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0:08-28 누가 먼저냐 묻던 입이 말리이까를 배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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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사람의 고발을 들은 온 이스라엘은 한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하나 같이 일어나 기브아를 징계하기로 결의합니다(8-11절).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불량배들을 넘기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도리어 형제들과 싸우려고 기브아로 모여듭니다(12-17절). 이스라엘은 벧엘에 올라가 사사기 첫머리처럼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 묻지만, 싸울지 말지는 묻지 않은 그 질문 끝에 두 번이나 크게 패합니다(18-25절). 마침내 온 백성이 울며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뒤, 비느하스가 언약궤 앞에 선 자리에서 싸우리이까 말리이까를 여쭙습니다(26-28절). 그제야 하나님은 처음으로 승리를 약속하시며,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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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고, 레위 사람은 기브아에서 당한 일을 회중 앞에 털어놓았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과 자기 변명이 뒤섞인 증언이었지만, 칼을 빼는 사십만 명이 그 증언 하나에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분노가 결의가 되고, 결의가 전쟁이 되고, 전쟁이 두 번의 참패를 거쳐 마침내 하나님 앞의 금식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한 사람의 폭력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한 지파 전체의 운명으로 번지는 길목입니다.
# 사사기는 처음과 끝이 서로를 비추도록 짜인 책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은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하고 여쭈었고,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대답하셨습니다(삿 1:1-2).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같은 주제, 곧 전쟁과 종교적 타락을 다루고, 두 곳 모두에서 이스라엘은 누가 먼저 올라갈지를 묻고 유다가 먼저 지명됩니다. 그런데 처음의 적은 가나안이었고 마지막의 적은 형제 베냐민입니다. 같은 질문이 책의 양 끝에 놓였는데, 그 사이에 칼끝의 방향이 뒤집혔습니다.
# 본문에 비느하스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아직 살아 있고 온 이스라엘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이 사건을 사사 시대 초기의 일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그렇다면 사사기의 저자는 시간 순서가 아니라 신학의 순서로 책을 엮은 셈입니다. 가장 이른 시기의 일을 가장 끝에 두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탄식이 처음부터 있었던 병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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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1절 한 사람처럼 일어선 분노
성부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라 명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되, 한 사람처럼 일어선 우리의 의분까지 당신의 저울 위에 다시 올려 달아 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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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삿 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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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히라고 옮긴 말은 히브리어로 한 사람처럼이라는 뜻의 케이쉬 에하드입니다. 이 표현은 20장 1절에서 회중이 모일 때 처음 나오고, 8절에서 일어설 때 다시 나오며, 11절에서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다고 할 때 또 나옵니다. 11절의 합심하여라는 말에는 동지, 짝이라는 뜻의 하베림이 들어 있습니다. 화자는 세 번이나 되풀이해 이 연합을 강조합니다. 사사기 전체를 통틀어 이스라엘이 이토록 한마음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드보라의 노래에서는 르우벤이 시냇가에서 머뭇거렸고 길르앗은 요단 저쪽에 머물렀으며, 기드온 때에는 에브라임이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며 따지고 들었고, 입다 때에는 끝내 형제끼리 칼을 겨누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외부의 적 앞에서는 저마다 사정을 대며 흩어지던 이스라엘이, 동족을 치는 일에는 한 사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9-10절의 계획도 치밀합니다. 제비를 뽑아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가려 양식을 나르게 하고, 나머지가 기브아로 올라가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행한 망령된 일대로 징계하겠다는 것입니다. 망령된 일로 옮긴 네발라는 공동체의 근간을 허무는 수치스러운 죄를 가리키는 말로, 앞서 레위 사람이 회중 앞에서 쓴 바로 그 낱말입니다. 베냐민의 기브아라는 표현도 그 성읍을 기업으로 가진 지파 전체에 책임을 묻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비뽑기는 본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대목에는 하나님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결의는 한 사람처럼 이루어졌으나, 그 한 사람 안에 하나님께 여쭙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기브아에서 일어난 일은 분명 망령된 일이었고, 온 이스라엘이 분노한 것은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레위 사람의 증언도, 기브아를 치기로 한 결정도 모두 사람의 판단으로 세워지고 사람의 말로 설명되고 사람의 손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옳은 분노도 하나님께 여쭙지 않으면 곧 자기 소견의 분노가 됩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개인은 이웃의 처지를 헤아리는 양심을 지닐 수 있지만, 사람들이 집단으로 묶이는 순간 그 양심이 흐려지고 집단의 자기 이익과 의분이 훨씬 거칠게 움직인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한 사람씩 떼어 놓고 보면 누구도 형제 지파를 몰살하자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처럼 일어선 사십만은 멈출 자리를 잃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라 명하시는 분이지만, 그 명령을 집행하는 우리의 분노까지 의롭다고 보증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의 의분을 당신의 저울 위에 다시 올려 달아 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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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분노가 한 사람처럼 일어서는 속도가 몹시 빠른 시대입니다. 어떤 잘못이 알려지면 몇 시간 만에 온 나라가 한목소리를 냅니다. 그 가운데는 마땅한 공분도 있고, 약자를 지키려는 귀한 연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목소리가 커질수록 그 목소리에 질문을 던지기는 어려워집니다. 한국교회도 사회를 향해 공의를 외쳐야 할 때가 있고, 교회 안의 잘못 앞에서 한마음으로 일어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다만 그때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할지가 아니라 누구에게 여쭈었는지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어떤 문제 앞에서 마음을 모을 때, 그 합심이 기도의 자리를 건너뛰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식구 중 한 사람이 잘못했을 때 온 가족이 한 사람처럼 그를 몰아세우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우리는 압니다. 일터에서 누군가를 두고 모두가 같은 말을 할 때, 그 말에 내 목소리를 보태기 전에 한 번 멈추어 보십시오. 한 사람처럼 일어서는 것은 힘이 되지만, 한 사람처럼 멈출 줄도 알아야 그 힘이 공의가 됩니다. 오늘 내가 품은 분노가 옳다고 느껴질수록, 그 분노를 하나님의 저울 위에 먼저 올려 드리십시오. 저울에 올려 보면 분노 속에 섞여 있던 억울함과 자존심과 이긴 편에 서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그것을 걸러 낸 뒤에 남는 분노라야 이웃을 살리는 공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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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7절 형제의 말을 듣지 아니한 형제
성자 하나님은 죄를 감싸 덮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시고 그 죄를 친히 짊어지심으로 형제를 참으로 품는 길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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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삿 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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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곧장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먼저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 두루 다니며 물었습니다.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요구도 분명하고 절제되어 있었습니다.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이라는 구절을 직역하면 기브아에 있는 그 불량배들이 됩니다. 성읍 전체가 아니라 그 일을 저지른 자들만 특정해서 넘기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는 말은 신명기가 되풀이하는 공동체 정결의 규례를 그대로 옮긴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이스라엘의 절차에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문제는 베냐민의 대답이었습니다. 화자는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고 적습니다. 형제라는 말을 굳이 끼워 넣은 것은 베냐민의 판단을 나무라는 화자의 목소리입니다. 그들은 형제였지 서로 싸울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판단할 때 그 행동 자체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 행동을 한 사람이 우리 성읍 사람인지 우리 지파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한 사람씩 따로 물었다면 기브아의 그 밤을 옳다고 할 베냐민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판단이 뒤집혔습니다. 앞 단락에서 본 집단의 이기심이 이쪽에서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베냐민은 칼 든 이만 육천 명과 기브아 주민 가운데 택한 칠백 명을 모았습니다. 그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삿 20:16). 왼손잡이로 옮긴 구문은 문자적으로 오른손에 제약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전쟁에 유리하도록 왼손을 훈련받은 이들로 보입니다. 같은 표현이 모압 왕 에글론을 찌른 베냐민 사람 에훗에게 쓰였습니다(삿 3:15). 베냐민이라는 이름 자체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니, 한때 이스라엘을 구원하던 솜씨가 이제 형제를 겨눕니다. 이 자신감 때문인지 베냐민은 사과와 회개 대신 전면전을 택했고, 그 선택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졌음을 드러냅니다. 베냐민의 잘못은 형제를 사랑한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죄를 형제애의 이름으로 덮은 데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제 사랑은 죄를 감추는 사랑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어 고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그와 너와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하셨고(마 18:15-17), 친히 우리 죄를 못 본 척 덮지 않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바 되셨습니다(고후 5:21). 참된 감쌈은 죄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죄의 값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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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편이라서 감싸는 일은 교회 안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교단이 같아서, 오래 함께 사역해서, 교회의 이름에 흠이 갈까 봐 드러나야 할 잘못을 덮는 일이 한국교회에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덮어 둔 죄는 사라지지 않고, 결국 더 큰 상처와 더 많은 피해자를 낳았습니다. 베냐민이 불량배 몇 사람을 지키려다 지파 전체를 잃을 뻔한 것처럼, 감싸는 쪽이 오히려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잘못 앞에서 우리 편과 남의 편을 먼저 가르지 않고, 옳고 그름을 먼저 묻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자녀의 잘못을 두고 우리 아이는 그럴 리 없다고 먼저 말하는 부모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말은 사랑처럼 들리지만, 아이가 자기 잘못을 마주할 기회를 빼앗습니다. 일터에서 같은 부서,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눈감아 준 일이 있다면 오늘 그 일을 조용히 꺼내 보십시오. 형제의 말을 듣는 귀가 있어야 형제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잘못을 드러내야 할 자리에 섰다면, 드러내는 그 손으로 그 사람의 짐을 함께 질 각오도 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방식입니다. 반대로 내가 권면을 받는 자리에 섰다면, 베냐민처럼 먼저 방어의 진을 치지 마십시오. 형제의 말이 아프게 들릴 때가 바로 들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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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5절 누가 먼저냐고만 물은 입
성령 하나님은 이미 정해 놓은 우리 계획에 도장을 찍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실패의 눈물을 통해 우리의 물음 자체를 고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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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삿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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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벧엘에 올라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경건한 순서입니다. 그러나 그 물음의 내용을 보면 사정이 다릅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 질문이 두 가지 점에서 부적절하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그들은 먼저 베냐민과 싸울지 말지를 물어야 했습니다. 둘째, 누가 먼저 올라가느냐는 물음은 본래 외부의 적과 싸울 때 묻는 말입니다. 가나안과의 전쟁은 하나님이 명하신 과업이었으니 순서를 묻는 것이 당연했지만, 베냐민과의 전쟁은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동족과의 전쟁을 스스로 결정해 놓고 방법만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모든 결정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형식적인 결재만 요구하는 태도입니다.
사사기 1장과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더 또렷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하시고 곧이어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약속하셨습니다(삿 1:2). 이번에는 그 약속이 없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동사조차 없어 그저 유다가 먼저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물음에는 올라가다는 뜻의 알라와 전쟁을 뜻하는 밀하마가 분명히 들어 있는데, 하나님의 대답에는 싸우라는 명령도 이기리라는 약속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그 짧은 대답을 승리의 보증으로 들었습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첫날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이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용기를 내어 다시 전열을 갖춘 뒤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었습니다. 이 눈물은 사사기 2장의 보김을 떠올리게 하지만, 고통과 좌절에서 나온 눈물이지 아직 회개의 눈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물음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삿 20:23). 처음으로 베냐민을 내 형제라 부릅니다. 실패가 상황을 조금 더 정확히 보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올라가서 치라로 옮겼지만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올라가라에 가깝고, 이번에도 공격의 명령이나 승리의 약속은 없습니다. 이튿날 이스라엘은 다시 나아갔고 만 팔천 명을 잃었습니다. 이틀 동안 사만 명입니다. 사십만 명이 이만 육천칠백 명에게 진 것입니다. 두 번의 패배는 양쪽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베냐민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싸울지 말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계획을 번번이 가로막으시기보다, 때로 그 계획대로 걸어가게 두시고 그 끝에서 우리의 물음을 고치십니다. 하나님께 여쭈었다는 사실만으로 길이 옳아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여쭈었는지가 우리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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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이미 정해 놓은 것이 보입니다. 이 사업이 잘되게 하옵소서, 이 사람이 변하게 하옵소서, 이 일이 제 뜻대로 풀리게 하옵소서. 그 기도들은 대개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의 기도입니다. 갈지 말지는 이미 내가 정했고, 하나님께는 방법과 순서와 성공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오랫동안 이런 결재형 기도에 익숙했습니다. 건축과 행사와 확장을 먼저 정해 놓고 하나님께 복을 구했고, 그 결정 자체를 여쭙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계획을 세울 때, 무엇을 할지보다 이 일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여쭙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오늘 드리는 기도 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 문장을 바꾸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가 아니라, 해야 하겠습니까로 말입니다. 그리고 실패를 겪었다면 그 실패를 서둘러 덮지 마십시오. 두 번의 패배가 이스라엘의 입에서 내 형제라는 말을 끌어냈습니다. 실패는 우리가 물음을 고칠 수 있는 드문 기회입니다. 저물도록 우는 시간이 헛되지 않으려면, 그 눈물 끝에 질문이 달라져야 합니다. 눈물이 마른 뒤에 같은 질문을 다시 들고 나가면, 같은 패배가 기다릴 뿐입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무엇이 아팠는지보다 무엇을 잘못 물었는지를 먼저 적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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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8절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삼위 하나님은 금식과 제사로 엎드린 백성의 물음을 끝까지 기다리시고, 중보자 앞에서 말리이까를 배운 이에게 비로소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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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삿 20: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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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벧엘 행은 앞의 두 번과 다릅니다. 18절과 23절에는 없던 온이라는 수식어와 모든 백성이라는 말이 26절에 처음 붙습니다. 이번에는 몇몇 지도자가 아니라 모두가 올라갔습니다.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앉아서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구약에서 금식은 회개를 몸으로 드러내는 행위이고, 번제는 죄를 속하는 제사이며, 화목제는 하나님과 끊어진 교제를 회복하는 제사입니다. 스스로 용기를 내어 전열을 가다듬던 사람들이 이제 앉아서 굶고, 자기 죄를 태워 드리고, 끊어진 사귐을 다시 구합니다. 그 울음은 패배를 원망하는 눈물이 아니라 사만 명의 죽음을 애도하고 바르지 못했던 자기 삶을 뉘우치는 눈물이었습니다.
화자는 그 물음을 들려주기 전에 잠시 멈추어 언약궤와 비느하스를 소개합니다. 그들의 금식과 제사가 올바른 자리에서 드려졌음을 보여 주는 장치입니다. 비느하스라는 이름은 이 장면에 깊은 울림을 더합니다. 여호수아 22장에서 요단 동편 지파들이 제단을 쌓았을 때, 그는 대표단을 이끌고 가서 그들의 동기를 듣고 형제 살육 전쟁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냈습니다. 한때 형제 사이의 전쟁을 막아 낸 그 제사장이, 이제 형제 사이의 전쟁을 두고 하나님께 여쭙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물음이 달라졌습니다.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말리이까에 해당하는 에흐달은 하던 일을 그만두다는 뜻의 동사 하달에서 왔고,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성 쌓기를 그친 창세기 11장에도 같은 동사가 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그만두는 길을 선택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개역개정에는 생략되었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또라는 부사가 들어 있어, 두 번이나 졌는데 또 나아가야 하느냐는 떨림이 묻어 있습니다. 물음이 갈수록 길어지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점점 겸손해지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누가 먼저, 내 형제와 다시, 그리고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그 긴 물음 앞에서야 하나님은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약속하십니다. 다만 전성민 교수는 여기서 서둘러 박수 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눈물과 예배만으로 참된 회개가 보장되지는 않고, 21장에 가면 같은 폭력이 되풀이됩니다. 말리이까를 입에 올리는 것과 정말로 그만둘 마음을 갖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이 물음을 가장 온전하게 드리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겟세마네에서 그분은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 구하시면서도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비느하스보다 크신 대제사장으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서 계신 그분 앞에서(히 7:25) 우리의 말리이까는 비로소 진실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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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이까를 기도에 넣기는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 말을 넣는 순간 내가 이미 쏟아부은 시간과 체면과 비용이 모두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사만 명을 잃은 뒤에야 그 말을 꺼냈습니다. 한국교회는 시작한 일을 멈추는 데 서툽니다. 한 번 세운 계획은 끝까지 가야 믿음이 좋은 것처럼 여겨졌고, 멈추자는 말은 불신앙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말리이까를 여쭌 공동체에게 하나님이 비로소 약속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그만두는 선택지까지 기도의 테이블 위에 함께 올려놓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이사나 진학이나 이직을 앞두고 있다면, 가야 할 곳만 구하지 말고 가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는지도 함께 여쭈어 보십시오. 금식과 제사가 이스라엘의 물음을 바꾸었듯이, 우리에게도 물음을 바꾸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하루 한 끼를 비우거나, 잠시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이 그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을 혼자 드리지 마십시오. 비느하스가 언약궤 앞에 섰듯이, 우리에게는 더 크신 중보자가 계십니다. 말리이까를 여쭙는 입술은 그분 앞에서 떨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은 멈추라 하실 때에도, 가라 하실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다만 약속을 받은 뒤에도 조심하십시오. 이스라엘은 말리이까를 여쭌 다음에도 끝내 멈출 자리를 놓쳤습니다. 응답을 받은 날이 가장 겸손해야 할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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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한 사람처럼 일어선 저희의 분노를
오늘 아침 주의 저울 위에 올려 드립니다.
옳다고 느껴질수록 더 오래 멈추어
먼저 주께 여쭙는 입술이 되게 하시고
합심이 기도를 건너뛰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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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덮지 않으시고 대신 지신 주님,
우리 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형제의 말을 막아 버린 귀를 열어 주옵소서.
잘못을 드러내야 할 자리에서는
드러내는 손으로 짐도 함께 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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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이미 정해 놓은 길 위에
도장만 받으려던 기도를 용서하옵소서.
저물도록 우는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그 눈물 끝에서 저희의 물음을 고쳐 주시고
내 형제라는 말을 다시 배우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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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 앞에 서신 참 대제사장 예수님,
싸우리이까 말리이까를 여쭙는 저희에게
그만두라 하시면 그만둘 마음을 주옵소서.
광양사랑의교회가 멈출 줄 아는 교회로
주의 약속을 기다리는 교회로 서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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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냐고만 묻던 저희 입술이
주의 뜻을 먼저 묻는 입술로 바뀔 때까지
오늘도 저희를 기다려 주시는 은혜를 찬송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