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2:01-15 흐르는 강을 막아 선 나루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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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과의 싸움이 끝나자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몰려와 왜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느냐며 그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위협합니다(1-3절). 입다는 협상 없이 길르앗 사람들을 모아 에브라임을 치고, 요단 나루턱을 장악한 뒤 쉽볼렛이라는 말을 발음하게 해 도망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가려내어 죽입니다. 그날 죽은 이가 사만 이천 명이었습니다(4-6절). 입다는 여섯 해를 다스리다 죽어 길르앗의 한 성읍에 장사되고, 뒤를 이어 입산과 엘론과 압돈이 사사가 됩니다. 그들에게는 자녀와 손자와 나귀가 늘어 가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7-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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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입다는 경솔한 서원 끝에 무남독녀를 잃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암몬을 이긴 승리 뒤에 평온이 오지 않고, 이스라엘 안에서 칼이 뽑힙니다. 사사기에서 한 사사의 이야기가 동족끼리의 내전으로 끝나는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암몬을 이긴 날이 곧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허물기 시작한 날이 됩니다.
# 에브라임은 요단 서편 중앙 산지의 큰 지파로, 요셉의 아들이며 여호수아를 낸 지파입니다. 실로의 성막도 그 땅에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이겼을 때에도 그들은 늦게 나타나 왜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졌습니다(8:1-3). 그때 기드온은 부드러운 말로 노여움을 풀었지만, 그보다 훨씬 작은 동편 가문 출신인 입다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같은 불평에 다른 대답이 돌아오고, 결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 요단 강은 이스라엘을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는 물줄기였습니다. 동편에 자리 잡은 지파들은 언젠가 서편 형제들이 자기 자손을 여호와와 상관없는 자들로 여길까 두려워 강가에 증거의 제단을 쌓았습니다(수 22:24-27). 그 두려움이 입다의 시대에 현실이 됩니다. 에브라임은 길르앗을 본래 자기들에게서 도망한 자들이라고 깎아내렸고, 강은 형제를 잇는 물길이 아니라 서로를 가르는 경계가 됩니다.
# 본문 뒷부분의 세 사사는 짧게 지나갑니다. 그러나 이 소사사 목록은 앞서 나온 돌라와 야일의 기록(10:1-5)과 짝을 이루어 입다 이야기를 감싸고 있습니다. 입다라는 큰 이야기를 앞뒤에서 감싼 이 짧은 기록들 사이에서 사사의 자리가 하나님이 세우시는 부르심에서 사람이 물려주는 권세로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사사기는 이 짧은 기록 속에서도 한 시대가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를 숫자로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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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불사르겠다는 말 앞에서
성부 하나님은 싸움이 끝난 뒤 공로를 다투는 입술이 아니라, 싸움의 한복판에서 함께 짐을 지는 손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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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삿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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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 사람들은 모여서 요단을 건너 입다에게 옵니다. 그들이 내미는 말은 기드온 때와 같은 질문이지만 끝이 다릅니다.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기드온에게는 서운함을 따졌다면 입다에게는 방화를 예고합니다. '집'으로 옮긴 말은 건물만이 아니라 가문과 식구를 함께 가리킵니다. 막 하나뿐인 딸을 잃은 아버지에게 너와 네 집을 불태우겠다는 말이 얼마나 깊이 박혔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어제 불살라진 번제의 연기가 오늘 에브라임의 협박 속에서 다시 피어오릅니다. 에브라임이 요단을 '건너' 왔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입다가 목숨을 걸고 건넌 그 강을 그들은 이제 협박을 들고 건너옵니다.
입다의 대답은 사실만 놓고 보면 옳습니다. 그는 에브라임을 불렀고 그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손에 쥐고 홀로 건너갔고, 여호와께서 암몬을 넘겨주셨습니다. 에브라임은 싸움의 위험은 나누지 않고 승리의 몫만 나누려 합니다. 그들의 불평 속에는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아니라 빼앗긴 몫에 대한 계산이 들어 있습니다. 이 태도는 기드온 때부터 되풀이된 습관입니다. 큰 지파라는 자부심이 동편의 작은 가문이 이룬 일을 인정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문제를 푸는 자리에는 없다가 문제가 풀린 뒤에 가장 먼저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그 사람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옳은 대답이 곧 옳은 길은 아닙니다. 입다는 암몬 왕에게는 긴 편지를 보내 역사를 되짚으며 설득했던 사람입니다(11:12-27). 그런데 형제에게는 질문 하나를 던지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묻자마자 군대를 모읍니다. 말이 대화가 아니라 선전포고가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노여움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그들의 공을 먼저 높였고, 그 부드러운 대답이 칼을 칼집에 머물게 했습니다(8:2-3). 같은 에브라임, 같은 불평이었지만 한 사람은 형제를 얻었고 한 사람은 형제를 잃었습니다. 차이는 사실이 아니라 태도에 있었습니다. 입다의 입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이 나오지만 그 이름은 형제를 향한 변론에 쓰일 뿐 화해를 여는 데 쓰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싸움이 끝난 뒤 몫을 다투는 이들이 아니라 싸움의 짐을 함께 지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누가 더 옳으냐를 가리는 데서가 아니라 누가 먼저 자기를 낮추느냐에서 지켜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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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도 에브라임의 말이 들립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한 발 물러서 있다가, 일이 끝난 뒤에 왜 나에게는 묻지 않았느냐고 서운함을 쏟아 놓는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겪는 많은 분쟁이 교리보다 이런 소외감과 체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입다처럼 옳은 말로 되받아치는 것이 답은 아닙니다. 사실이 내 편이어도 형제를 이기려는 말은 공동체를 태웁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먼저 짐을 나누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수고하고 있을 때 그 곁에 서는 것이 끝난 뒤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귀합니다. 그리고 서운함을 들고 찾아온 이가 있다면 사실을 따지기 전에 그의 마음을 먼저 들어 주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봉사와 행사가 끝난 뒤 오가는 평가의 말들이 수고한 이들의 어깨를 무겁게 하지 않도록, 우리는 칭찬을 먼저 하고 제안은 나중에 하는 순서를 익혀야 합니다. 오늘 내가 뒤늦게 비평만 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비평을 멈추고 손을 보태십시오. 누군가 나를 향해 서운함을 쏟아 놓는다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 사람의 수고부터 알아주십시오. 직분을 맡은 이들일수록 이 말씀 앞에 더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공동체의 평화는 누가 이겼느냐가 아니라 누가 먼저 물러섰느냐로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부부와 부모 자녀 사이의 다툼은 대개 사실보다 서운함에서 커집니다. 부드러운 대답이 분노를 쉬게 한다는 잠언의 말씀은 오늘도 참입니다(잠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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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절 나루턱에서 묻는 한마디
성령 하나님은 말씨로 사람을 가르는 경계를 허무시고, 서로 다른 혀를 가진 이들을 한 백성으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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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삿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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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의 '쳐서 무찔렀다'로 옮긴 나카는 사사기 앞부분에서 가나안 성읍들을 칠 때 쓰던 낱말입니다. 이제 그 칼끝이 동족을 향합니다. 화자는 싸움의 까닭도 밝힙니다. 에브라임이 길르앗을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들이라고 불러 왔다는 것입니다. '도망한 자'는 주인의 허락 없이 달아난 종이나 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 똑같은 낱말이 에브라임에게 돌아옵니다. 길르앗을 도망자라 조롱하던 이들이 이제 요단을 건너려는 도망자가 됩니다. 남을 깎아내리던 말이 자기 운명을 부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화자는 이 말놀이를 통해 교만한 말이 어떻게 그 말을 한 사람에게 되돌아오는지를 조용히 보여 줍니다.
나루턱은 요단을 건너는 얕은 여울목입니다. 에훗은 그곳을 막아 모압 사람을 건너지 못하게 했고(3:28), 기드온의 부름을 받은 에브라임은 그곳을 막아 미디안 방백을 잡았습니다(7:24-25). 외적을 막던 자리가 이제 형제를 거르는 검문소가 됩니다. 길르앗 사람은 쉽볼렛을 발음해 보라고 합니다. 이 낱말은 '흐르는 강물'이나 '이삭'을 뜻하고, 에브라임 사람은 첫소리 '쉬'를 '시'로 내어 십볼렛이라고 말합니다. 개역한글은 두 낱말의 자리를 거꾸로 적었지만 개역개정은 히브리어를 따라 바로잡았습니다. 흐르는 강가에서 강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한 이들이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습니다. 요단 나루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만큼 말씨가 달랐다는 것은 이 백성이 얼마나 서로 닫혀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만 이천이라는 숫자는 뒷날 베냐민 지파가 잃은 이만 오천 명보다 많습니다(20:46). 20장의 참혹한 내전이 여기서 이미 예고됩니다. 그리고 입다의 이야기는 여섯 해라는, 사사들 가운데 가장 짧은 통치로 끝납니다. 그 땅이 평온하였다는 후렴도 끝내 나오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전쟁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영도, 여호와께서 넘겨주셨다는 말도 없습니다. 사람의 분노와 사람의 검문만 있습니다. 이 침묵은 하나님이 이 싸움을 당신의 전쟁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은 정반대의 일을 하십니다. 서로 다른 말을 쓰던 이들이 저마다 자기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게 하셨습니다(행 2:8-11). 발음으로 사람을 가르던 나루턱을 성령께서 모든 말씨가 함께 건너는 여울로 바꾸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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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도 쉽볼렛이 있습니다. 쓰는 말투, 고향의 억양, 교회에서 쓰는 익숙한 용어, 기도의 문장 하나로 사람을 우리 편과 저쪽 편으로 가릅니다. 한국교회는 지역과 이념과 세대의 말씨로 서로를 검문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어떤 낱말을 쓰는지만 듣고 그 사람의 신앙 전체를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말씨를 가려내는 귀는 밝아졌지만 그 말씨 뒤의 사람을 듣는 귀는 어두워졌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에는 여러 고장의 말씨가 함께 모입니다. 서툰 기도, 낯선 억양, 처음 교회에 온 이의 어색한 말투가 검문의 대상이 아니라 환대의 이유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다음 세대의 말은 어른들의 귀에 낯설게 들립니다. 청년들의 말투와 아이들의 표현을 고치려 들기 전에 그 안에 담긴 믿음의 고백을 먼저 들어 주는 어른이 되면 좋겠습니다. 외국에서 온 이웃과 다문화 가정의 서툰 우리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누군가의 말투 때문에 그 사람을 속으로 밀어낸 일이 있다면 돌이켜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쓰는 신앙의 말이 누군가에게는 건널 수 없는 나루턱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보십시오. 새가족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를 맞는 첫 말 한마디가 나루턱의 검문이 될지, 강을 건너는 손길이 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입술을 여실 때 그 입술은 사람을 가르는 암호가 아니라 사람을 불러 모으는 초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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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절 늘어나는 나귀, 사라진 구원
성자 하나님은 권세를 쌓아 자기 이름을 세우시는 분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셔서 자기를 비워 섬기시는 참된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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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삿 12:8-9, 1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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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사의 기록은 짧고 틀이 같습니다. 누가 사사가 되었고, 몇 해를 다스렸고, 죽어 어디에 묻혔는지가 전부입니다. 빠진 것이 있습니다. 이 셋에게는 여호와께서 세우셨다는 말도,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대신 자녀의 수와 나귀의 수가 적힙니다. 야일은 아들 서른 명이 어린 나귀 서른 마리를 탔는데(10:4), 입산은 아들딸이 예순 명이고 압돈은 아들과 손자를 합쳐 일흔 명이 나귀 일흔 마리를 탑니다. 기록에 올라가는 세대도 둘에서 셋으로 늘어납니다. 숫자가 커질수록 구원의 이야기는 작아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빠진 자리를 사람의 숫자가 채웁니다.
입산은 딸들을 밖으로 시집보내고 아들들을 위해 밖에서 며느리를 데려왔습니다. 그 '밖'이 다른 지파인지 이방인지는 본문이 분명히 밝히지 않지만, 어느 쪽이든 가문의 힘을 넓히려는 혼인 동맹의 모습입니다. 이방과의 혼인을 금하신 말씀(신 7:3-4)을 떠올리면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곧이어 나오는 삼손이 이방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엘론은 열 해를 다스렸다는 말 외에 한 일이 적혀 있지 않은데, 그가 묻힌 아얄론은 그의 이름과 히브리어 자음이 같습니다. 기드온의 오브라처럼 사사의 이름이 땅에 새겨지는 권력의 사유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압돈은 에브라임 땅 사람이었습니다. 방금 사만 이천 명을 잃은 그 지파에서 나귀 일흔 마리의 행렬이 나옵니다. 그가 묻힌 비라돈은 아말렉 사람의 산지라 불렸는데, 이스라엘이 끝내 몰아내지 못한 옛 원수의 이름이 그 땅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사가 아니라 스스로 자리를 넓히는 사사의 모습이 거기 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탄다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지위와 권위의 표였습니다. 드보라의 노래는 흰 나귀를 탄 자들을 백성의 지도자로 부르고(5:10), 뒷날 다윗 왕가의 이야기에서도 나귀와 노새는 왕실 사람들의 탈것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구원자의 자리가 가문이 물려받는 왕 같은 자리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 시대가 낳는 지도자의 수준은 그 시대 백성의 영적 수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참된 왕을 목마르게 기다리게 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그 기다림에 놀라운 방식으로 답합니다. 나귀 일흔 마리의 행렬이 아니라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빌려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왕이 계십니다(슥 9:9; 마 21:5). 그분은 자기 이름을 땅에 새기지 않으시고 자기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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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도 사역의 크기가 소명의 깊이를 대신하는 일이 흔합니다. 교회의 규모와 건물과 따르는 사람의 수가 늘어날수록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보다 누가 이만큼 이루었는지가 더 크게 적히기 쉽습니다. 한국교회가 겪어 온 세습과 사유화의 아픔도 이 본문의 나귀 행렬과 닮았습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가문이 아니고, 직분은 물려받는 재산이 아닙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모든 직분과 섬김이 나귀 새끼를 타신 왕을 따르는 자리이기를 바랍니다. 크기로 자랑하지 않고, 이름을 남기려 애쓰지 않고, 맡겨진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일에 마음을 쓰는 교회이기를 기도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에게 물려줄 것이 재산과 자리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일터에서도 직함과 연봉과 인맥의 숫자가 사람의 값을 대신하는 일이 흔합니다. 그 셈법에 익숙해진 마음은 교회 안에서도 같은 숫자를 찾습니다. 오늘 내가 쌓아 가는 것이 나귀의 수인지, 섬긴 사람의 이름인지 조용히 셈해 보십시오. 크고 화려한 것에 마음이 기울 때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시작해 빈 무덤으로 끝난 한 생애를 떠올리십시오. 그분은 아무것도 쌓지 않으셨지만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작은 교회라고 위축되지 않고 큰 교회라고 자랑하지 않는 자유가 거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셈의 끝에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왕 앞에 내가 가진 것을 겸손히 내려놓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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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싸움이 끝난 뒤에야 나타나
몫을 따지고 서운함을 쏟아 놓던
우리의 입술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수고하는 이의 곁에 먼저 서고
옳은 말보다 부드러운 대답으로
형제의 노여움을 쉬게 하는
넉넉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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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는 자주 말씨로 사람을 가르고
익숙한 억양이 아니면
나루턱에서 밀어내었습니다.
서툰 기도와 낯선 말투가
검문이 아니라 환대의 이유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입술이 암호가 아니라
초대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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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방언을 알아들으시는 성령님,
오순절의 바람으로 오셔서
갈라진 나루를 여울로 바꾸어 주옵소서.
광양사랑의교회에 모인
여러 고장의 말씨와 여러 세대의 목소리가
한 분 하나님의 큰 일을
함께 노래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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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왕이시여,
우리가 쌓는 숫자와 자리를 내려놓고
주님처럼 자기를 비우는 길을 걷게 하옵소서.
교회가 누구의 가문도 되지 않고
직분이 누구의 재산도 되지 않게 하시며
오직 주님의 이름만 높아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