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1:29-40 값없이 주신 승리, 값을 치른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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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자 그는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갑니다(29절). 그런데 싸움을 앞두고 그는 주께서 암몬을 넘겨주시면 자기 집 문에서 먼저 나와 영접하는 자를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30-31절). 여호와께서 암몬을 그의 손에 넘겨주시어 그는 아로엘에서 아벨 그라밈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크게 이깁니다. 그러나 미스바의 집에 돌아왔을 때 소고를 잡고 춤추며 맨 먼저 나온 이는 그의 무남독녀였습니다(34절). 입다는 옷을 찢으며 돌이킬 수 없다고 탄식하고, 딸은 두 달 동안 산에서 애곡한 뒤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서원대로 행하고, 이스라엘의 딸들은 해마다 나흘씩 그를 위해 애곡합니다(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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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입다는 옛길을 되짚으며 암몬 왕을 설득하려 했지만, 암몬 왕은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말이 다 끝난 그 자리에서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십니다. 사사기에서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고 기록된 사사는 옷니엘(3:10), 기드온(6:34), 입다, 삼손뿐입니다. 성령의 임하심은 하나님이 이 싸움을 친히 맡으셨다는 표지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곧바로 승리로 이어져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한 사람의 입이 끼어듭니다.
# 서원은 이스라엘 신앙에서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했고(삼상 1:11), 율법은 서원을 강요하지 않되 한 서원은 지키라고 가르칩니다(신 23:21-23). 동시에 율법은 사람을 드리기로 서원한 경우 그 값을 은으로 정해 대신 드리는 길을 열어 두었고(레 27:1-8), 사람을 불살라 신에게 바치는 일을 가장 가증한 가나안의 풍습으로 엄히 금했습니다(신 12:31; 18:10). 이웃 모압 왕 메사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맏아들을 성 위에서 번제로 드렸습니다(왕하 3:27). 입다의 서원은 바로 이 두 세계의 경계에서 나옵니다.
# 본문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서원(30-31절), 승리(32-33절), 서원의 이행(34-40절). 전성민 교수는 30-31절을 건너뛰고 읽어 보면 29절의 성령 임재가 32절의 승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지적합니다. 서원은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들어온 이물질이며, 그 때문에 값없이 주어질 승리가 거래의 대가처럼 보이게 됩니다. 사사기 화자는 전쟁 장면은 두 절로 짧게 처리하고, 서원이 낳은 비극에는 일곱 절을 씁니다. 본문의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 분량이 먼저 말해 줍니다.
# 이 본문을 읽을 때 마음에 두어야 할 또 하나의 본문이 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던 이야기입니다(창 22장). 두 이야기 모두 아버지가 하나뿐인 자식을 번제로 드리려 하고, 두 본문 모두 '하나뿐인'이라는 같은 낱말을 씁니다. 그러나 모리아 산에는 숫양이 있었고 길르앗의 미스바에는 없었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묻는 것이 오늘 묵상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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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1절 흥정이 된 서원
성령 하나님은 값없이 임하셔서 우리를 싸움터로 이끄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내미는 조건과 거래로 움직여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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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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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영이 임하시자 입다는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며 군사를 모읍니다. 싸움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칼을 들기 전에 다시 입을 엽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 서원의 시점이 몹시 부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군대가 모인 그 순간, 입다는 전투가 아니라 협상을 시작합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영을 받은 뒤에도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했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삿 6:34-40). 성령의 임하심이 사사의 군사적 지도력을 세워 주었지만, 그의 신앙과 판단까지 저절로 바로잡아 주지는 않았습니다. 전성민 교수가 인용하는 트리블의 표현대로, 이 서원은 믿음이 아니라 의심에서, 용기가 아니라 조종에서 나온 말입니다.
30절의 "과연 넘겨 주시면"은 같은 동사를 두 번 겹쳐 쓴 히브리어 강조 구문입니다. 하나님께 반드시 해 주셔야 한다고 못 박은 입다는 자기가 걸 것도 극단으로 키웁니다. 큰 것을 받으려면 큰 것을 걸어야 한다는 셈법입니다. 31절의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을 박유미 교수는 '나오다'라는 동사 야차의 분사형 요체로 읽습니다. 문 밖으로 나와 개선하는 사람을 맞이하는 것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입다는 처음부터 사람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가 바란 것은 평안히, 곧 샬롬 가운데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그 샬롬을 얻는 값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내걸었습니다.
박유미 교수는 여기서 결정적인 전환을 봅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여호와께서 친히 용사로 싸우시는 전쟁이고 사람은 그분을 돕는 자리에 섭니다. 그런데 입다는 서원을 통해 여호와의 전쟁을 자기의 전쟁으로 바꾸고, 하나님을 자기 승리를 돕는 보조자로 만들었습니다. 이 싸움은 입다에게 길르앗의 머리가 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11:9). 쫓겨났던 기생의 아들이 가문을 세울 수 있는 마지막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 간절함이 신앙의 언어를 빌려 보험을 하나 더 들게 만든 것입니다. 어제 심판하시는 여호와께 판결을 맡긴다던 그 입이, 오늘은 하나님께 조건을 겁니다.
입다는 여호와를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출애굽과 광야의 역사를 누구보다 정확히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이웃 민족의 신 그모스처럼, 큰 제물을 바치면 움직이는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는 것과 신뢰하는 것은 다릅니다. 지식으로는 은혜의 역사를 줄줄 외우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은혜를 믿지 못하고 값을 치러야 안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령으로 임하셔서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입다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약속이 아니라 이미 주신 약속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듯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처럼 무엇이 부족하신 분이 아닙니다(행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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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도에도 입다의 셈법이 스며들 때가 있습니다. 이번 일만 이루어 주시면 제가 무엇을 하겠습니다. 이 병만 낫게 해 주시면 평생 헌신하겠습니다. 간절함에서 나온 기도이지만, 그 밑바닥에 하나님은 무언가를 걸어야 움직이신다는 불신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서원이 아니라 흥정입니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작정과 서원을 신앙의 열심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 안에 참된 헌신이 많았지만, 하나님과 거래하는 마음을 믿음으로 착각하게 만든 그늘도 있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드리는 기도와 헌신은 은혜를 얻어 내기 위한 값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안에 이미 임하신 성령님을 신뢰한다면, 더 큰 것을 걸지 않아도 됩니다. 두려운 싸움을 앞두고 우리가 할 일은 조건을 내거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신 주님을 따라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마음속에 하나님께 걸어 둔 조건이 있다면 조용히 꺼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조건을 내려놓고, 주님이 이미 주신 약속 하나를 붙들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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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33절 그래도 넘겨주신 승리
성부 하나님은 사람의 경솔한 말에 매이지 않으시고, 당신의 백성을 향한 구원의 약속을 끝까지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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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삿 11: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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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사는 놀랄 만큼 짧습니다. 박유미 교수는 사사기 화자가 입다의 전쟁을 두 절로 간략하게 처리한 것은 이 이야기의 중심이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승패가 가장 큰 문제였겠지만, 화자에게 전쟁은 다음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일 뿐입니다. 입다는 아르논 강가의 아로엘에서 시작해 민닛을 거쳐 아벨 그라밈까지 이십 성읍을 치며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아벨 그라밈은 '포도원들의 풀밭'이라는 뜻입니다. 암몬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열여덟 해 동안의 압제가 끝납니다(10:8).
이 승리를 만든 주어는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어제 본문에서 입다는 여호와께서 시혼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했습니다(11:21). 오늘 화자는 똑같은 말로 입다의 승리를 설명합니다. 입다가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넘겨주셨습니다. 박유미 교수는 하나님이 입다의 문제 많은 서원과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손길을 멈추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승리는 서원의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곤고함으로 마음에 근심하셨고(10:16), 그 긍휼이 이 승리의 뿌리였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전성민 교수의 말처럼 30-31절의 서원이 없었다면 입다는 이 승리를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 감사히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값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 승리는 선물이 아니라 청구서가 됩니다. 하나님은 거래를 받아들이신 적이 없는데, 입다는 거래가 성사되었다고 믿습니다. 은혜를 거래로 오해한 사람은 은혜를 받고도 빚진 자처럼 삽니다. 받은 선물 앞에서 기뻐하지 못하고, 치러야 할 값을 셈하며 두려워합니다.
하나 더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옷니엘 뒤에는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다는 말이 나오고(3:11), 에훗과 드보라와 기드온 뒤에도 같은 후렴이 붙습니다(3:30; 5:31; 8:28). 암몬도 항복했다는 말까지는 나옵니다. 그러나 입다의 이야기에는 그 땅이 평온하였다는 말이 끝내 나오지 않습니다. 곧이어 에브라임과의 내전이 벌어지고 사만 이천 명이 죽습니다(12:6). 윌코크가 말하듯 하나님은 이렇게 무너진 사람들 안에서도 손을 떼지 않으시지만, 그 은혜가 사람의 죄를 덮어 두는 변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긴 싸움 뒤에도 평안이 없는 이유를 본문은 조용히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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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서툰 기도와 어긋난 동기에도 불구하고 일하십니다. 이것은 큰 위로입니다. 우리가 잘못 약속하고 엉뚱한 조건을 걸어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구원의 뜻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위로를 핑계로 삼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셨으니 내 동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입다처럼 승리 뒤에 평안을 잃습니다. 한국교회가 누린 성장과 부흥도 하나님의 긍휼이었지, 우리의 공로나 거래의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받은 크고 작은 응답들을 셈할 때에도 하나님이 넘겨주셨다는 주어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청구서가 아니라 선물로 받는 사람만이 승리 뒤에도 평안을 누립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좋은 일을 떠올리며, 내가 얻어 낸 것이 아니라 주께서 넘겨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고백이 쌓이면 이긴 날에도 교만하지 않고 진 날에도 무너지지 않는 평안이 우리 안에 자리 잡습니다. 그 평안이 곧 입다가 끝내 얻지 못한 참된 안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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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36절 소고를 들고 나온 무남독녀
성자 하나님은 우리의 경솔한 말이 낳은 상처 한가운데 찾아오셔서, 아무도 대신할 수 없던 자리에 스스로 참 제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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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삿 11: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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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로 옮긴 히브리어 힌네는 놀람을 담은 말입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어지는 "나와서"가 31절 서원의 '나오는 자' 요체와 짝을 이루는 여성형 요체트라고 설명합니다. 직역하면 '보라, 그의 딸이 바로 나오는 자다'가 됩니다. 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아버지의 승리를 기뻐하며 달려 나왔습니다. 소고를 잡고 춤추며 개선하는 용사를 맞는 것은 이스라엘 여인들의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뒤 미리암이 그랬고(출 15:20), 다윗이 돌아올 때 여인들이 그랬습니다(삼상 18:6). 가장 기쁜 노래가 가장 참담한 순간을 불러옵니다. 입다가 서원하기 전에 누가 먼저 나올지를 생각했더라면 이 장면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화자는 "무남독녀"라는 말에 무게를 싣습니다. 원문은 그녀가 그의 하나뿐인 자식이었고 그 밖에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고 길게 풀어 씁니다. 이 '하나뿐인'(예히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하실 때 쓰신 바로 그 말입니다(창 22:2). 전성민 교수는 이 딸이 없으면 입다의 가문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미스바에 집을 세울 만큼 성공한 입다의 미래가 이 한 아이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가문을 세우려고 건 서원이 가문을 끊는 칼이 되었습니다.
입다의 탄식은 더 아픕니다.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박유미 교수는 그가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한탄한다고 읽습니다. '괴롭게 하다'로 옮긴 아카르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자에게 쓰는 무거운 말로, 여리고 전리품을 감춘 아간에게 여호수아가 쓴 말입니다(수 7:25). 입다는 자기가 만든 비극의 책임을 딸에게 돌립니다. 그리고 입을 열었으니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사람을 드리기로 한 서원을 값으로 대신하는 길이 있었습니다(레 27:1-8). 몰랐다면 무지이고, 알고도 외면했다면 체면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는 말씀보다 자기 입을 더 무겁게 여겼습니다.
딸의 대답은 놀라울 만큼 담담합니다. 박유미 교수는 딸이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여신 입'을 거듭 말하며 이 비극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를 조용히 드러낸다고 봅니다. 동시에 그녀는 여호와께서 원수를 갚으셨다는 사실을 앞세웁니다. 아버지보다 딸이 먼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합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 딸을 어둡고 암울한 사사 시대를 강렬하게 비추다 유성처럼 사라진 아름다운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모리아 산에서는 하나님이 숫양을 준비하셨지만(창 22:13), 미스바에는 딸을 대신할 숫양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번제는 하나님이 명하신 시험이었고, 입다의 번제는 그의 입이 만든 올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비극보다 멀리 갑니다. 하나님은 끝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분이십니다(롬 8:32). 대신할 제물이 없던 자리에 하나님의 독생자가 서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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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은 생각보다 멀리 가서, 생각지 못한 사람에게 닿습니다. 부모의 욕심이 자녀의 삶에 짐이 되고, 지도자의 경솔한 약속이 공동체의 약한 이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회자의 성공을 위해 세운 목표와 서원이 가장 순수하게 헌신하는 성도들을 지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승리를 가장 먼저 기뻐하며 달려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짓밟은 것은 원수가 아니라 아버지의 입이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무엇을 결단하고 약속할 때, 그 약속이 가장 먼저 누구에게 닿는지를 함께 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잘못 연 입이 있다면 체면 때문에 돌이키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고, 말씀이 열어 두신 회개와 대속의 길로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를 대신해 값을 치르신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우리는 잘못된 말을 끝까지 붙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내 말 때문에 마음이 상한 가족이나 동역자가 있다면, 그에게 먼저 다가가 내가 잘못 말했다고 고백하는 용기를 구합시다. 돌이키는 입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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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40절 해마다 나흘씩의 애곡
삼위 하나님은 이름 없이 스러진 약한 이의 눈물을 잊지 않으시고, 그 애곡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남겨 우리를 깨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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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삿 11:37, 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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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두 달을 청합니다.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다는 것입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여기서 '처녀'로 옮긴 베툴림이 '나의 처녀 됨'을 뜻하며, 원문에는 '죽음'에 해당하는 낱말이 없다고 밝힙니다. 그래서 중세 이후로 입다가 딸을 불사른 것이 아니라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성막에 바쳤다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같은 자료는 39절이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라고 서원의 이행을 분명히 말하므로 실제 번제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결론 내립니다. 요세푸스와 대부분의 교부들도 그렇게 읽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결혼하지 못하고 자식 없이 죽는다는 것은 이름이 끊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딸은 자기 생명과 함께 끊어지는 미래를 애곡합니다.
화자는 번제 장면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서원한 대로 행하였다는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을 덮고,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다는 말만 덧붙입니다. 차마 그릴 수 없는 장면 앞에서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리고 이 딸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입다의 딸로만 불립니다. 사사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름 없는 여인들이 남자들의 폭력과 경솔함 속에 희생됩니다. 레위인의 첩(19장), 실로의 딸들(21장)이 그렇습니다. 입다의 딸은 그 슬픈 행렬의 앞자리에 서 있습니다. 김회권 교수는 그녀의 죽음을 부조리하고 억울한 상황을 대속적인 태도로 감내한 한 여인의 슬픈 향기, 사사 시대를 고발하는 향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침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 나흘씩 애곡하더라." '애곡하다'로 옮긴 말 타나는 드보라의 노래에서 여호와의 의로운 일을 '전하라'고 할 때 쓰인 말과 같습니다(삿 5:11). 이스라엘의 딸들은 해마다 산에 올라 그녀의 이야기를 되풀이해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입이 그녀를 죽였다면, 딸들의 입이 그녀를 기억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이의 경솔한 말이 한 생명을 삼켰을 때, 그 곁에 서지 못한 약한 이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함께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울음은 해마다 이어져 관습이 되었고, 공동체는 그 기억 앞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히브리서는 입다를 믿음의 사람들 명단에 올립니다(히 11:32). 윌코크는 이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수수께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공적으로 그의 종을 사용하시는 것과 그 종의 마음이 바른 것은 반드시 같지 않다는 엄숙한 경고이기 때문입니다. 입다는 흠 없는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이 긍휼로 쓰신 깨어진 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릇이 깨어지며 흘린 피를, 하나님은 이름 없는 딸의 기억 속에 보존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울던 여인들처럼, 이스라엘의 딸들은 억울한 죽음을 잊지 않는 공동체의 양심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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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무엇을 기억하는 공동체입니까. 우리는 승리와 성장과 헌신의 이야기를 즐겨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 뒤에서 상처 입고 떠난 사람들, 지도자의 욕심과 교회의 성공 뒤에서 조용히 무너진 이들의 이름은 쉽게 잊습니다. 입다의 딸을 위해 해마다 산에 오른 이스라엘의 딸들은 우리에게 다른 기억법을 가르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약한 이들의 눈물을 기억하고, 억울함을 당한 이들 곁에서 함께 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정에서도 나의 결정 때문에 대가를 치른 가족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덮지 말고 꺼내어 사과하고 함께 울어야 합니다. 함께 우는 기억이 공동체를 살립니다. 그리고 그 기억의 끝에서 우리는 대신 울고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명절을 지나며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잘된 일만이 아니라 아팠던 일도 꺼내어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는 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 눈물을 주님도 기억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시는 분이십니다(시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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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여호와의 영으로 임하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자주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미 주신 약속을 믿지 못하고
더 큰 것을 걸어야 안심하는
우리의 셈법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은혜를 거래로 바꾸지 않게 하시고
먼저 가신 주님을 따라 걷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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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신 아버지,
우리의 서툰 말과 어긋난 동기에도
주께서 원수를 넘겨주셨습니다.
받은 승리를 청구서로 여기지 않고
감사의 선물로 받게 하옵소서.
이긴 싸움 뒤에도 평안을 잃지 않도록
주께서 하신 일을 날마다 고백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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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
우리가 경솔하게 연 입이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닿을 때가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돌이키지 못한다 말하지 않고
말씀이 열어 두신 회개의 길로 돌아서게 하옵소서.
대신할 숫양이 없던 자리에
스스로 제물이 되신 주님을 붙들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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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기억하시는 성령님,
이름 없이 스러진 이들의 울음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옵소서.
광양사랑의교회가
억울한 이들 곁에서 함께 우는 공동체,
약한 이의 기억을 품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그 기억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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