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6:15-31 밀린 자리에 돋는 것
*
온전한 신앙은 한 번도 꺾이지 않는 힘에서 증명되지 않고, 모든 것이 밀려 나간 자리에서도 다시 돋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드는 데서 깊어집니다.
.
삼손이라는 이름은 해를 뜻하는 히브리 낱말에서 왔습니다. 작은 해쯤 되는 이름입니다. 블레셋의 손아귀에 눌려 캄캄하던 시대에 태어난 아이에게 하나님은 그런 이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은 해가 떠오르는 것도 돋는다고 하고, 땅에서 싹이 올라오는 것도 돋는다고 합니다. 하늘의 일과 흙의 일이 한 낱말 안에 함께 들어 있는 셈입니다. 밤이 길다고 해가 없어진 것은 아니며, 베인 자리라고 뿌리까지 뽑힌 것은 아닙니다. 다만 돋는 일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데서 먼저 시작되기에, 우리는 어둠의 한복판에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펴 드신 모든 분의 마음에도, 가장 어두운 시각에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 빛이 닿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 본문에는 머리털을 밀린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머리털은 그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라는 마지막 표였습니다. 나실인은 포도나무 소산을 멀리하고, 주검을 가까이하지 않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사람입니다. 삼손은 이미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떠먹었고 수많은 주검을 만졌으니, 세 표 가운데 둘은 오래전에 무너지고 머리털 하나만 남아 있었습니다. 머리털에 무슨 마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지막 그루터기였습니다. 한때 성 문짝을 메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던 어깨가 이제 눈이 뽑힌 채 맷돌에 매입니다. 오늘 묵상은 그 어두운 옥에 화자가 남겨 둔 짧은 한 줄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
들릴라는 날마다 조릅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삿 16:15). 성경은 그 조름에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직역하면 영혼이 짧아졌다는 뜻입니다. 블레셋의 군대도 끊지 못한 사람을 한 사람의 끈질긴 말이 끊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진심을 털어놓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든 사이 머리털 일곱 가닥이 밀립니다. 잠에서 깬 그는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했지만, 화자는 덤덤하게 적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 16:20). 무서운 것은 빛이 떠난 일이 아니라 떠난 줄을 모르는 일입니다. 습관은 그대로 남았고 능력의 근원만 거기 없었습니다.
.
그는 가사로 끌려가 옥에서 맷돌을 돌립니다. 그 무렵의 맷돌은 넓적한 아래짝 위에 방망이 같은 위짝을 밀어 곡식을 가는 것이어서,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아야 했습니다. 여종이 하던 일입니다. 성 문짝을 메던 어깨가 곡식 몇 줌을 가는 데 쓰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짧은 문장 하나가 올라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삿 16:22). 다시 자라다로 옮긴 말은 땅에서 싹이 돋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기도했다는 말도, 회개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은혜가 그의 결단보다 먼저 왔습니다. 그루터기가 스스로 결심해서 움을 올리지 않듯, 하나님은 그가 돌아오기도 전에 그의 머리 위에서 새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파트모스」에서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하는 것도 자란다고 노래했습니다. 구원이 온다고 하지 않고 자란다고 쓴 것이 오늘 본문과 겹쳐 읽힙니다. 구원은 하늘에서 한꺼번에 떨어지기보다 가장 위태로운 자리의 흙 속에서 보이지 않게 자랍니다. 삼손에게 가장 위험한 곳은 가사의 옥이었고, 바로 거기서 머리털이 자랐습니다. 우리 삶에도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버려진 땅이 아니라 가장 조용히 경작되는 밭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람의 끝에 또 한 분이 서 계십니다. 삼손의 머리 위에 돋은 것이 한 번의 힘이었다면, 그분의 무덤에서 돋은 것은 다시는 베이지 않는 생명이었습니다. 참된 구원은 가장 깊이 베인 자리, 무덤이라는 그루터기에서 돋아났습니다.
.
그러나 머리털이 자랐다고 해서 삼손의 속까지 돋아난 것은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전에 모여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삿 16:23) 하며 그를 웃음거리로 세웠습니다. 두 기둥 사이에 선 그가 부르짖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삿 16:28). 생각하다로 옮긴 말은 기억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에는 내 두 눈의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원한이 끝까지 섞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섞인 기도를 기억하시고 응답하셨지만, 응답받았다는 사실이 동기를 옳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삼손은 원수와 함께 죽기를 구했고, 그리스도는 원수를 위해 죽으시며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
오늘 한국교회는 잘려 나간 그루터기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조롱을 들을 때가 많고,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교회가 스스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편안한 무릎에 기대어 가장 귀한 구별을 조금씩 내어 준 탓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떠나신 줄 모르는 무감각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밀린 자리에서도 다시 돋게 하시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넘어진 지체에게도, 가정에서 무너진 가족에게도 이제 끝났다고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비웃지 말고 그 머리 위에 움이 돋기를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옥에 갇힌 것 같다면, 내가 먼저 괜찮아져야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자리가 그 움을 밟지 않는 자리입니다.
.
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는 무너진 신전의 어둠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둠 앞에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한 줄을 적어 두었습니다. 해는 진 자리에서 다시 돋고, 싹은 베인 자리에서 다시 돋습니다. 우리말이 그 두 일을 한 낱말로 묶어 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지는 일과 돋는 일은 서로 다른 사건이 아니라 한 사건의 앞뒤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많이 밀려 나간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가장 조용히 무언가를 기르고 계신 밭일 수 있습니다. 묵상은 그 조용한 자람을 알아보는 눈을 얻는 일입니다. 위험이 있는 곳에서 구원을 기르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밀린 자리마다 돋아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
평화의길벗_라종렬
.
유튜브에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