헛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머리에 머문 믿음을 순종하는 삶으로 살려 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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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가상의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다고 말하며 믿음과 행함을 서로 다른 몫처럼 나누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행함 없는 믿음을 보여 달라고 되묻고, 자신은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겠다고 합니다. 이어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 것은 잘하는 일이지만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말하며, 행함 없는 믿음이 헛것임을 일깨웁니다(18-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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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은 신약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 어디서 끝나는지 따옴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뜻은 분명합니다. 이 사람은 믿음과 행함을 마치 여러 은사처럼 각자 다르게 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너는 믿음의 은사를, 나는 행함의 은사를 받았으니 서로 존중하자는 말처럼 들립니다. 야고보가 공격하는 것이 바로 이 나눔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구분할 수는 있어도 나눌 수는 없습니다. 보이라는 말이 그 논리를 드러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보여 줄 길이 없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19절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고백은 이스라엘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외우던 쉐마의 첫머리입니다(신 6:4).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보다 더 확실한 신앙고백은 없었습니다. 야고보는 그 고백을 잘하는도다 하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덧붙입니다. 복음서에서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인 줄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알았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른 교리를 아는 것과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쉐마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고백 바로 뒤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붙여 두었습니다. 고백과 사랑을 떼어 놓으면 쉐마가 반 토막이 됩니다. 귀신의 떪은 회개가 아니라 두려움이고, 그 두려움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지 못하고 멀리 달아나게 합니다.
20절의 허탄한 사람아는 속이 빈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는 말도 열매 맺지 못하는 것, 일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습니다.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자기 확신이나 자기 기만의 신앙일 뿐입니다. 단순한 앎이나 지적 유희, 한때의 감동에 머무는 믿음은 그 자체로 끝나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은 머리에 머문 믿음을 손과 발로 흘러나오게 하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참된 믿음은 삶의 열매로 드러나고 증거되며, 실제적인 변화와 성숙을 가져옵니다. 아는 믿음이 사랑하는 믿음으로, 떠는 믿음이 따르는 믿음으로 자라는 것, 그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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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주인을 바꾸는 영접이 있었는데도 언행심사의 변화와 성숙이 없다면, 그것은 생명을 수혈받고도 살지 못하는 죽은 가지와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 지식이 많고 신앙의 언어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귀신도 정답은 압니다. 우리를 귀신과 다르게 하는 것은 아는 양이 아니라 사랑하며 따르는 걸음입니다. 내게는 믿음의 열매와 변화와 성숙을 증거로 보여 줄 수 있는 언행심사의 열매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숙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가정에서 나의 믿음은 가족이 가장 먼저 알아봅니다. 예배당에서의 모습과 식탁에서의 모습이 다르다면 아이들은 말이 아니라 그 차이를 배웁니다. 부모가 먼저 사과하고 먼저 용서하는 모습을 볼 때, 자녀들은 설교보다 더 깊이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저녁 식탁에서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작은 섬김 하나를 실천해 봅시다. 일터에서는 정직한 계산 한 번, 약속을 지키는 한 번이 신앙고백보다 크게 들립니다. 우리교회가 아는 것을 자랑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아는 만큼 살아 내려고 애쓰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공부와 묵상 나눔이 지식을 쌓는 시간에 그치지 않고, 그 주간에 실천할 순종 하나를 정하는 시간이 되게 합시다. 이번 주에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 살아 내지 못한 말씀 하나를 정해, 오늘 한 걸음이라도 그 말씀을 따라가 봅시다. 성령께서 우리의 작은 순종을 붙들어 살아 있는 믿음으로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하루를 마치며 오늘 내가 안 것과 내가 산 것 사이의 거리를 정직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그 거리를 부끄러워하되 낙심하지는 맙시다. 그 거리를 좁혀 가는 것이 성화의 길이고, 그 길을 성령께서 함께 걸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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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6절 의를 드러내지 못하는 믿음
성자 예수님은 믿음과 행함을 한 몸으로 이루사 우리를 하나님의 벗이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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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두 증인을 세웁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그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며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져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불렸습니다. 이방 여인 라합도 사자들을 맞아 다른 길로 보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21-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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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절은 이 단락의 열쇠입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다는 말은 원어로 보면 계속해서 함께 일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차례로 오는 두 단계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손을 맞잡고 일하는 동역자입니다. 이어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온전하다는 말은 1장 4절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할 때의 그 말과 같은 뿌리입니다. 무언가를 덧붙여 완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라서 무르익는다는 뜻입니다. 행함은 믿음에 더해지는 부록이 아니라 믿음이 열매로 익어 가는 과정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어서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이기에 열매를 맺는 것과 같습니다.
24절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라는 말은 오랫동안 바울과 부딪치는 말로 읽혀 왔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른 자리에서 다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거부한 행위는 할례와 음식법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는 율법의 행위였습니다. 야고보가 요구하는 행함은 헐벗은 형제에게 옷을 건네는 긍휼,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순종입니다. 바울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이 효력이 있다고 했습니다(갈 5:6). 바울은 믿음의 뿌리를, 야고보는 믿음의 열매를 말합니다. 뿌리 없는 열매도 없고 열매 없는 뿌리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을 믿은 그 믿음이 22장의 모리아 산에서 무르익은 것이고, 그 삶 전체를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벗이라 부르셨습니다.
라합은 아브라함과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고 라합은 이방의 기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숨 쉬는 믿음만은 같았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왕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고, 그 믿음은 목숨을 건 환대로 드러났습니다. 26절의 영혼으로 옮긴 말은 숨, 호흡이라는 뜻도 지닙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은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 사람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숨이 몸에 더해진 덤이 아니듯 행함도 믿음에 더해진 덤이 아닙니다. 숨이 끊어진 몸이 주검이듯 행함이 끊어진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이 한 번도 갈라진 적 없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까지 순종하신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벗이라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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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라합은 자신들의 믿음이 말뿐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과 열매로 나타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불렸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믿음, 참된 믿음은 행함과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 일치된 모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벗이 되기를 원합니다. 벗은 말보다 함께 보낸 시간으로 우정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과의 우정도 그분이 원하시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손을 내어 드릴 때 깊어집니다. 라합의 믿음은 집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닫아 두었던 문 하나를 여는 데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가정에서는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 둔 대화의 문을 열고, 일터에서는 늘 피하던 동료에게 먼저 인사의 문을 열어 봅시다. 우리교회가 낯선 이웃과 지친 이웃에게 문을 열어 맞아들이는 라합의 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땅에 일하러 와서 말도 서툰 이웃들, 홀로 지내시는 어르신들, 교회에 상처를 입고 떠났다가 조심스레 다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우리교회 문턱에서 먼저 환대를 만나게 합시다. 처음 교회 문을 연 사람이 따뜻한 환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경험하게 합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다는 말씀 앞에서 오늘 나의 믿음이 숨 쉬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숨은 들이쉬기만 해서는 살 수 없고 내쉬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이쉬고 사랑을 내쉬는 하루가 될 때 우리의 믿음은 살아 숨 쉴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순종이 주님의 살아 계심과 함께하심을 세상에 보여 주는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순종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하나님과 동행하며 무르익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내딛는 작은 순종 하나가 그렇게 쌓여 언젠가 우리도 하나님의 벗이라 불리는 삶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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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나의 구원의 주님,
말뿐인 믿음에 머물던 저를
오늘 말씀 앞에 다시 세우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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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고 주린 형제 앞에서
평안히 가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서지 않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주신 일용할 양식이
제 손을 거쳐 이웃에게 흘러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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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도 아는 정답에 머물지 않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게 하옵소서.
머리에 머문 믿음을
성령께서 손과 발로 살려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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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에게 믿음과 행함이 하나 되는 믿음을 주셔서
유익을 얻고 또 나누게 하시고
언행심사와 관계 가운데 거룩의 열매를 맺어
우리 주님의 살아 계심과 함께하심을
삶으로 증거하는 증인 되게 하옵소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벗으로
라합처럼 문을 여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