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9:11-21 광장에 앉은 얼굴

by 평화의길벗 posted Oct 0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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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9:11-21 광장에 앉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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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은 내가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광장에 앉은 낯선 얼굴 앞에서 눈을 들어 그를 내 집으로 맞아들이는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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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는 해가 기울도록 길을 나서지 못하던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장인의 집에서 닷새를 머물다 늦은 오후에야 겨우 일어선 걸음이었습니다. 늦어진 출발은 늦어진 도착이 되고, 늦어진 도착은 낯선 성읍의 어둠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다음 장면입니다. 해는 완전히 졌고, 일행은 처음 보는 성읍의 광장에 짐을 내려놓고 앉습니다. 하루가 저무는데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에게 그 시간은 가장 길고 가장 춥습니다. 골목마다 창에 불이 하나둘 켜지고 저녁 짓는 냄새가 번지는데, 그 불빛이 늘어갈수록 밖에 선 사람은 도리어 더 외로워집니다. 오늘 어딘가에서 머물 곳을 찾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 위에, 먼저 문을 열고 맞아 주시는 주님의 평화가 넉넉히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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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해 진 뒤 성읍 한가운데 앉아 있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레위 사람과 그의 첩, 그리고 하인입니다. 그들은 숨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오가는 성문 곁 광장이었습니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그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단 한 문장으로 적습니다.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삿 19:15). 그 한 문장이 한 성읍의 얼굴을 다 드러냅니다. 누가 무슨 악을 저질렀다는 말은 아직 없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벌써 고발이 됩니다. 오늘 묵상은 그 저녁의 광장 한가운데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지나친 사람들과 멈추어 선 한 사람, 우리는 그 사이 어디쯤에 서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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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려 할 때 종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눈앞의 여부스에 들어가 하룻밤 묵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었으나 주인은 단칼에 잘랐습니다.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삿 19:12). 그는 안전의 경계선을 혈통 위에 그었습니다. 낯선 얼굴들 사이보다 동족의 얼굴들 사이가 안전하리라 믿은 것입니다. 그 믿음에는 거룩을 지킨다는 명분까지 얹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그 선은 거꾸로 드러납니다. 차라리 이방인들 사이에 머물렀다면 더 나은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혈통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는 울타리가 정말 사람을 지키는지는, 그 안에서 낯선 얼굴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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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그렇게 기브아의 광장에 앉았습니다. 그들을 본 사람은 많았을 것입니다. 저녁을 짓던 사람도, 문단속을 하던 사람도 그 세 얼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거는 사람도, 묻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폭력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침묵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뒷날 소돔의 죄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교만하고 풍족하고 태평하였으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겔 16:49).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죄의 목록 맨 앞에 적힌 셈입니다. 기브아 사람들도 우리는 저 나그네를 해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닫힌 문은 중립이 아닙니다. 그 저녁의 침묵은 곧 닥칠 밤의 가장 어두운 예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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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은 환대를 낯선 이가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여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공간은 집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자리에서 열립니다. 성경은 그 공간을 끝까지 열어 두신 한 분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베들레헴에는 그분이 태어나실 자리가 없었고, 요한은 그분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적었습니다(요 1:11). 영접받지 못한 나그네로 오신 분이 도리어 우리를 먼저 맞아들이셨습니다. 광장에 앉아 있던 쪽은 본래 우리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그분은 모든 민족 앞에서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영접하였느냐. 그 물음 앞에서 기브아의 광장은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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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 돌아왔습니다.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삿 19:17). 눈을 들었다는 한마디가 이 단락의 문을 엽니다. 그는 토박이가 아니라 기브아에 거류하던 나그네였습니다. 제 설움을 기억하는 사람이 남의 설움을 봅니다. 그는 묻고 들은 뒤에 말했습니다.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삿 19:20). 안심하라는 원문은 샬롬 레카, 그대에게 평안이 있으라는 인사입니다. 쓸 것을 담당하겠다는 말은 그대의 모든 필요가 내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교회가 이웃의 신뢰를 다시 얻는 길도 거창한 사업이 아니라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눈을 들어 보고, 먼저 묻고, 한 사람의 필요를 조금 제 위에 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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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문은 이 따뜻한 저녁을 오래 두지 않습니다. 노인도 그 땅의 나그네였기에 그를 지켜 줄 친척이 없었고, 그 작은 집은 곧 성읍의 폭력 앞에 놓입니다. 한 사람의 환대로 성읍 전체의 어둠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참된 평화는 한 집의 문턱을 넘어 성읍을 다스리는 참된 왕을 기다립니다. 그러니 환대를 낭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문을 여는 일에는 위험이 따르고, 공동체가 함께 지켜 주어야 할 몫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한 사람의 환대가 헛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이 저녁을 굳이 기록해 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어둠을 다 걷어 내지 못하는 등불이라도 등불은 등불입니다. 말씀 앞에 오래 머무는 묵상은 우리를 그 작은 등불의 자리로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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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도 누군가의 걸음은 늦어질 것이고, 누군가는 해가 진 뒤에야 낯선 자리에 닿을 것입니다. 식탁에서 말이 없어진 자녀, 지쳐 들어오는 배우자, 혼자 점심을 먹는 새 동료의 얼굴이 우리 곁의 광장입니다. 오늘 묵상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 얼굴 앞에서 한 번 눈을 들겠느냐는 것입니다. 노인이 그랬듯 먼저 물어 주십시오.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는 그 짧은 물음이 한 사람을 광장에서 집 안으로 들이는 첫 문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안심하라 말씀하신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도 누군가의 짐을 조금 질 수 있습니다. 늦은 걸음 앞에 먼저 열리는 문이 되어, 이 땅의 저녁마다 샬롬을 전하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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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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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lSIfaAVkh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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