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7:1-13 집 한가운데 모신 것

by 평화의길벗 posted Oct 0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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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7:1-13 집 한가운데 모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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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자주 부르느냐로 드러나지 않고, 내 삶의 한가운데 무엇을 모셔 두고 사느냐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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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에서 가장 높은 자리는 안방 벽 위에 걸린 시렁이었습니다. 사람의 눈높이보다 조금 위, 손을 뻗어야 겨우 닿는 자리입니다. 어떤 집은 거기에 쌀을 담은 단지를 올려 두고 그것이 집을 지켜 준다고 믿었고, 어떤 집은 조상의 이름을 적어 모셨습니다. 그 선반은 넓지 않아서 여러 가지가 함께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그 집의 살림을 말해 주는 자리가 아니라 그 집의 마음을 말해 주는 자리였습니다. 무엇을 거기 올려 두었느냐가 그 집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고 무엇에 기대어 사는지를 말없이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앉으신 모든 분의 집에서 가장 높은 그 한 자리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주님께서 좌정하시는 평화가 있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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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에브라임 산지의 한 집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 집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는 은으로 만든 신상이 서 있고, 그 곁에는 에봇과 드라빔이 놓여 있으며, 해마다 값을 받고 들어온 제사장이 그것들을 지킵니다. 그런데 이 집 사람들은 자기들이 우상을 섬긴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믿었고, 이제 복 받을 일만 남았다고 확신했습니다. 어제 우리는 삼손이 눈을 잃고 무너지는 집 아래 묻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으로 열두 사사의 이야기는 끝났고, 오늘부터는 사사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 두 편의 부록이 열립니다. 적이 더는 밖에 있지 않고 집 안에 들어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아침의 묵상은 그 집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더듬어 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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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한 이름과 한 도둑질로 열립니다. 미가라는 이름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다는 고백을 평생 이름으로 지고 다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머니의 은 천백을 훔쳤습니다. 어머니가 도둑을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두려워 자백합니다. 계명을 어긴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저주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어머니의 대답입니다.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삿 17:2). 꾸짖어야 할 자리에서 서둘러 복을 빌어 저주를 덮어 버린 것입니다. 이 집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잘못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잘못을 가리는 보자기로 쓰입니다. 이름과 삶이 이렇게까지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첫 번째 아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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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돌려받은 은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삿 17:3). 한 문장이 여호와께 거룩히 드린다는 말로 시작해 내 아들을 위하여를 지나 신상을 만든다는 말로 끝납니다. 경건한 서두와 우상인 결말이 아무 저항 없이 한 줄에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천백을 다 드릴 듯이 말했으나 은장색에게 건넨 것은 이백뿐이었습니다. 부어 만든 신상이라는 말은 시내산 아래에서 녹인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던 장면을 불러옵니다. 그때도 백성은 그 앞에서 여호와의 절기를 선포했습니다. 광야에서 크게 벌어진 일이 이제 한 가정의 안방에서 조용히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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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은 우상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공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품으면 손이 그것을 낳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아들의 복을 지켜 주실 분으로 마음에서 먼저 빚었고, 손은 그 생각을 은으로 부어 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을 버리는 얼굴로 오지 않고 하나님을 내 곁에 붙들어 두려는 얼굴로 옵니다. 미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뜻을 묻는 도구까지 만들어 두고 아들 하나를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묻지 않아도 되는 집, 원하는 답이 이미 준비된 집이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화자가 처음 입을 엽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집에서 가장 높은 자리가 비자 사람의 눈이 그 자리에 올라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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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던 레위 청년 하나가 그 집에 이릅니다. 미가가 그를 붙잡고 제안합니다.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삿 17:10). 여호와가 기업이던 사람이 은 열과 옷 한 벌에 만족하여 그 집에 들어갑니다. 아버지가 되어 달라는 청을 받았으나, 성경은 그가 미가의 아들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적습니다. 값을 받은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값을 치른 사람의 뜻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가가 확신에 차서 말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삿 17:13). 여호와의 이름이 세 번 오르내리는 이 장에서 정작 여호와께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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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은 은으로 부어 만들 수 없습니다. 그 레위인이 떠나온 베들레헴에서 뒷날 참된 제사장이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은 열에 고용되지 않으시고 자기를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히 7:27). 미가의 셈법은 오늘 우리 입에서도 들립니다. 이만큼 드렸으니, 이만큼 섬겼으니 이제 복 주실 줄 안다는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그 셈법에 기대어 자랐고 지금 그 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자녀의 잘못을 꾸짖어야 할 자리에서 서둘러 복을 빌어 덮지는 않는지, 일터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며 시작한 일이 내 자리를 지키는 신상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십시오. 매일 말씀 앞에 앉는 묵상은 그 자리에 무엇이 올라앉았는지 알아차리게 하는 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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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늘 집으로 돌아가 가장 높은 그 자리를 한 번 올려다보십시오. 거기 올라앉은 것이 자녀의 성공인지, 통장의 숫자인지, 남의 인정인지 말입니다. 마음의 공장이 또 무언가를 빚어내려 할 때 그 손을 멈추고, 비어 있던 왕좌를 주님께 돌려 드리십시오. 은으로 사려던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주신 은혜가 그 자리에 놓일 때, 그 집은 비로소 참된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날마다 이어 가는 묵상의 걸음이 그 한 자리를 지키는 가장 든든한 울이 될 것입니다. 시렁은 본래 좁아서 두 가지를 나란히 올려 둘 수 없고, 우리 마음도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집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주님께 비워 드리고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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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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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enXoLzo3F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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