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9:01-10 마음에 말하러 간 길, 해 기운 뒤에 나선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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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때,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사는 한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 출신의 첩을 맞았으나 그 여인은 남편을 떠나 친정에서 넉 달을 지냅니다(1-2절). 남편은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려고 하인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찾아가고, 장인은 사위를 보고 기뻐하며 사흘 동안 먹고 마시게 합니다(3-4절). 넷째 날과 다섯째 날 아침마다 사위는 떠나려 하지만, 장인은 기력을 돋우고 마음을 즐겁게 하라며 번번이 붙잡습니다(5-8절). 마침내 해가 기울어 가는 저녁, 레위 사람은 더 머물기를 거절하고 첩과 나귀를 이끌고 길을 나서 여부스 맞은편에 이릅니다(9-10절). 화해로 시작한 여정이 어둠을 향해 출발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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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 17장부터는 흔히 부록이라 불리는 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첫째는 미가의 신상과 단 지파의 이주였고, 이제 둘째 이야기가 레위 사람과 그의 첩, 기브아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지파들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레위 사람이 주인공이고, 베들레헴과 에브라임 산지를 오가며,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화자의 말로 테두리를 두릅니다. 17장의 레위 청년이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으로 올라갔다면, 오늘의 레위 사람은 에브라임에서 베들레헴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옵니다. 같은 길이 반대 방향으로 한 번 더 밟히는 것입니다.
# 이 길 위에 놓인 지명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여인의 고향 베들레헴은 뒷날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다윗이 태어날 성읍이며, 일행이 곧 들어서게 될 기브아는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의 고향으로 이름난 곳입니다. 왕이 없던 시대의 이야기가 장차 두 왕가가 일어날 두 성읍 사이를 오가며 펼쳐지는 셈입니다. 더구나 이 부록의 두 사건은 모세의 손자와 아론의 손자가 살아 있던 이른 시기의 일입니다. 책의 맨 뒤에 놓였으나 시간으로는 앞쪽의 일이고, 왕이 없던 시대가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보여 주려는 배치입니다.
# 이 이야기에는 이름이 하나도 없습니다. 레위 사람, 그의 첩, 여자의 아버지, 하인, 뒤에 나올 노인까지 모두 이름 없이 불립니다. 이 익명성은 두 가지를 함께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사회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부가 화해하고 장인이 사위를 극진히 대접하는, 겉으로는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그 따뜻함 아래로 조금씩 번지는 그늘을 읽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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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마음에 말하러 간 길
성부 하나님은 떠나간 자를 향해 먼저 길을 나서시고, 굳은 마음 위에 다정한 말씀을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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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삿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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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는 말로 문을 엽니다. 17장과 18장에서 이미 두 번 들었고, 이 이야기가 끝나는 21장 마지막 절에서 다시 들을 말입니다. 겉으로는 사사 시대를 가리키지만, 앞 이야기와 이어 읽으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던 어두운 시기를 함께 가리킵니다. 주인공은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레위 사람입니다. 거류한다는 말은 제 땅 없이 머물러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레위 지파가 땅을 분배받지 못했으니 이상할 것은 없으나, 성막을 섬기도록 구별된 지파가 산지 구석을 떠도는 모습이 두 장 연달아 나오는 것 자체가 이 시대의 증상입니다.
그가 맞은 여인은 첩, 곧 필레게쉬입니다. 사사기에서 이 말이 처음 나온 자리가 기드온과 아비멜렉의 어머니였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이 여인입니다. 개역개정이 행음하고로 옮긴 동사 자나를 두고는 견해가 갈립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 말이 음행하다는 뜻 외에 화를 내다, 싫어하다로도 읽힐 수 있고 고대 역본들과 새번역이 실제로 그렇게 옮겼다고 정리합니다. 행음이 사실이었다면 율법상 큰 죄였을 텐데 남편이 찾아가 달래고 장인이 아무 책망 없이 딸을 받아들인 정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분명한 것은 그녀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고 넉 달 동안 아무도 찾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본문은 그녀가 왜 떠났는지 끝내 설명하지 않습니다. 떠난 사람의 사정이 기록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이야기가 여인을 다루는 방식의 첫 신호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길을 나섭니다. 다정하게 말하고로 옮긴 원문은 그녀의 마음 위에 말하려고입니다. 쌓인 앙금을 풀고 진솔한 말로 화해하려는 몸짓이며, 요셉이 두려워하는 형들을 위로할 때, 보아스가 룻에게 말할 때, 하나님이 떠나간 이스라엘을 거친 들로 데려가 위로하시겠다고 하실 때 쓰인 바로 그 표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오래된 모양을 봅니다. 떠난 쪽이 누구였든 먼저 길을 나서 마음에 말하러 가는 사랑, 잃은 양을 찾아 들로 나가신 목자의 사랑입니다. 다만 화자는 이 아름다운 출발을 끝까지 아름답게 두지 않습니다. 넉 달의 지체는 애정의 깊이를 의심하게 하고, 사람은 셋인데 안장 지운 나귀는 둘이라는 사소한 정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 사이 여인은 남편을 맞아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고, 아버지는 사위를 보고 기뻐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여인이 문장의 주어가 되어 움직이는 것은 여기와 그녀가 쓰러지는 26절뿐입니다. 마음에 말하러 간 길은 시작되었지만, 이제부터 그 마음에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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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도 넉 달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서운한 말 한마디로 틀어진 가족, 연락이 끊긴 친구, 서로 인사만 나누는 교회 안의 두 사람 사이에 계절이 몇 번씩 지나갑니다. 우리는 흔히 먼저 잘못한 쪽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다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려 온 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리는 사랑이기 전에 찾아가는 사랑이고, 따지는 말이기 전에 마음 위에 건네는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말에는 익숙하지만, 상한 마음 위에 놓이는 말에는 서툴렀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먼저 길을 나서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래 발길이 끊긴 성도의 집 앞으로, 화해를 미뤄 둔 그 사람 앞으로 한 걸음 옮기는 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를 흉내 내는 일입니다. 동시에 이 본문은 찾아가는 발걸음만으로 사랑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경고합니다. 나귀 두 마리에 누가 타고 누가 걸을지를 헤아리는 작은 배려, 상대의 마음이 무엇 때문에 상했는지 묻는 귀가 함께 가야 합니다. 오늘 내가 다정한 말을 건네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말 뒤에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를 함께 적어 보십시오.
가정에서는 배우자와 자녀의 마음 위에, 일터에서는 오래 서먹했던 동료의 마음 위에 말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말의 내용보다 말이 놓이는 자리가 중요합니다. 설득하려는 말은 머리에 닿지만, 마음 위에 놓이는 말은 먼저 상대의 서운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넉 달의 침묵을 깨는 첫마디가 변명이 아니라 미안하다는 고백이라면, 그 길은 전혀 다른 곳에 닿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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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절 붙드는 손, 잊힌 사람
성자 하나님은 사람의 넉넉한 식탁 한가운데서도 소외된 한 사람을 보시고, 그를 상 앞으로 불러 앉히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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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삿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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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은 사위를 사흘 동안 머물게 하며 먹고 마시게 합니다. 사흘 숙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환대 수준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다툼 끝에 다시 만난 부부와 반가운 장인의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넷째 날부터입니다. 사위는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나려 하고, 장인은 떡을 조금 먹고 가라며 붙잡습니다. 먹다 보니 하루가 가고, 장인은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라고 청합니다. 7절에서 간청으로 옮긴 말을 박유미 교수는 파차르, 곧 강요하다, 압박하다는 뜻의 동사로 설명합니다. 부드럽게 권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억지로 붙잡아 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접대 관례에 비추어 보아도 이 대접은 지나칩니다.
장인이 왜 이렇게까지 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사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했을 수도, 딸의 신변이 불안해 사위를 오래 잡아 두려 했을 수도, 사위의 분노가 풀리기를 기다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의 마음 한가운데에는 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딸이 이 장면에서 사라집니다. 낱말을 따라가면 소외가 더 선명해집니다. 5절에서 가라는 명령은 일행 전체를 향한 복수형이지만 떡으로 기력을 돋우라는 말은 사위 한 사람만을 향합니다. 6절과 8절에서 함께 먹고 마신 것도 장인과 사위 둘뿐입니다. 기력을 돋우라는 말은 원문으로 그대의 마음을 떠받치라는 뜻이고, 마음을 즐겁게 하라는 말도 마음이라는 낱말을 품고 있습니다. 음식은 넉넉하고 웃음은 끊이지 않는데, 식탁 가장자리에 앉은 한 사람의 마음은 아무도 헤아리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남편도 그녀에게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과도한 환대가 정작 그 환대가 향해야 할 사람을 가려 버린 것입니다.
레위 사람은 그녀의 마음에 말하러 왔는데, 이 집에서 떠받쳐지고 즐거워지는 것은 남자들의 마음뿐입니다. 마음이라는 한 낱말이 짧은 단락 안에서 방향을 잃어 갑니다. 그래서 이 넉넉한 식탁은 복음서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 식탁에서, 초대받지 않은 채 뒤로 와서 울던 여인을 보시고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고 물으셨습니다(눅 7:44). 성자 하나님은 잔치가 가장 무르익은 자리에서 가장 먼저 잊힌 얼굴을 보시는 분입니다. 비극은 대개 악의가 아니라 선의의 과잉과 한 사람을 향한 무관심이 만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의 지나친 환대는 곧 기브아에서 받게 될 지나친 냉대와 짝을 이룹니다. 한쪽은 떠나지 못하게 붙들고 다른 쪽은 아무도 문을 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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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와 가정의 식탁도 이 장면 앞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성껏 차린 잔치, 붐비는 친교실, 명절의 긴 상에서도 누군가는 늘 가장자리에 앉습니다. 말이 적은 사람, 새로 온 사람, 형편이 달라 섞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한국교회는 대접을 잘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고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그러나 대접이 대접하는 사람의 기쁨이 되고 체면이 될 때, 정작 그 대접이 향해야 할 사람은 사라집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식탁이 풍성함보다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모임에서 가장 말이 없던 사람에게 한 번 더 말을 걸어 보십시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한다며 쏟아붓는 수고가 자녀의 마음을 묻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학원과 좋은 음식은 넉넉한데 아이의 마음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집이 적지 않습니다. 일터에서도 회식과 행사가 이어지는 동안 누가 소외되어 있는지 살피는 눈이 필요합니다. 넘치는 친절이 한 사람의 목소리를 덮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나의 식탁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그리고 대접을 받는 자리에 있을 때도 같은 물음이 필요합니다. 레위 사람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곁에 있는 아내에게 한 번도 말을 건네지 않았습니다. 좋은 대우를 받는 동안 우리는 곁 사람의 침묵을 쉽게 놓칩니다. 존중받는 자리에 앉을수록, 그 자리에 함께 초대되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지 헤아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진 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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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0절 해 기운 뒤에 나선 걸음
성령 하나님은 머뭇거림과 조급함 사이에서 우리를 붙드시고,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지혜로 길을 나서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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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첩과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삿 1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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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날도 같은 일이 되풀이됩니다. 사위는 일찍 일어나고, 장인은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고 권합니다. 8절에는 6절과 달리 마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날만은 반드시 떠나겠다고 작정하고 맨정신을 지키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단락에는 일찍 일어나다, 일어서다, 떠나다 같은 동사와 머물다, 지체하다, 유숙하다 같은 동사가 끈질기게 맞서 나옵니다. 떠나려는 말과 붙드는 말이 줄다리기를 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갑니다. 결국 해가 기울었고, 장인은 보라는 말을 두 번이나 써 가며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일찍 가라고 청합니다. 이번에는 장인의 말이 옳았습니다.
그러나 레위 사람은 듣지 않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 반나절 거리라 해도 어두워질 무렵의 출발은 결코 지혜롭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험하다는 이성의 판단보다 더는 머물고 싶지 않다는 감정의 판단을 따랐습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올바른 판단을 가로막습니다. 장인의 무분별함에 사위의 어리석음이 더해진 것입니다. 드보라의 노래는 이 시대에 대로가 비었고 길손들은 오솔길로 다녔다고 노래했습니다. 길이 안전하지 않던 시대에 해 질 녘 출발은 그 자체로 위험이었습니다. 넉 달을 미루고 닷새를 붙들려 있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나쁜 시각에 서둘러 떠납니다. 미룸과 조급함은 반대처럼 보이지만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둘 다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 내 기분의 때를 따릅니다.
10절의 마지막 문장은 짧지만 무겁습니다. 일행은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고, 화자는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고 덧붙입니다. 중간 과정을 모두 생략한 서술이 레위인의 급한 마음을 전합니다. 여부스는 유다 지파가 한때 쳐서 불살랐으나 베냐민 자손이 끝내 쫓아내지 못한 성읍이었습니다(삿 1:21). 벨드먼은 사사기의 처음과 끝이 이 여부스를 두고 맞물린다고 말합니다. 쫓아내지 못해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남은 그곳이, 이제 레위 사람이 들어가기를 꺼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뒤이어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하였다는 말이 나오는데, 사람보다 짐승이 앞에 놓인 행렬입니다. 그 성에 뒷날 참된 왕이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그분은 잔치에 붙들려 때를 놓치지도, 두려움에 떠밀려 서두르지도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권하며 그 까닭으로 때가 악하다고 말했습니다(엡 5:16). 성령님은 머뭇거림에서도 조급함에서도 우리를 건지시어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길을 나서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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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결정에도 해가 기울 때가 있습니다. 미루고 미루다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가장 나쁜 때에 일을 저지르는 경우입니다. 넉 달 동안 대화를 피하던 부부가 가장 지친 밤에 결판을 내려 하고, 오래 쌓아 둔 불만이 가장 부적절한 회의 자리에서 터져 나옵니다. 미룸의 끝은 흔히 서두름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지혜는 빨리 움직이는 것도, 오래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때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결정해야 할 일은 오래 미루다가, 막상 결정할 때는 여론과 감정에 떠밀려 서두르는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기도로 때를 묻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해야 할 일을 오늘로 당겨 하되, 감정이 끓어오를 때는 한 밤 더 기도하고 이튿날 아침에 길을 나서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미루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서두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둘이 모두 하나님의 뜻보다 내 마음의 편안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저녁 해가 기울기 전에 미뤄 둔 한 가지 일에 손을 대고, 반대로 성급히 끝내려던 한 가지 일에는 하룻밤의 기도를 얹어 보십시오. 또 하나, 곁에서 들려오는 상식의 목소리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 본문에서 장인의 마지막 권유는 옳았고, 다음 본문에서 하인의 제안도 옳았습니다. 그러나 레위 사람은 두 번 모두 자기 판단을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가장 평범한 사람의 입을 통해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하십니다. 부모의 걱정, 배우자의 만류, 동료의 조심스러운 한마디가 성령께서 보내신 브레이크일 수 있습니다. 해가 기울었다는 말을 들을 때 그 말을 무시하지 않는 겸손이 우리를 어둠에서 지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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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왕이 없던 시대의 그늘 아래서도
떠나간 자를 향해 길을 나서신
아버지의 사랑을 찬송합니다.
굳은 마음 위에 건네시는
주의 다정한 말씀을 따라
저희도 먼저 찾아가게 하옵소서.
찾아가는 발걸음 뒤에
헤아리는 귀가 함께 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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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
웃음과 음식이 넘치는 자리에서
가장자리에 앉은 한 사람을
주님처럼 보게 하옵소서.
저희의 친절이 저희의 기쁨이 되어
그 사람의 목소리를 덮지 않게 하시고
이름을 불러 상 앞으로 모시는
광양사랑의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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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아시는 성령님,
미루다가 서두르는 저희의 걸음을
주의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해 기운 저녁에 조급히 떠나지 않고
잔치에 붙들려 때를 놓치지도 않게 하시어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길을 나서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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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향해 걷던 그 길 끝에서
참된 왕으로 오신 주님,
저희의 여정을 주께 맡기오니
해가 저물어도 두렵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