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0:29-48 여호와께서 치신 싸움, 사람이 넘어선 칼끝

by 평화의길벗 posted Oct 1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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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20:29-48 여호와께서 치신 싸움, 사람이 넘어선 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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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기브아 주위에 복병을 두고, 두 번 이긴 베냐민을 성 밖 큰길로 꾀어냅니다(29-34절). 화자는 먼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셨다고 이 싸움의 주인을 밝힌 뒤, 복병이 성읍을 점령하고 연기가 하늘에 닿는 장면을 다시 자세히 들려줍니다(35-41절). 광야로 달아나던 베냐민은 에워싸여 무너지고, 이스라엘은 림몬 바위로 가는 길에서 패잔병들을 이삭 줍듯 쳐 이만 오천 명이 엎드러집니다(42-46절). 겨우 육백 명만이 림몬 바위로 피해 넉 달을 숨어 지내지만, 이스라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베냐민의 온 성읍을 칼날로 치고 불사릅니다(47-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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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두 번의 참패 끝에 온 백성이 벧엘에 올라가 울며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싸우리이까 말리이까를 여쭈었고, 하나님은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날이 사사기에서 가장 참혹한 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누가 이겼는가보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일이고 어디부터가 사람의 일인가를 묻게 합니다.

# 셋째 날의 전술은 낯설지 않습니다. 복병을 성 뒤에 숨기고, 본대가 지는 척 물러나 성 사람들을 큰길로 끌어낸 다음, 복병이 빈 성을 점령해 연기를 올리면 돌아서서 앞뒤로 치는 방식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점령할 때 쓴 바로 그 작전입니다(수 8장). 매복할 곳을 미리 정하고, 신호를 약속하고, 지는 척 물러서는 순서까지 두 이야기가 나란히 놓입니다. 성읍에서 올라온 연기가 하늘에 닿았다는 표현도 같습니다. 그러나 닮을수록 더 대조적입니다. 가나안 성읍을 치려고 익힌 방법을 이제 동족의 성읍에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 본문 끝의 행동도 가나안 정복의 언어를 빌려 옵니다. 칼날로 치고 성읍을 모두 불사르는 것은 여리고와 아말렉과 라이스에 대해 쓰인 진멸의 방식이었습니다. 사사기는 1장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쫓아내지 못한 일을 길게 늘어놓으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내 행하지 못한 진멸이 책의 끝에 가서 형제를 향합니다. 해야 할 자리에서는 멈추고, 멈추어야 할 자리에서는 끝까지 간 것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후렴이, 이 장면에서 가장 무겁게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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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5절 여호와께서 치시매

성부 하나님은 악을 두둔한 공동체를 당신의 손으로 끝내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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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기브아 둘레에 군사를 숨겨 두고 셋째 날 다시 전열을 갖춥니다. 베냐민은 전과 같이 성에서 나와 삼십 명가량을 쳐 죽이고 이번에도 이겼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본대가 일부러 물러나며 그들을 성 밖 큰길로 끌어낸 것이었습니다. 복병이 기브아 초장에서 쏟아져 나오고 택한 군사 만 명이 들이치자 싸움이 치열해지는데, 베냐민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끝내 알지 못합니다(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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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은 무작정 돌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겠다고 하셨지만, 그들은 앞선 두 번과 달리 복병을 숨기고 유인할 길을 짰습니다. 약속은 사람의 수고를 없애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전과 같이 기브아에 맞서 전열을 갖추었고, 베냐민은 전과 같이 성에서 나왔습니다. 전과 같이라는 말이 두 번 되풀이되는데, 같은 자리에 선 두 무리의 속은 전혀 달랐습니다. 화자는 이스라엘의 속마음을 독자에게만 먼저 알려 줍니다. 우리가 도망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큰 길로 꾀어내자. 그리고 베냐민이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났다는 말이 그 뒤를 잇습니다. 두 번의 승리가 그들의 눈을 가린 것입니다.

34절 끝의 한 문장이 이 날의 비극을 요약합니다. 베냐민 사람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싸움이 가장 치열한데 정작 싸우는 당사자는 자기에게 무엇이 닥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화자는 이야기를 멈추고 하늘의 자리에서 이 날을 다시 적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여기 쓰인 동사는 전쟁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 쳐부순다는 뜻이고, 성경에서는 그 가해자가 하나님으로 그려지는 일이 많습니다. 출애굽의 밤 애굽의 처음 난 것을 치신 재앙에도 같은 말이 쓰였습니다(출 12:23). 기브아의 죄는 소돔의 죄와 같았는데 베냐민은 그들을 내주기는커녕 싸고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악을 끝내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별이 오늘 본문 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여호와께서 베냐민을 치셨다는 문장은 이 날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이 승인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심판의 크기와 끝을 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원수 갚는 것은 주께 속하였으니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권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롬 12:19). 하나님의 심판에 쓰임받는 사람은 그 심판의 주인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도구가 주인의 자리에 앉는 순간, 심판은 복수로 변합니다. 오늘 본문의 뒷부분이 바로 그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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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의 몰락을 보며 하나님이 치셨다고 쉽게 말합니다. 권력을 남용하던 사람이 무너질 때, 우리를 괴롭히던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렇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때로 그 말은 맞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끝까지 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순간 우리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치셨다는 말이 내 분노를 정당화하는 도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밖의 악을 향해서도, 우리 안의 잘못을 향해서도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지 늘 살펴야 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가 크다면, 그 상처를 하나님께 정직하게 아뢰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는 하나님의 손에 두십시오. 일터에서도 옳은 말을 해야 할 자리와 끝을 내야 할 자리를 구별하십시오.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 복병을 준비했듯이, 우리도 해야 할 수고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고의 끝에서 승리를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승리의 선을 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교회가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되,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긴 날에 드리는 기도가 진 날에 드리는 기도보다 더 조심스러워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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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41절 하늘에 닿은 연기

성령 하나님은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를 멈춰 세워 등 뒤를 돌아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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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같은 날을 이번에는 베냐민의 자리에서 다시 들려줍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자리를 내준 것은 기브아에 숨겨 둔 복병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병은 빈 성으로 돌격해 칼날로 온 성읍을 쳤고, 본대와 미리 약속한 대로 큰 연기를 올렸습니다. 베냐민은 그 약속을 몰랐습니다. 삼십 명을 쳐 죽이며 이번에도 이긴다고 말하던 그들이 뒤를 돌아보니, 온 성읍의 연기가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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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절부터 이야기가 되감깁니다. 같은 하루인데 이번에는 지는 쪽의 눈으로 봅니다. 본대와 복병 사이에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솟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편에는 약속이 있었고 베냐민 편에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들이 틀림없이 처음 싸움 같이 우리에게 패한다고 말합니다. 틀림없이라는 말에 그들의 마음이 다 담겨 있습니다. 두 번의 승리가 세 번째의 결과까지 보증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약속을 모르는 사람의 확신은 그렇게 자랍니다.

그때 베냐민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연기 구름이 기둥 같이 치솟고, 온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여기 온으로 옮긴 히브리 말은 전체, 전부라는 뜻으로 제물을 남김없이 태우는 일을 가리킬 때 종종 쓰입니다. 불량배가 성읍을 미혹했을 때 그 성읍 전부를 불살라 여호와께 드리라고 한 신명기 13장의 규례가 이 장면에 겹칩니다. 기브아가 타는 연기는 그저 전쟁의 화재가 아니라 심판의 연기였습니다. 그 연기는 또 다른 연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소돔이 심판받던 날 아브라함은 그 땅의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는 것을 보았습니다(창 19:28). 이스라엘 한가운데서 소돔처럼 행한 성읍이 소돔처럼 연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이 뒤를 돌아본 때는 이미 늦은 때였습니다. 41절은 그들이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것을 보고 심히 놀랐다고 적습니다. 34절에서 몰랐던 그 화를 이제야 본 것입니다. 앞만 보며 이기고 있다고 믿는 동안, 등 뒤에서 자기 삶의 터전이 타고 있었습니다. 베냐민에게 두 번의 승리는 사실 회개할 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만 명이 쓰러지는 동안 그들은 형제의 피를 흘리며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굳혔습니다. 승리는 언제나 우리를 돌아보게 하기보다 더 앞으로 달려가게 만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그 달음질 한가운데서 우리를 멈춰 세우시고, 아직 늦지 않았을 때 등 뒤를 돌아보게 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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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성공한 방식으로 세 번째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전에 이렇게 해서 잘되었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은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안심시키지만, 때로는 등 뒤의 연기를 보지 못하게 가립니다. 우리는 한때 통하던 방식에 오래 기대어 왔습니다. 그때 통하던 방식이 지금도 통하리라 믿는 동안,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고 신뢰가 무너지는 연기가 뒤에서 오르고 있었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틀림없이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있다면 그 말을 한 번 의심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잘될 거야, 틀림없이 그 사람이 잘못한 거야, 틀림없이 나는 괜찮아. 그 말이 입에 붙을수록 뒤를 돌아볼 이유는 커집니다. 가정에서는 겉으로 평온한 동안 자녀의 마음이나 배우자의 지친 얼굴이 조용히 타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십시오. 일터에서도 늘 해 오던 방식이 누군가를 지치게 하고 있지 않은지 물어보십시오. 우리교회가 지난 성공의 방식을 붙들기보다, 오늘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등 뒤의 연기를 정직하게 돌아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늦게 돌아보지 않도록, 오늘 아침 묵상의 자리에서 먼저 뒤를 돌아보십시오. 말씀 앞에 멈추어 서는 짧은 시간이, 등 뒤의 불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게 하는 파수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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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46절 이삭 줍듯 한 칼날

삼위 하나님은 이삭을 남기라 하신 법으로 우리의 칼끝이 멈출 자리를 재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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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은 광야 길로 몸을 돌렸지만 앞에서는 돌아선 본대가, 뒤에서는 성읍을 불사르고 나온 복병이 그들을 에워쌌습니다. 쉴 틈 없이 몰린 그들 가운데 만 팔천 명이 엎드러집니다. 남은 이들이 림몬 바위로 가는 큰길로 달아나자 이스라엘은 그 뒤를 따라가 오천 명을 이삭 줍듯 치고, 기돔까지 쫓아가 또 이천 명을 죽입니다. 그 날 쓰러진 베냐민 용사가 모두 이만 오천 명이었습니다(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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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절의 성읍에서 나온 자라는 말은 죽임을 당한 쪽이 아니라 죽이는 쪽으로 읽는 것이 본문의 흐름에 맞습니다. 성읍을 차지한 복병이 다시 밖으로 나와 베냐민을 친 것입니다. 앞뒤가 모두 막혔습니다. 43절의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라는 구절도 쉼이라는 말 앞의 전치사를 없이로 읽으면 쉼 없이 짓밟았다는 뜻이 됩니다. 쉴 수 없는 추격이었다는 말입니다. 본문은 이 날의 맹렬함을 숫자로만이 아니라 숨 쉴 틈 없는 문장으로 전합니다. 에워싸고, 추격하고, 짓밟고, 또 뒤를 따라가고. 동사가 쉬지 않습니다.

그리고 45절에 이 장의 가장 서늘한 낱말이 나옵니다. 이삭줍듯 하고. 여기 쓰인 동사는 본래 포도를 한 번 거둔 뒤 남아 있는 열매를 다시 따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율법은 바로 그 행위를 금했습니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는 것입니다(레 19:10; 신 24:21). 긍휼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할 것을 끝내 남기지 않는 동작이 바로 이 낱말입니다. 싸울 힘도 남지 않은 패잔병을 쉽게 쓸어 담았다는 뜻입니다. 거두는 손에 멈춤을 가르친 법이, 사람을 치는 말이 되었습니다.

더 섬뜩한 것이 있습니다. 이 동사는 19장에서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한 여인을 밤새 욕보인 일을 가리킨 동사와 어근이 같습니다. 그래서 45절은 19장에 대한 응보처럼 읽히는데, 그 응보에는 뒷면이 있습니다. 악을 벌하는 사람들의 동작이 악을 행한 사람들의 동작과 같은 낱말로 적힌 것입니다. 심판자의 손이 괴물의 손을 닮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사사기의 화자는 그 경고를 한 낱말 안에 새겨 두었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가 휘두르는 칼의 날카로움보다 우리가 남겨 두는 이삭의 크기를 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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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쪽에 섰을 때 우리는 다 거두고 싶어집니다. 논쟁에서 상대가 이미 물러섰는데도 끝까지 말로 몰아붙이고, 잘못을 인정한 사람에게 한 번 더 확인 도장을 받으려 합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이 마지막 한 마디가 관계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의 분쟁도 대개 이렇게 깊어졌습니다. 옳은 쪽이 누구인지 드러난 뒤에도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키려다 공동체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와 맞서고 있다면, 그 싸움의 끝에서 그 사람이 설 자리를 조금 남겨 두십시오. 일터에서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 있어도 사람을 끝까지 벗겨 놓지는 마십시오. 온라인에서 누군가를 비판하는 글에 한 줄을 더 보태고 싶을 때, 그 한 줄이 이삭을 줍는 손인지 한 번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싸우는 상대의 말투와 방식을 내가 닮아 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는 일은 한순간이 아니라, 이렇게 한 줄 한 줄 쌓이며 일어납니다. 반대로 긍휼도 그렇게 쌓입니다. 우리교회가 이긴 자리에서 이삭을 남겨 두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잘못한 사람에게도 돌아올 길 하나는 남겨 두는 공동체 말입니다. 한 번 참은 말, 한 번 남겨 둔 자리가 쌓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손을 닮은 사람으로 빚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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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48절 림몬 바위의 육백 명

성자 하나님은 불타 버린 들판 끝에 남은 자를 두시고 거기서 새 일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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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달아나 림몬 바위에 이르고, 거기에서 넉 달을 숨어 지냅니다. 이만 육천칠백 명으로 나섰던 지파에 남은 수가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불살랐습니다(48절). 싸울 사람이 더 없는 땅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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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틈에 숨은 육백 명은 그 날 불타 버린 들판 끝에 남은 마지막 이삭이었습니다. 림몬은 석류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고, 기브아에서 멀지 않은 절벽 지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의 숫자를 따라 헤아려 보면 전사자와 이 육백 명 외에 구백 명에서 천 명가량은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더하면, 한 지파의 거의 전부가 한 날에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48절에서 이스라엘은 돌아와 성읍마다 불을 놓습니다. 거기 남아 있었을 이들은 대개 싸울 힘이 없는 부녀자와 노인과 아이였습니다.

여기서 35절과 48절이 갈라섭니다. 35절에서 베냐민을 치신 분은 여호와였습니다. 그러나 48절에서 돌아와 성읍마다 불사른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칼날로 치고 성읍을 모두 불사르는 것은 이제까지 가나안 족속에게만 행하던 방식이었고, 하나님이 베냐민을 그렇게 응징하라고 명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였지만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못했고, 여전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통로가 되면서도 지나친 폭력을 행하는 잘못은 뒤에도 되풀이됩니다. 아합의 집을 친 예후의 피를 하나님이 갚으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호 1:4). 하나님께 쓰임받았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육백 명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21장에서 온 회중은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 평화를 공포합니다. 뒷날 베냐민은 성읍들을 다시 건축했고,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이 이 지파에서 났습니다. 그리고 훨씬 뒤에 한 사람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사도 바울은 그 고백 바로 뒤에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합니다(롬 11:1, 5). 림몬 바위에 숨었던 육백 명의 후손 가운데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들고 간 사도가 나온 것입니다. 사람은 형제를 멸절하려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남은 자를 통해 온 세상을 부르셨습니다. 심판의 불을 친히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안에서, 불타 버린 들판 끝의 이삭이 새 추수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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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도 림몬 바위에 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분쟁 끝에 교회를 떠난 사람들, 한 번의 잘못으로 모두에게 등 돌림을 당한 사람들, 가정이 무너진 뒤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있고, 억울하게 휩쓸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바위 틈을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떠난 사람들을 너무 쉽게 잊어 왔습니다. 오늘 연락이 끊긴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사람에게 안부 한 줄을 보내는 것이 평화를 공포하는 일입니다. 가정 안에도 말을 닫고 지내는 식구가 있다면 먼저 한마디를 건네십시오. 또 내가 지금 림몬 바위에 숨어 있다면, 그 넉 달이 끝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불타 버린 땅 끝에서도 남은 자를 두시고, 그 남은 자에게서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교회가 림몬 바위로 평화를 공포하러 가는 교회, 숨어 지내는 이들에게 먼저 사람을 보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긴 자리에 선 분들은 오늘 한 번, 내가 돌아가 불사르고 있는 성읍이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이 치신 데서 멈추는 것이 믿음이고, 그 너머로 칼을 들고 돌아가는 것은 자기 소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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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악을 끝내 그냥 두지 않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주께서 치시는 날에도

심판의 주인은 주님이심을 고백하오니

저희가 도구의 자리를 넘어

주인의 자리에 앉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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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두 번 이긴 확신으로 앞만 보고 달릴 때

등 뒤에서 치솟는 연기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틀림없다는 말이 입에 붙을수록

더 자주 멈추어 서게 하시고

너무 늦게 놀라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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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을 남기라 하신 하나님,

이긴 자리에서 다 거두려는 손을 붙드시고

돌아올 길 하나를 남겨 두게 하옵소서.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지 않도록

저희의 말과 칼끝을 날마다 재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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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몬 바위의 육백 명을 잊지 않으신 주님,

숨어 지내는 이들에게 평화를 공포하는

우리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불타 버린 들판 끝의 이삭에서

새 추수를 여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라

저희도 남은 자를 찾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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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친히 지신 십자가 앞에서

오늘 저희의 칼을 내려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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