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0:01-07 한 사람 같이 모인 분노, 먼저 여쭙지 않은 정의

by 평화의길벗 posted Oct 0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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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20:01-07 한 사람 같이 모인 분노, 먼저 여쭙지 않은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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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소식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의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이고, 칼을 빼는 보병 사십만 명이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섭니다(1-2절). 사사기에서 처음으로 온 지파가 한 사람처럼 모였지만,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자손은 소식을 듣기만 하고 오지 않습니다(3절). 회중이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묻자,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 했고 첩을 욕보여 죽게 했다고 증언합니다(4-6절). 그러나 그 증언에는 자기가 첩을 문밖으로 내어 준 사실이 빠져 있고, 그는 곧 의견과 방책을 내라고 재촉합니다(7절). 여호와 앞에 모인 총회가 여호와께 여쭙기도 전에, 한 사람의 치우친 증언이 온 이스라엘의 의분을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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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한 여인은 기브아의 긴 밤을 지나 동틀 무렵 집 문 앞에 쓰러졌고, 그의 두 손은 문지방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레위인은 그녀를 나귀에 싣고 돌아가 그 몸을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냈고, 그것을 본 이들은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생각과 상의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스라엘은 모이기는 했으나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고, 상의하기는 했으나 하나님께 여쭙지는 않았습니다.

# 미스바는 베냐민 땅 기브아에서 멀지 않은 성읍으로, 뒷날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에벤에셀의 돌을 세우는 곳입니다. 같은 장소가 한 번은 동족을 치려는 분노의 집결지가 되고, 한 번은 금식하며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고백하는 자리가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모든 지파를 다스리는 중앙 권력이 없었습니다. 지파마다 장로들이 있었고, 큰일이 있을 때 여호와 앞에 총회로 모였습니다. 그래서 총회가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하느냐는 곧 이스라엘이 누구를 왕으로 모시느냐의 문제였습니다.

# 사사기 20장은 사사기 전체에서 가장 긴 전쟁 이야기입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이 아니라 형제 지파 베냐민과 싸우고, 두 번이나 크게 패한 뒤에야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비극의 문을 여는 첫 장면입니다. 이 장 전체를 두고 한 개인에서부터 공동체 전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으로 판단되고 설명되고 행해지는 대목이라고 요약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 첫 자리가 바로 레위인의 증언입니다. 왕이 없던 시대의 병은 이제 한 사람의 입을 통해 온 공동체로 번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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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한 사람 같이 모인 사십만

성부 하나님은 우리가 한마음으로 모이는 것 자체보다, 그 한마음이 누구를 향해 모였는지를 먼저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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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삿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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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모입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곧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그리고 요단 동편 길르앗 땅에서까지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총체성을 뜻하는 이 표현이 성경에서 처음 쓰이는 자리가 여기입니다. 두 지점 사이는 약 이백오십 킬로미터, 곧 이스라엘 땅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사기를 처음부터 읽어 온 사람에게 이 장면은 낯섭니다. 이 책에서 이스라엘은 한 번도 이렇게 모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드보라는 소집에 응한 지파와 응하지 않은 지파의 명단을 노래에 남겼고, 기드온과 입다 때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이 일제히로 옮긴 말이 중요합니다. 히브리 말로는 직역하면 한 사람처럼이며, 이 표현은 8절의 일제히와 11절의 하나 같이에서 거듭 되풀이됩니다. 지파들의 하나 됨은 사사기가 오래 기다려 온 주제였습니다. 드디어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하나 됨의 목적이 가나안 민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형제 지파를 치는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는 정당하고 필요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이 하나 됨은 방향이 어그러진 사사 시대의 특징을 다시 드러냅니다.

모인 사람의 수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칼을 빼는 보병이 사십만 명이었습니다. 드보라 때 납달리와 스불론에서 모인 병사가 만 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짐작하기 어려운 수이고, 사사기에서 소집된 인원 가운데 가장 많습니다. 가나안의 병거 앞에서는 만 명을 모으기도 어려웠던 백성이, 동족을 향해서는 사십만을 모았습니다. 어른으로 옮긴 히브리 말은 본래 모퉁이라는 뜻입니다. 건물의 기준점이 되는 모퉁이가 집의 중심을 잡아 주듯, 공동체의 중심을 잡아 주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기준이 되어야 할 모퉁이들이 모두 모였는데, 그 모퉁이들이 무엇을 기준 삼고 있는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여호와 앞에 모였고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다고 말합니다. 형식은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박유미 교수는 구약이 보통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데 비해 여기서 드물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현이 쓰인 것을, 화자가 이들을 그렇게 부르기를 내켜 하지 않는 기색으로 읽습니다. 여호와 앞에 모였지만, 이 총회에서 여호와께 묻는 목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습니다. 한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하나로 모였는지보다 그 한마음이 누구의 뜻을 향해 있는지를 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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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가 한마음이 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한마음이 늘 선한 것은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보다 분노할 일 앞에서 더 빨리, 더 많이 모입니다. 선교와 섬김에는 몇 사람 모이기도 어렵던 교회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몰아낼 일에는 놀랍도록 하나가 되는 모습을 한국교회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 장의 사진, 한 줄의 글에 수많은 사람이 한 사람처럼 들고일어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한마음이 될 때, 그 마음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를 먼저 묻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한목소리를 낼 때 그 목소리는 하나님께 여쭌 뒤의 목소리인가, 분노가 먼저 낸 목소리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 안에서 식구들이 한 사람을 두고 한편이 될 때, 일터에서 동료들이 누군가를 두고 한목소리가 될 때, 그 하나 됨이 정의를 향한 것인지 또 다른 희생양을 향한 것인지 한 번 멈추어 물어보십시오. 모퉁이돌이신 그리스도를 기준 삼지 않은 하나 됨은 아무리 커도 기울어진 건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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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절 듣기만 한 베냐민, 묻는 회중

성령 하나님은 진실을 묻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시되, 내 편의 허물 앞에서 귀를 닫고 숨는 마음을 깨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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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니"(삿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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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은 두 장면을 나란히 놓습니다. 한쪽에서는 베냐민 자손이 듣고, 다른 쪽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묻습니다. 먼저 베냐민입니다. 화자는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들었다고만 말합니다. 듣기는 했으나 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의도적으로 그 자리를 피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스바는 기브아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있었고, 소식도 들었고, 무슨 일인지도 알았지만, 그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 지파 성읍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침묵은 뒤에 이어질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뒤이어 사람을 보내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넘겨 달라고 요구하지만, 베냐민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군사를 모아 맞섭니다. 불량배들을 향한 그 맹렬한 충절은 충절을 바칠 자리를 잘못 고른 충절이었습니다. 내 식구라는 이유로 명백한 악을 감싸는 태도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기브아의 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침묵했듯, 오늘 본문에서는 베냐민 지파 전체가 침묵합니다. 한 집의 침묵이 한 지파의 침묵으로 커졌습니다. 공동체가 자기 안의 악을 스스로 다루지 않을 때, 그 악은 결국 공동체 전체를 삼킵니다.

그다음은 이스라엘 자손의 물음입니다.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 물음 자체는 옳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상황 파악이었다는 점은 평가받을 만합니다. 재판은 사실을 묻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묻는 것은 누가 무엇을 했는지 차근차근 밝히겠다는 뜻입니다. 율법도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판결하지 말고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총회는 한 사람에게만 묻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가장 이해관계가 깊은 사람입니다. 옳은 물음이 한 사람의 입에만 향할 때, 물음은 이미 절반쯤 답을 정해 두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사기 1장의 첫 물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책의 처음에는 하나님께 물었는데, 책의 끝에서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묻는 대상이 바뀐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진실을 묻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 물음은 먼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고, 또 모든 목소리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듣고도 오지 않은 베냐민과, 묻되 한 사람에게만 물은 이스라엘 사이에서, 진실은 설 자리를 잃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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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베냐민처럼 듣기만 하고 자리를 피하곤 합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이 우리 부서, 우리 가족, 우리 편의 일이라면 모른 척하고 싶어집니다. 한국교회가 여러 사건 앞에서 신뢰를 잃은 까닭은 잘못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잘못을 스스로 다루지 않고 감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 편의 허물을 먼저 다루는 공동체만이 남의 허물을 말할 자격을 얻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우리 안의 일 앞에서 자리를 피하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자손처럼 물음을 던질 때는,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듣고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아이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을 때, 먼저 와서 우는 아이의 말만 듣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일터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도 가장 크게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만 듣지 말고 조용한 사람의 이야기도 청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에게 묻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여쭙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물음을 기도 가운데 먼저 올려 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가 보지 못한 쪽을 비추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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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절 빠진 한 문장

성자 하나님은 자기 허물을 감추고 남에게 돌리는 우리 대신, 죄 없이 우리의 허물을 친히 짊어지신 참되고 신실한 증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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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삿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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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증언하는 레위인을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가 피해 당사자로 그 자리에 섰음을 알리는 호칭입니다. 그러나 어제 본문을 읽은 우리는 그가 그 밤에 무엇을 했는지 압니다. 그래서 그의 증언을 들을수록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큰 틀에서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숨기고 자기가 당한 위협은 키워서 말합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실도 아닌 말, 그것이 이 증언의 정체입니다.

증언을 한 줄씩 짚어 보면 어긋난 자리가 또렷해집니다. 첫째, 그는 가해자를 불량배들이라 하지 않고 기브아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 말이 기브아의 지도자들이나 유지들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레위인은 몇 사람의 악행을 성읍 전체의 악행으로 넓혀 적대감을 부추긴 셈입니다. 둘째, 그들이 나를 죽이려 했다는 말은 정확한 사실이 아닙니다. 히브리 본문은 나를이라는 목적어를 맨 앞에 놓아 강조합니다. 사건의 중심이 어느새 죽은 여인에게서 살아남은 자기에게로 옮겨 갑니다. 셋째,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내 첩을 욕보였고 그녀가 죽었다에 가깝습니다. 죽음의 원인이 흐려진 표현입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빠진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밖으로 끌어냈다는 문장입니다. 문지방 위의 손을 보고도 일어나라 떠나가자고만 했다는 문장입니다. 자기가 첩을 그들의 손에 넘겨준 일과 정신을 잃은 첩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일은 말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기브아 사람들에게 돌립니다. 흥분한 사람들은 그 선택된 증거만 듣고 판단을 내립니다. 6절에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인의 몸을 쪼개어 보낸 자기 행동을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자기 잔인함을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대목에서 눈을 들어 바라보는 분은 정반대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두고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증언합니다(벧전 2:22-24). 레위인은 자기 허물을 남에게 돌렸지만, 그리스도는 허물이 없으시면서도 남의 허물을 자기 몸에 지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분을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 부릅니다(계 3:14). 치우친 증언이 공동체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자리에서,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만이 진실과 은혜를 함께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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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자주 레위인처럼 증언합니다.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나에게 불리한 문장을 조용히 빼 버립니다. 부부 싸움을 이야기할 때, 교회에서 생긴 갈등을 전할 때, 직장에서 일이 틀어진 경위를 설명할 때, 우리는 사실만 말하면서도 진실을 비껴가는 법을 잘 압니다. 내가 먼저 한 말, 내가 외면한 순간, 내가 문밖으로 밀어낸 사람은 이야기에서 사라지고, 상대의 잘못만 크게 남습니다. 한국교회도 사회를 향해 말할 때 이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의 악을 고발하는 목소리가 교회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면, 그 고발은 힘을 잃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남을 말하기 전에 빠진 한 문장, 곧 나의 몫을 먼저 고백하는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설명해야 한다면, 그 이야기에 내가 빠뜨리고 싶은 문장이 무엇인지 먼저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문장을 하나님 앞에 먼저 내어놓으십시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이 남과 나 사이가 아니라 내 마음 한가운데를 지나간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참된 증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허물을 지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허물을 감추지 않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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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절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삼위 하나님은 분노가 재촉하는 결정보다 먼저 여쭙는 기도를 기다리시며, 서두르는 우리의 정의를 당신의 정의 앞에 멈춰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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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하니라"(삿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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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인의 마지막 말은 요청이라기보다 재촉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으니 의견과 방책을 내라. 판사가 배심원에게 평결을 내리라고 다그치는 말투에 가깝습니다. 여기로 옮긴 말을 거듭 쓰면서 그는 사람들을 몰아붙입니다. 지금 여기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감정이 가라앉고 차분히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자기 허물이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격앙된 감정을 십분 활용합니다.

이 재촉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자고 결의합니다. 마이클 윌코크는 이 호소가 철저히 감정적이었다고 하면서, 레위인에게 현대의 대중 매체 같은 설비는 없었으나 원하는 결과를 낳기에 충분한 세 가지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시체와 칼과, 대중이 무엇에 끌리는지 아는 틀림없는 본능입니다. 선동은 언제나 시간을 싫어합니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을수록 그 힘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결정의 자리에 하나님께 묻는 순서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제 본문의 사람들은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고 했지만, 그 상의는 하나님께 여쭙는 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뒤에 이스라엘이 벧엘에 올라가 하나님께 여쭙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물음은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였습니다. 두 번 패배를 거듭한 뒤에야 비로소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고, 이 전쟁 자체가 하나님의 뜻인지를 묻게 됩니다. 뜻은 이미 정해 놓고 허락만 구하는 기도에서, 당연하다고 여긴 것 자체를 하나님께 묻는 기도로 옮겨 가는 데 수만 명의 목숨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일은 시간에 쫓겨 급하게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과를 중히 보시지만 과정을 더 중히 보시는 분입니다. 기브아의 악은 분명히 심판받아야 했고, 본문도 그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향한 열심이 하나님께 묻는 일을 건너뛸 때, 그 정의는 또 다른 불의를 낳습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합니다(약 1:20). 성부께서는 우리의 분노를 멈춰 세우시고, 성자께서는 참된 증언으로 우리의 치우침을 드러내시며, 성령께서는 우리를 조급한 결의에서 여쭙는 기도로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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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할 일 앞에서 분노하지 않는 것은 무감각입니다. 그러나 분노가 곧 정의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너무 빨리 판결합니다. 사건이 알려지면 몇 시간 안에 여론의 재판이 끝나고, 나중에 사실이 달랐다는 것이 밝혀져도 그 판결은 거두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도 그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으로 서둘러 편을 가르고 사람을 정죄해 온 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지금 여기서 정하라는 재촉보다 먼저 여쭙는 기도의 시간을 지키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방책을 내지 않고, 빠진 목소리가 없는지 살피며, 결론을 정해 놓고 하나님의 허락만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싸워야 하는지부터 여쭙는 기도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화가 날 때 곧바로 보내는 문자, 곧바로 내리는 결정을 하루만 미루어 보십시오. 그 하루가 우리를 레위인의 재촉에서 건져 내고, 하나님의 정의 앞에 서게 합니다. 가정에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누군가 지금 당장 정하자고 몰아붙일 때, 함께 기도할 시간을 청하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일터에서 모두가 한 사람을 탓하며 서둘러 결론을 내려 할 때, 조금 더 알아보자고 말하는 한 사람이 되어 보십시오. 그 한마디가 사십만의 행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내가 그 행진의 한 사람이 되지는 않게 합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기다림은 정의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정의를 하나님의 손에 돌려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늦지 않으시고, 기브아의 악도 끝내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분의 정의는 우리의 조급함이 아니라 우리의 여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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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한 사람 같이 모이는 저희 마음이

분노를 향하지 않고

주의 뜻을 향하게 하옵소서.

모퉁이돌 되신 그리스도를

저희 하나 됨의 기준으로 삼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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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묻게 하시는 성령님,

내 편의 허물 앞에서

듣기만 하고 숨지 않게 하시고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듣고

판결하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에게 묻기 전에

주께 먼저 여쭙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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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되고 신실한 증인이신 예수님,

저희가 이야기할 때마다

조용히 빼 버리던 한 문장을

주 앞에 먼저 내어놓습니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이

제 마음 한가운데를 지나감을 고백하오니

저희 허물을 지신 은혜로 새롭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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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 정하라는 재촉 앞에서

여쭙는 기도의 시간을 지키게 하옵소서.

광양사랑의교회가

사람의 성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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