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1:01-12 벧엘의 울음, 맹세는 지키고 생명은 버린 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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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과의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은 미스바에서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한 맹세를 떠올립니다(1절). 백성은 벧엘에서 저녁까지 큰 소리로 울며 어찌하여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묻고, 이튿날 제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2-4절). 그러나 그들은 맹세를 거두는 대신 또 하나의 맹세, 곧 미스바에 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던 맹세를 꺼내 들고 야베스 길르앗에서 한 사람도 오지 않았음을 찾아냅니다(5-9절). 회중은 용사 만 이천 명을 보내 그 성읍을 치게 하고, 젊은 처녀 사백 명만 살려 실로 진영으로 데려옵니다(10-12절). 화자는 그곳을 가나안 땅이라 부르며 이 장면을 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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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이스라엘 연합군은 기브아를 불사르고 베냐민의 성읍들을 차례로 쳤습니다. 칼을 빼는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 명이 쓰러졌고, 겨우 육백 명이 광야의 림몬 바위로 도망하여 넉 달을 숨어 지냈습니다. 한 레위 사람의 첩이 기브아에서 짓밟혀 죽은 일에서 시작된 분노가 끝내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를 거의 지워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전쟁의 연기가 걷힌 뒤의 풍경입니다. 이긴 쪽은 울고 있고, 그 울음 끝에서 또 하나의 칼이 뽑힙니다.
# 본문의 첫 절은 시간을 조금 되돌립니다. 전쟁을 결의하던 미스바 총회에서 이스라엘은 두 가지를 맹세했습니다. 자기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않겠다는 것과, 미스바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사람이 되돌릴 수 없는 말로 여겨졌습니다. 서원하거나 결심하려고 맹세하였으면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하라는 규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민 30:2). 그러나 사사기에서 맹세는 한 번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입다의 서원이 그의 무남독녀를 삼켰던 기억이 아직 이 책 안에 선명합니다.
#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 동편 길르앗 땅의 성읍으로 므낫세 지파의 영역에 속했습니다. 이 성읍은 뒷날 사무엘상에서 다시 나옵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야베스를 에워쌌을 때 베냐민 사람 사울이 달려와 구원하였고(삼상 11장),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전사하자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한 이들도 야베스 사람들이었습니다(삼상 31장). 두 곳 사이의 끈끈한 인연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오늘 본문이 짐작하게 합니다. 실로는 여호수아 시대에 회막을 세우고 땅을 제비 뽑아 나눈 곳입니다. 그 거룩한 기억의 자리로 사백 명의 처녀가 끌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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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벧엘에서 운 저녁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보다 돌이킴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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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자 백성은 벧엘로 올라가 저녁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앉아 목소리를 높여 웁니다. 그러고는 어찌하여 한 지파가 없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2-3절). 한 지파를 지운 칼은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는데, 물음의 주어는 하나님이 되어 있습니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4절). 그러나 울음도 제사도 그들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 저녁 내내 하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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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더라는 말로 시작합니다(1절). 지난 일을 끌어와 앞에 놓는 구약 내러티브의 회상 기법이어서, 새번역은 아예 맹세한 일이 있었다고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 맹세의 속뜻이 무섭습니다. 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방 족속에게나 하던 처분입니다. 형제 지파를 가나안 사람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더 아픈 것은 그들이 정작 가나안 족속의 딸들은 거리낌 없이 데려다 아내로 삼고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었다는 사실입니다(삿 3:6). 이방인과의 혼인에는 너그럽던 입이 형제 앞에서는 여호와의 이름까지 걸어 빗장을 질렀습니다. 기준이 말씀이 아니라 그날의 분노였다는 증거입니다.
벧엘의 울음은 낯선 장면이 아닙니다. 베냐민에게 두 번 패했을 때에도 그들은 벧엘에서 울고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삿 20:23, 26). 원문은 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는 표현을 겹쳐 두어 울음의 크기를 들리게 합니다.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이번에는 이겼는데도 진 것처럼 운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승리가 사실은 승리가 아니었다는 암시입니다. 기도는 어찌하여로 시작합니다. 원문은 반드시 하나님을 주어로 세우지 않아서,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 오늘 한 지파가 없어지게 되었습니까 정도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그 물음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칼을 든 손이 자기 손이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스무째 장에서 세 번이나 물음에 답해 주시던 분이 이 저녁에는 잠잠하십니다. 올라가라고, 내일은 넘겨주겠다고 일러 주시던 그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묻는 말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하리이까였고 지금은 어찌하여 이러십니까입니다. 그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보입니다. 아직 그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튿날 쌓은 제단과 뜨거운 예배 뒤에도 그들의 생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베냐민을 짓밟던 방식 그대로 이제 다른 성읍을 해치기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로 옮기는 신약의 낱말은 본래 생각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눈물과 제사만으로는 그 일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사사기 2장에서 백성은 책망을 듣고 소리를 높여 울었고 그곳을 우는 자들이라 불렀지만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제 책의 끝에서 그들은 자기가 만든 폐허 앞에서 다시 웁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상한 심령입니다(시 51:17). 부서진 마음이란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똑바로 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그 마음이 깨어나기를 기다리시는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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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자주 벧엘에 앉아 웁니다. 관계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갈라진 뒤에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 물음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시편에는 왜냐고 묻는 탄식이 가득하고 하나님은 그 물음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물음 앞에 먼저 놓여야 할 물음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에게는 눈물로 부르짖는 기도의 전통이 있습니다. 새벽마다 철야마다 흘린 눈물이 우리를 여기까지 지켜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눈물이 많다고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뜨겁게 기도하면서도 끝내 같은 방식으로 서로를 몰아세우는 모습을 우리는 더러 보아 왔습니다. 오늘은 기도의 순서를 한 번 바꾸어 보십시오. 하나님께 왜냐고 여쭙기 전에 내가 넘은 선이 어디였는지를 먼저 여쭈어 보십시오. 그 정직한 물음에서 참된 예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잠잠하신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면, 어쩌면 우리가 아직 그 물음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와의 사이가 멀어졌을 때, 부부 사이에 찬바람이 불 때 우리는 쉽게 상황을 탓합니다. 일터에서도 일이 틀어지면 먼저 탓할 사람부터 찾습니다. 누군가 내게 마음을 다쳤다고 말해 오거든, 그 사람의 아픔을 우리 모임이 이지러졌다는 걱정으로 바꾸어 말하지 마십시오. 한 지파가 끊어졌다고 울던 이들은 끝내 베냐민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 회복의 첫걸음입니다. 우리교회가 우는 교회이기보다 돌이키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눈물이 마른 뒤에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함께 물을 줄 아는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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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절 명부를 펼치는 손
성령 하나님은 문자에 갇힌 우리를 생명과 긍휼로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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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드린 뒤 이스라엘 자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출석을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크게 맹세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5절). 그들은 형제 베냐민을 두고 뉘우치며 오늘 한 지파가 끊어졌다고 말하면서도, 딸은 줄 수 없다는 맹세는 그대로 둡니다(6-7절). 그러고는 명부를 펼쳐 야베스 길르앗에서 한 사람도 오지 않았음을 찾아냅니다(8-9절). 맹세를 거두는 길 대신 맹세를 지킬 길을 고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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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21장에 나오는 두 맹세는 모두 감정이 격앙된 자리에서 전의를 북돋우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모든 지파를 전쟁에 끌어내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이제 부메랑처럼 그들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사사기에서 맹세는 언제나 부정적인 자리에 놓입니다. 입다의 서원이 그러했고 이 두 맹세도 그러합니다. 다만 비극의 뿌리는 맹세라는 제도가 아니라 그것을 떠받친 비뚤어진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하시며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 5:37)고 가르치셨을 때, 그 말씀은 사사기의 긴 그림자를 향한 대답처럼 들립니다. 말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말의 주인이 아니라 말의 포로가 됩니다. 맹세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는 일인데, 분노가 그 자리에 앉으면 하나님의 이름은 내 고집의 울타리가 됩니다.
6절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다고 기록합니다. 뉘우쳤다로 옮긴 히브리어 낱말은 안타까워하다, 슬퍼하다, 후회하다, 위로를 얻다로도 번역되는 말이어서, 여기서는 죄를 자복했다기보다 안타까워했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들이 정말 과도한 폭력을 잘못으로 인정했다면 맹세를 취소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풀렸을 것입니다. 호칭을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화자는 베냐민을 그들의 형제라 부르지만, 정작 이스라엘 자손의 입에서는 베냐민이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라고만 말합니다. 아파한 것은 형제의 고통이 아니라 열두 지파라는 이스라엘의 모양이 이지러진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경솔한 맹세 앞에서 다른 길은 없었을까요. 율법은 그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입술로 함부로 맹세하였다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허물을 자복하고 속죄의 제물을 드리라는 규례가 레위기 5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입이 얼마나 쉽게 앞서가는지 아셨고, 그래서 잘못된 맹세에서 돌아서는 길을 율법 안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맹세의 문자는 지키고, 그 문자를 지키기 위해 다른 생명을 버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주의의 얼굴을 봅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너무 사랑해서 생기는 병이 아니라 율법의 문자를 방패 삼아 자기 뜻을 이루려는 병입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조문이 죽이는 것은 조문이 악해서가 아니라, 살리는 영 없이 조문만 붙들 때 사람이 그것을 칼로 쓰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후렴이 이 대목에서 다시 울립니다(삿 17:6;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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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도 미스바의 맹세가 있습니다. 한 번 정한 원칙이니 끝까지 가야 한다는 고집, 내가 한번 말했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자존심입니다. 그 고집은 겉보기에 신실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잘못 세운 원칙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신실함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우리는 이 병에 자주 걸립니다. 한때 옳다고 결의한 규정과 관례를 지키느라, 그 규정이 보호하려던 사람을 잃는 일이 생깁니다. 가정에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홧김에 자녀에게 던진 말,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끊어 버린 관계, 이것만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마음속 맹세가 있다면 오늘 성령께 그 맹세를 가져가십시오. 잘못된 약속에서 돌아서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신실함입니다. 일터에서도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것을 약함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틀린 결정을 고치는 사람이 결국 사람을 살립니다. 명부를 펼쳐 누가 빠졌는지 찾는 대신, 우리가 누구를 잃어 가고 있는지를 찾는 눈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고집을 부끄럽게 하시되 짓밟지 않으시고 돌아설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교회가 규정을 지키는 교회이기 전에 사람을 지키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정한 것이 말씀의 중심인 생명과 긍휼을 해친다면 부끄럽더라도 그것을 거두는 용기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돌이킨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공동체가 끝까지 가는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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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2절 가나안이 된 실로
성자 하나님은 스스로 값이 되시어 약한 이들을 살리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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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은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뽑아 야베스 길르앗으로 보냅니다. 명령은 그곳 주민과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치고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10-11절). 그러나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 사백 명은 살려 둡니다. 전쟁의 목적이 맹세를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아내를 구하는 데 있었음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끌려온 여인들이 닿은 곳은 실로였고, 화자는 그곳을 가나안 땅이더라고 적습니다(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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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지파에서 천 명씩 가려 뽑았다고 읽을 만한 큰 용사 만 이천 명이 한 성읍으로 떠납니다. 동족을 향해 쓰기에는 지나친 군사력이고, 힘없는 이들을 힘으로 눌러 버리는 일입니다. 명령의 내용은 더 섬뜩합니다. 진멸하여 바치라는 말은 가나안 정복 때 여리고에 적용되던 거룩한 전쟁의 용어입니다. 여호와께 바치는 전쟁의 언어가 이제 동족의 한 성읍을 지우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명령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진멸은 숨 쉬는 모든 것을 죽이는 일인데 그들은 처녀들만은 살려 두었습니다. 맹세를 지키는 척하며 맹세를 악용한 것입니다. 말씀의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두르고 그 속의 사랑과 긍휼은 잃어버린 신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이 장면이 보여 줍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젊은 처녀 사백 명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들을 얻었다고 기록합니다. 사람을 세는 동사가 아니라 물건을 손에 넣는 동사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인지를 어떻게 가려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 침묵이 도리어 그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이었을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이 여인들에게는 이름도 목소리도 없습니다. 부모와 형제가 쓰러진 자리에서 끌려 나와 낯선 남자들의 아내가 되기 위해 강을 건넙니다. 사사기는 악사와 드보라와 야엘의 당당한 목소리로 시작했는데, 끝에 와서는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여인들의 울음으로 닫힙니다. 화자가 마지막에 붙인 짧은 한마디가 그 전부를 요약합니다.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 실로가 본래 가나안 땅이었다는 사실을 적은 것이기도 하지만, 동족을 죽이고 힘없는 여자들을 끌고 오는 땅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더는 하나님의 땅일 수 없다는 고발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몰아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가나안이 되었습니다.
이 장면 전체를 꿰는 것은 하나의 셈법입니다. 한 지파를 살리기 위해 한 성읍을 지우는 셈법, 많은 이의 평화를 위해 소수의 생명을 값으로 치르는 셈법입니다. 신약에도 이 셈법을 입에 올린 사람이 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요 11:50). 정치적 계산으로 한 사람을 제물 삼으려 한 말이었는데, 요한은 그 말이 자기도 모르게 한 예언이었다고 적습니다. 하나님은 그 셈법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뒤집으셨습니다. 세상은 약한 자를 값으로 치러 강한 자들의 평화를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존귀한 아들을 스스로 값으로 내어 주셔서 약한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야베스 길르앗의 딸들이 치러야 했던 값을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치르셨습니다. 그 셈법만이 끝내 공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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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도 야베스 길르앗의 셈법은 살아 있습니다. 조직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가장 목소리가 작은 이들이 먼저 정리되고, 공동체의 평화를 지킨다는 이유로 상처 입은 사람에게 조용히 참으라고 요구합니다. 다툼이 수습될 때에도 흔히 그렇습니다. 큰 목소리들은 적당한 선에서 화해하고, 그 사이에 끼어 상처 입은 이들은 명부에서 조용히 사라집니다. 가정도 살펴야 합니다. 집안의 평화가 늘 한 사람의 침묵으로 유지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늘 참는 어머니, 늘 양보하는 맏이, 늘 눈치를 보는 막내가 있다면 그 평화는 야베스 길르앗의 평화와 닮아 있습니다. 일터에서도 성과를 위해 누군가를 소모품처럼 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약한 자를 값으로 치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자기가 값을 치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나의 편안함을 위해 누군가 대신 치르고 있는 값이 있다면, 그것을 알아보고 내가 먼저 짐을 나누어 지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셈에서 빠진 이름을 기억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괜찮다고 할 때 괜찮지 않은 한 사람을 찾아가는 교회, 우리의 평안이 누군가의 눈물 위에 서 있지는 않은지 묻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작아 보이지만, 그 작은 걸음이 가나안이 되어 가는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 나라의 실로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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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자기가 넘은 선은 보지 못하고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하나님께만 묻던 벧엘의 울음이 오늘 저희 입술에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눈물의 크기가 아니라 돌이킴의 깊이를 보시는 아버지,
저희 마음을 상하고 통회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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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영이신 성령님,
한 번 뱉은 말을 지키느라 형제를 잃어 가는 고집을 꺾어 주옵소서.
잘못 세운 맹세 앞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돌아서는 용기를 주시고
규정보다 사람을, 체면보다 생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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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값이 되신 주 예수님,
약한 자를 대가로 치러 평화를 사려는 세상의 셈법 속에서
저희가 셈에서 빠진 이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름 없이 끌려간 딸들의 울음을 주께서 들으셨음을 믿사오니
저희도 그 울음 곁에 서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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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이 되어 버린 실로에도
주의 나라를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우리 교회가 누군가의 눈물 위에 세운 평안을 거절하고
주께서 치르신 값 위에 서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