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01:12-18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by 평화의길벗 posted Oct 1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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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01:12-18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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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시험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와, 시련을 견디어 낸 자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는 복을 선언합니다(12절). 그러나 같은 시험이 유혹으로 바뀌는 자리도 있습니다.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께 받는다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욕심이며,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사망을 낳습니다(13-15절). 그러니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고, 그분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첫 열매로 낳으셨습니다(16-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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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권면으로 시작해, 부한 자의 영광이 풀의 꽃처럼 지나간다는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시험이라는 낱말을 다시 붙잡습니다. 어제가 시험을 대하는 태도를 말했다면 오늘은 시험의 끝과 뿌리를 말합니다. 견딘 자의 끝은 생명의 면류관이고, 넘어진 자의 뿌리는 자기 욕심입니다. 서신은 사건으로 이어지지 않고 같은 주제를 되풀이하며 깊어지는데, 오늘이 그 첫 번째 되풀이이고, 이 되풀이는 편지 끝 5장의 인내 권면까지 이어집니다.

# 흩어진 성도들에게 시험은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날품을 팔아 하루를 버티는 가난, 부자들의 업신여김, 법정에 끌려가는 억울함이 날마다 이어졌습니다. 그 고단함이 길어지자 어떤 이들은 믿음을 놓았고, 넘어진 핑계를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험을 주셨으니 내가 넘어진 것도 하나님 탓이라는 말이 공동체 안에 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난이 길면 원망은 늘 가장 가까운 분을 향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말을 정면으로 다루며, 시험의 책임이 어디에 있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함께 밝힙니다.

# 오늘 본문에도 산상수훈과 지혜문학이 함께 울립니다. 복이 있나니로 여는 첫 줄은 주님의 팔복을 닮았고,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늘 아버지를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이 빛들의 아버지에게서 다시 들립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는 비유는 음녀의 유혹에 끌려가는 젊은이를 그린 잠언의 장면과 겹칩니다. 야고보는 그 오랜 지혜를 시험받는 나그네 교회의 언어로 새롭게 다시 씁니다. 주님께 들은 말씀이 흩어진 성도의 일상 속으로 번역되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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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시험을 참는 자의 복

성자 예수님은 사랑으로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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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때문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시험을 기쁘게 여겨야 할 까닭이 사람을 온전하게 빚는 데 있었다면, 오늘은 그 길의 끝에 놓인 약속을 보여 줍니다. 그 면류관은 공을 세운 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시험과 인내, 사랑과 생명이 짧은 한 절 안에 촘촘히 엮여 있습니다(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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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시편 첫 줄과 산상수훈의 팔복에 쓰인 바로 그 선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형편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이 누리는 생명다움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도, 애통하는 자도, 박해받는 자도 복이 있다고 선언될 수 있습니다. 복은 소유의 말이 아니라 관계의 말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시험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을 향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시험이 끝난 뒤에 복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참고 있는 그 사람이 이미 복의 자리에 있다는 뜻입니다. 참는다는 말은 4절의 인내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오기가 아니라 짐 밑에 머물러 있는 것,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가 끝까지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던 것처럼, 견딤은 오래전부터 하나님 백성의 표지였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낸 자로 옮긴 말은 불 속에서 검증되어 진짜로 판명된 금속을 가리킵니다. 3절의 믿음의 시련과 같은 낱말 가족입니다. 시험은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진짜인지를 드러냅니다. 면류관은 경기에서 끝까지 달린 사람에게 씌우던 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월계수 잎은 며칠이면 시들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면류관은 생명이라는 면류관, 곧 시들지 않는 생명 자체입니다. 그것은 내 바깥에 걸리는 장식이 아니라 내가 누리게 될 하나님의 생명이며, 한 사람의 우승자가 아니라 이 광야를 믿음으로 건넌 모든 이에게 주어집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관을 주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서머나교회에 주어진 것처럼, 이 약속은 핍박받는 나그네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지금 가진 것이 없어도 그들은 시들지 않는 관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그 면류관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험을 통해 확인하시는 것은 업적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바치라 하실 때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낮추실 때도 하나님이 알고자 하신 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였습니다. 견디게 하는 힘도 결국 사랑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견디는 사람은 보상이 늦어지면 무너지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 곁에 머무는 것 자체로 견딥니다. 모세가 고별설교에서 마음을 다하라 했을 때 그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언약에 대한 신실함이었습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견디신 분은 우리 주님이셨고, 우리는 그 사랑에 기대어 오늘을 견딥니다. 면류관은 사랑의 값으로 사는 상품이 아니라, 사랑하며 견딘 자녀에게 아버지가 기꺼이 씌워 주시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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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여정에서 당하는 시련은 우리를 빚어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의 광야학교 필수과목입니다. 시련의 순간마다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들 때마다 주님은 격려와 위로의 사람들을 곁에 붙이셔서 이길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픈 만큼 자라 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정답을 말해 주는 것보다 곁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설명보다 함께 앉아 있는 시간이 더 큰 말이 됩니다. 아파하는 형제 곁에 함께 앉아 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만으로도 귀한 일입니다. 가정에서 지쳐 있는 식구에게, 일터에서 무너지는 동료에게 오늘 한 사람의 곁이 되어 줍시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날이 오면 이 모든 인내가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가 시련을 지나는 지체를 혼자 두지 않고, 함께 견디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장과 소그룹에서 서로의 짐을 묻고, 기도 제목을 나누고, 주일에 보이지 않는 이를 한 번 더 찾는 작은 일들이 그 공동체를 이룹니다. 함께 견딘 시간은 나중에 서로를 알아보는 표지가 되고, 그 표지가 곧 교회의 얼굴이 됩니다. 시련 중에 있는 분이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지키십시오. 면류관은 끝까지 사랑한 사람의 것이고, 그 사랑마저 주님이 먼저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지쳤다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지친 그대로 주님 곁에 머무십시오. 병상에 있는 지체, 오랜 실직과 빚으로 지친 가정, 자녀 문제로 밤잠을 설치는 부모를 위해 이름을 불러 기도하고 한 번 더 찾아가는 일이 우리가 함께 견디는 방식입니다. 오늘 나를 견디게 하는 것이 보상에 대한 기대인지, 주님을 향한 사랑인지 조용히 돌아봅니다. 견딤의 이유가 사랑으로 바뀌면 같은 시련도 다른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 사랑이 식어 있다면 견딤을 다짐하기 전에 먼저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다시 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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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5절 욕심에 끌려 미혹됨

성부 하나님은 아무도 악으로 시험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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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험이 이번에는 유혹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야고보는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넘어지는 까닭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고, 그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자라 마침내 사망을 낳습니다(13-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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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에서 시험이라는 낱말의 뜻이 바뀝니다. 2절과 12절의 시험이 믿음을 단련하는 시련이었다면, 여기서는 죄로 끌어가는 유혹입니다. 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시련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유혹이 됩니다. 병과 가난과 억울함 앞에서 하나님을 더 붙드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을 탓하며 놓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표현은 신약에 단 한 번 나오는 낱말로, 하나님은 악의 영향 밖에 계시고 악으로 사람을 꾀는 일과 아무 상관이 없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친히라는 말은 그 부정을 더 단단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시험의 상황을 허락하실 수는 있어도 그것이 우리를 넘어뜨리는 덫이 되도록 의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고 피할 길을 내신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에는 언제나 출구와 목적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을 죽음으로 끌고 가려는 꾐에는 하나님의 손이 닿아 있지 않습니다.

14절의 끌려와 미혹됨은 낚시와 사냥에서 쓰던 말입니다. 물고기를 미끼로 끌어내고 덫으로 낚아채는 장면입니다. 미끼는 늘 먹음직스럽습니다. 욕심은 언제나 정당한 얼굴을 하고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낚이는 줄 모르고 끌려갑니다. 여기서 욕심으로 옮긴 낱말 자체는 중립적인 욕구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욕구는 창조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 욕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 삶의 목적이 될 때 욕심이 됩니다. 유대 지혜 전통은 이것을 사람 안의 악한 충동이라 불렀고, 야고보는 그 책임을 다른 누구에게도 돌리지 않습니다. 욕구를 미워하는 금욕도, 욕구에 몸을 맡기는 방임도 답이 아닙니다. 욕구를 주신 분께 그 고삐를 돌려 드리는 것이 길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 욕심에, 라는 말이 거듭 그것을 강조합니다. 사탄의 이름조차 꺼내지 않는 것은 핑계 댈 자리를 남기지 않으려는 목회자의 단호함입니다.

15절은 욕심의 족보입니다. 욕심이 잉태하고, 죄를 낳고, 그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습니다. 장성한다는 말은 4절에서 인내가 온전하게 이룬다는 말과 같은 뿌리입니다. 하나님께 맡긴 시험은 사람을 온전하게 자라게 하지만, 욕심에 맡긴 시험은 죄를 온전히 자라게 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시험하신다며 원망했고 탐심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같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시고 아들 됨을 지키셨습니다. 그 주님이 지금 시험받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시기에 욕심의 족보는 끊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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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험과 시련은 우리 안의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분수를 모르고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 가지고 올라가고 누리려다 보면 유한한 자원 안에서 시기와 다툼이 일고, 경쟁 속에서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편법과 불법이 끼어들고, 시간이 지나면 거기에 무감각해집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시험이라 하고 하나님의 뜻이라 하며 곁의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건강도, 가정의 일도, 일터의 일도, 교회의 일도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평안과 누림은커녕 죽도록 일만 하다가 정말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잠시 길게 호흡하며, 내 힘으로 붙잡고 이를 악물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하나씩 주님께 의뢰하고, 포기하고 나누고 베풀 것이 보이면 지금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교회 안에서도 더 크게, 더 많이를 믿음의 이름으로 포장하지 않도록 서로 깨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역의 열매를 숫자로 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그것이 누구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함께 묻는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가정에서는 자녀에게 더 높이 오르라는 말보다 함께 머무는 시간을 먼저 주고, 일터에서는 성과를 위해 눈감아 온 작은 편법이 없는지 살펴봅시다. 욕심은 작을 때 끊어야 합니다. 잉태되기 전에, 장성하기 전에 말씀 앞에 드러내고 고백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오늘 하루 무엇을 더 가지려 했는지 저녁에 한 번 적어 보는 것도 욕심의 싹을 알아보는 좋은 훈련입니다. 그리고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는 기도로 하루를 닫읍시다. 감사는 욕심이 자랄 자리를 미리 차지하는 은혜의 씨앗입니다. 감사가 많은 집에는 욕심이 들어설 틈이 좁습니다. 무엇보다 넘어졌을 때 하나님 탓을 하는 입술을 멈추고, 내 안의 욕심을 정직하게 이름 불러 고백합시다. 정직한 고백이 있는 곳에서 욕심의 족보는 끊어지고, 주님은 그 자리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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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8절 스스로 속지 말라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 생명의 첫 열매로 낳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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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사랑하는 형제들을 부르며 속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넘어뜨리신다는 생각이야말로 속임수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모두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고, 그분은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고,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16-18절). 시험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다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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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말라는 말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욕심에 끌려 넘어지고도 하나님을 탓하는 사람은 남을 속이기 전에 먼저 자기를 속입니다. 핑계는 언제나 자기기만에서 시작됩니다. 야고보는 이 단호한 금지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는 부름에 실어 보냅니다. 꾸짖음이 아니라 붙드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속임의 반대편에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를 세웁니다. 하나님은 악으로 꾀시는 분이 아니라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내려오나니는 지금도 계속 내려오고 있다는 현재형이고, 5절의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 여기서 다시 고백됩니다. 좋은 은사는 주시는 행위를, 온전한 선물은 주어진 것을 가리키는데, 주시는 방식도 주시는 내용도 모두 선하다는 뜻입니다.

빛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은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신 창조주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해는 지고 달은 이지러지며, 해가 움직이는 대로 땅 위의 그림자도 길어졌다 짧아졌다 돌아갑니다. 변함과 회전하는 그림자는 천체의 운행과 밤낮의 바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빛들은 변하지만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 빛이 기울어 우리 쪽에 그늘이 지는 일이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시험이 길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이 돌아섰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돌아선 것은 우리가 선 자리이지 그분의 빛이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은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고, 권태를 모르며, 우리가 놓아 버린 손을 먼저 놓지 않으십니다. 구하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 아버지를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이 여기서 다시 울립니다.

18절에서 야고보는 그 선물의 절정을 말합니다. 자기의 뜻을 따라라는 말이 문장 맨 앞에 놓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심을 강조합니다. 욕심은 죄와 사망을 낳았지만,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두 개의 출산이 마주 서 있습니다. 첫 열매는 추수의 맨 처음 거둔 것으로 하나님께 구별해 드리던 소산이며, 앞으로 거둘 온 추수의 보증입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온 피조물의 첫 열매입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주신 아버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실 리 없습니다. 다른 서신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듯, 이미 가장 좋은 것을 주신 분이 그보다 못한 것으로 우리를 꾀실 까닭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 창조가 지금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시험의 날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상황의 크기가 아니라 우리를 낳으신 그 말씀입니다. 말씀이 침묵하면 상황이 커 보이고, 말씀이 들리면 아버지가 다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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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한결같으신 빛들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말씀으로 낳으시고, 날마다 그 진리의 말씀으로 자라게 하고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며 주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뜻대로 쓰고 누리고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고 착각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무한한 공급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면 우리는 유한한 자원 안에서 끝없이 탐욕에 쫓기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는 말씀을 잊어버립니다. 오늘 내 소유와 시간과 관계의 주권이 주께 있음을 다시 고백합시다. 가정의 살림과 일터의 성과를 내 것이라 움켜쥐었다면 속지 말고 돌이킵시다. 우리교회가 받은 선물을 쌓아 두지 않고 흘려보내어, 변함없으신 아버지의 선하심을 이 땅에 비추는 첫 열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좋은 것 가운데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씩 헤아려 보고, 그 가운데 하나를 오늘 누군가에게 나누는 것으로 고백을 시작합시다. 관리하고 사용하고 보존하며 남겨야 할 것을 내 뜻대로만 써 왔다면 지금 회개하고 회복의 길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만, 그분께 맡긴 작은 것은 첫 열매처럼 온 추수의 약속이 됩니다. 시험의 계절에도 아버지의 빛은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빛 아래서 받은 것을 세어 보는 사람은 잃은 것만 세는 사람보다 훨씬 덜 흔들립니다. 오늘 하루, 위로부터 내려온 선물 세 가지를 적어 보며 아버지의 한결같으심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내 마음이 변덕스러울 때마다 변하지 않으시는 분께 시선을 고정합시다. 내 마음의 날씨가 바뀌어도 아버지의 빛은 그대로이며, 그 빛 아래서 우리는 오늘도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 첫 열매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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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변함없이 신실하신 아버지 하나님,

진리의 말씀으로 저희를 낳으시고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로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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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으로 얼룩진 인생일지라도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향해

다시 걸어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시련 앞에서 이를 악물기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견디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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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하는 시련이 저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을 깨닫고 내려놓을 용기와 믿음을 주옵소서.

넘어진 핑계를 주께 돌리지 않고 스스로 속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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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빛들의 아버지,

주께서 연단해 가시는 손길을 바라보며 변함없이 인내로 경주하게 하시고

받은 선물을 움켜쥐지 않고 가난한 이웃과 기꺼이 나누는

우리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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