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1:01-11 돕 땅에서 불려 온 머리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2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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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1:01-11 돕 땅에서 불려 온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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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나 기생이 낳은 아들이었고, 본처의 아들들은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라며 그를 아버지의 집에서 쫓아냅니다(1-2절). 그는 돕 땅으로 피하였고 잡류가 그에게 모여들었습니다(3절). 암몬이 쳐들어오자 길르앗 장로들이 돕까지 찾아와 장관이 되어 달라고 청하지만, 입다는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쫓아내지 않았느냐고 되묻습니다(4-7절). 장로들이 싸움이 끝난 뒤에도 공동체를 이끌 머리의 자리까지 약속하자, 입다는 여호와를 증인으로 세워 확약을 받고 백성은 그를 머리와 장관으로 삼습니다. 입다는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룁니다(8-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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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서늘한 장면으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짧아지셨는데, 미스바에 모인 길르앗 방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서로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과 싸우겠느냐,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10:18). 오늘 본문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다만 그 대답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찾아 나선 사람의 모습으로 옵니다.

# 입다가 머문 돕은 요단 동편 길르앗의 북동쪽, 오늘날 요르단 북부의 변두리로 봅니다. 이스라엘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이방 부족들과 맞닿은 경계 지대였습니다. 길을 잃은 사람과 빚진 사람과 쫓겨난 사람이 모여들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 돕은 히브리 말 토브, 곧 좋다는 뜻입니다. 가장 좋지 않은 처지의 사람들이 좋은 땅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 살았던 것입니다. 이름과 형편이 이렇게 어긋난 땅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이 본문에는 사사기의 오래된 순서가 뒤집혀 있습니다. 옷니엘과 에훗과 기드온 때에는 백성이 부르짖으면 여호와께서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입다에게는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다는 말이 한 줄도 없습니다. 장로들이 그를 데리러 가고 백성이 그를 머리로 삼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11:29).

# 입다의 이야기는 기드온과 아비멜렉의 이야기와 겹쳐 읽도록 짜여 있습니다. 기드온이 들은 큰 용사라는 이름이 입다에게도 붙고, 아비멜렉 곁에 모였던 방탕하고 경박한 자들을 가리키던 같은 낱말이 입다 곁의 잡류에게도 쓰입니다. 첩의 아들이 형제를 죽였던 이야기 바로 뒤에, 기생의 아들이 형제에게 쫓겨난 이야기가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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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쫓겨난 큰 용사

하나님은 사람이 출신으로 지워 버린 이름을 끝까지 기억하시며, 변두리로 밀려난 자리를 당신의 일이 시작되는 땅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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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삿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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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절은 한 사람을 두 문장으로 소개합니다. 입다는 큰 용사였고, 그는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 기생으로 옮긴 조나는 실은 창녀에 가까운 말입니다. 큰 용사로 옮긴 깁보르 하일은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들었던 바로 그 이름입니다. 한 사람 안에 가장 높은 칭호와 가장 낮은 출신이 함께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화자는 한 줄을 더 붙입니다. 길르앗이 입다를 낳았다. 어머니가 누구였든 그를 낳은 이는 길르앗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인정했고, 이스라엘의 상속은 아버지를 따라 이어졌습니다. 그러니 그가 기업을 잃은 것은 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다. 원문은 너라는 말을 앞에 세워 그 한 사람을 콕 집어냅니다. 우리와 너 사이에 선을 긋고, 그 선 밖으로 밀어낸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그 시대 사람에게 정체성과 보호의 울타리였습니다. 그 울타리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이름을 잃고 몸을 지켜 줄 공동체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입다가 간 곳은 돕 땅, 이스라엘의 힘이 닿지 않는 경계였고 좋은 땅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변방이었습니다. 거기로 잡류가 모여듭니다. 비어 있다는 뜻에서 나온 이 말은 가진 것도 기댈 곳도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입다와 함께 출입하였다는 말에는 무리를 이끌고 드나들며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는 뜻이 스며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을 한 사람의 몰락으로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쫓겨난 자에게 사람이 모여들고, 그 무리가 훗날 길르앗을 건지는 군대가 됩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의 굴에도 환난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여들었습니다(삼상 22:2). 예수께서도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 불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비워 둔 자리를 비워 두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입다가 흠 없는 사람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첫 세 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사람이 곧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 사이를 잇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은혜가 입다에게 어떻게 닿는지를 사사기는 천천히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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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오랫동안 반듯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이기를 바랐습니다. 출신과 학력과 집안이 괜찮은 사람들이 앞자리에 앉고, 사연 있는 사람은 뒷자리로 가거나 어느새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일이 자주 그 뒷자리에서, 아니 교회 밖의 변방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에도 누군가의 너는 우리와 다르다는 말에 상처 입고 들어온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에게 교회는 두 번째 아버지의 집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선을 긋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투와 옷차림과 살아온 길로 사람을 가르고, 우리끼리 편한 자리를 지키느라 새로 온 이의 자리를 좁히지는 않았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돕 땅에 산다고 느끼는 분이 있다면, 그 땅의 이름이 좋은 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쫓겨난 사람의 이름을 지우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십니다. 오늘 한 사람에게 우리 집에 와도 된다는 말을 건네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환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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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절 싸움만 맡기려는 부름

하나님은 위기 앞에서 서로에게만 묻는 우리의 셈을 보시고도, 그 서툰 발걸음마저 당신의 긍휼이 흘러갈 길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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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삿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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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였다는 짧은 문장이 이야기를 다시 움직입니다. 어제 본문 끝에서 암몬은 길르앗에 진을 쳤고 이스라엘은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방백들은 먼저 나가 싸우는 사람을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로 삼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장로들이 몸소 길을 떠납니다. 목적지는 돕, 자기들이 한때 등을 떠밀어 보낸 사람이 사는 변방입니다. 데려오려고 갔다는 말에는 급한 마음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오라고 기별을 보낸 것이 아니라 발로 찾아간 것입니다. 쫓아낸 사람들이 쫓겨난 사람의 문 앞에 서는 장면, 사사기는 이 역전을 아무 설명 없이 그대로 보여 줍니다. 한때 문을 닫았던 손이 이제 그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민 말은 머리가 아니라 장관이었습니다. 카친이라는 이 낱말은 구약에 드물게 나오는데, 주로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을 가리킵니다. 여호수아가 전쟁 중에 불러 모은 군대 지휘관들을 가리킬 때도 이 말이 쓰였습니다(수 10:24). 장로들보다 낮은 자리에서 싸움을 맡는 사람입니다. 미스바에서 약속한 머리는 어디로 가고 장관만 남았습니다. 싸움은 맡기되 공동체의 윗자리는 내주지 않겠다는 셈입니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입다라는 사람이 아니라 입다의 칼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돕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자리를 먼저 내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더 쓸쓸한 것은 빠진 문장입니다. 장로들은 암몬 앞에서 서로에게 물었고, 이제는 쫓아낸 사람에게 묻습니다. 여호와께 여쭙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사사기 첫 장에서 이스라엘은 누가 먼저 올라가 싸우리이까 하고 여호와께 물었습니다(삿 1:1). 같은 물음이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오갑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서툰 걸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어제 본문에서 짧아지신 그분의 마음이 이 길 위에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셈으로 사람을 찾아 나선 그 길이, 하나님께는 당신의 백성을 건지시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가 온전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그 틈으로 먼저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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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오면 우리도 먼저 사람을 찾습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생기면 기도회보다 대책회의가 먼저 열리고, 하나님께 묻기 전에 해결해 줄 사람의 이름부터 헤아립니다. 사람을 찾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을 무엇으로 부르는지가 중요합니다. 필요한 기능만 떼어 내 부르는 부름은 받는 사람을 다시 변방에 세워 둡니다. 한국교회가 전문가와 인재를 모셔 오는 일에는 부지런했지만, 그들을 한 식구로 받아들이는 일에는 서툴렀던 적이 많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누군가를 부를 때에는 일만 맡기지 말고 자리를 함께 내어 주었으면 합니다. 일이 끝나면 돌아가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끝나도 곁에 있는 사람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름보다 먼저 하나님께 여쭙는 시간을 두었으면 합니다. 오늘 내 앞에 놓인 문제를 두고 누구에게 전화할지보다 누구에게 먼저 아뢸지를 정하는 것, 그것이 사사기 첫 장의 물음을 되찾는 길입니다. 사람을 부르기 전에 하나님께 여쭌 공동체는 부른 사람을 함부로 다시 내보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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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절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나님은 필요할 때만 사람을 찾는 우리의 셈을 드러내시고, 사람을 쓰임으로 재지 않고 존재로 받으시는 참된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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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삿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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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는 그 속을 꿰뚫어 봅니다.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원문은 여기서 너희라는 말을 앞에 세웁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너희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둘째 절에서는 형제들이 쫓아냈다고 했는데 이제 장로들에게 그 책임을 묻습니다. 형제들이 세월이 지나 장로가 되었을 수도 있고, 장로들이 그 일을 묵인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쫓겨난 일은 한 집안의 다툼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한 사람을 문밖에 세운 일이었습니다. 미워하였다는 말도 가볍지 않습니다. 싫어서 밀어냈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물음은 더 날카롭습니다.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필요 없을 때는 내쫓고 필요할 때는 부르는 셈법을 그는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들의 대답을 보십시오. 그들은 변명하지 않고 사과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값을 올립니다.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로쉬, 곧 머리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공동체를 이끄는 가장 윗자리입니다. 장관에서 머리로, 한 번의 거절로 자리가 한 단계 뛰어오릅니다. 잘못은 끝내 입에 오르지 않고 조건만 바뀝니다.

이 흥정을 읽는 마음이 편하지 않은 까닭은 어느 쪽에서도 하나님께 묻는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은 사과 대신 자리를 내밀고, 입다는 상처를 지렛대로 삼아 더 큰 자리를 받아 냅니다. 사람이 사람을 쓰임으로 재는 곳에서는 사과도 거래가 됩니다. 그러나 이 장면 뒤에는 어제 본문의 한 문장이 여전히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삿 10:16). 사람들이 서로 값을 매기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놓지 않으십니다. 탕자를 기다린 아버지는 아들이 조건을 내밀기도 전에 달려가 목을 안았습니다. 하나님은 쓸모를 보시기 전에 사람을 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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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사람을 쓰임으로 재는 데 익숙합니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연락하지 않던 사람에게 일이 막히면 전화를 겁니다. 교회에서도 봉사할 자리가 비면 그제야 오래 잊고 지내던 이름을 떠올립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지냈는지 묻기 전에 무엇을 맡아 줄 수 있는지부터 묻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부름이 받는 사람에게 어떻게 들리는지를 입다의 입으로 들려줍니다.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광양사랑의교회가 누군가를 부를 때에는 필요를 말하기 전에 안부를 먼저 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난날 우리가 밀어낸 사람이 있다면 자리를 내밀기 전에 그때의 일을 먼저 사과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과 없이 올려 주는 자리는 상처를 덮을 뿐 낫게 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쓰임으로만 불려 본 기억이 있는 분이라면, 그 부름에 응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부르시는지 먼저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내 칼을 보시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자녀라 부르시고 그다음에 일을 맡기십니다. 그 순서를 아는 사람은 쓰임을 잃는 날에도 자기 이름을 잃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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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절 미스바에서 아뢴 말

하나님은 사람끼리 맺은 약속의 증인이 되어 주시되, 우리의 계산까지 당신 앞에 다 아뢰게 하셔서 그 말을 달아 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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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삿 1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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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는 한 번 더 확인합니다.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이 말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처음 입다의 입에 오릅니다. 승리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동시에 원문은 여기서도 너희와 나를 또렷이 맞세웁니다. 이기면 머리가 되고, 지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그는 정확하게 짚어 냅니다. 신앙의 언어와 협상의 언어가 한 문장 안에 포개져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심이었는지 화자는 판정하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판단은 이어지는 이야기가 대신 내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이 대답합니다.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여호와께서 우리 사이에서 들으시는 분이 되실 것이다에 가깝습니다. 사람끼리 맺은 약속에 하나님이 증인으로 불려 옵니다. 그리고 입다는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룁니다. 미스바는 망대라는 뜻으로, 어제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진을 친 곳입니다. 훗날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회개시키고 사울을 왕으로 뽑는 곳도 미스바입니다. 입다가 거기서 아뢴 것은 기도라기보다 방금 맺은 계약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읽어 올린 것에 가깝습니다. 장로들이 약속을 뒤집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이름으로 봉인해 둔 셈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었다는 문장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편의 보증인으로 부를 때에도, 하나님은 그저 도장만 찍어 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 앞에 아뢴 말은 그분의 저울에 오릅니다. 바로 이 입다가 몇 절 뒤 길르앗의 미스바를 지나며 하나님 앞에 또 한 번 말을 내놓습니다(삿 11:29-31). 그 서원이 그의 집에 무엇을 남기는지 우리는 곧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은 흥정의 끝이 아니라 심판과 은혜가 함께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참 머리이신 분은 자기 말을 아뢰어 자리를 굳히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여쭈어 자기를 내려놓으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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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증인석에 앉힙니다. 기도로 결정했다는 말, 하나님이 여신 문이라는 말, 섬김이라는 말로 이미 내린 결정을 굳히곤 합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다툼도 서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불러 놓고 시작되었습니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순간 우리 계산도 함께 하나님 앞에 놓인다는 것을 잊는 것이 문제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무엇을 정하시거든 그 결정과 함께 그 결정을 내린 속마음까지 하나님 앞에 다 아뢰어 보십시오. 내가 얻고 싶은 것, 두려운 것, 지고 싶지 않은 것을 숨기지 말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입다는 자기 말을 다 아뢰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여쭙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뢰는 데서 멈추지 말고 들으려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는 것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 내 계획의 보증서가 아니라 내 계획을 내려놓는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아뢴 말은 우리를 묶는 덫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는 울타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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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너는 우리와 다르다는 말에

문밖으로 밀려난 이들을

끝까지 기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좋은 땅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변방의 밤에도 함께 계셔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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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먼저 선을 그었던 자리를

오늘 부끄러움으로 돌아봅니다.

말투와 출신으로 사람을 가르고

편한 자리를 지키느라

새로 온 이의 자리를 좁혔습니다.

우리 교회가 두 번째 아버지의 집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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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할 때만 이름을 부르던

우리의 셈을 용서하소서.

자리를 내밀기 전에 안부를 묻고

부르기 전에 사과하게 하소서.

쓸모보다 사람을 먼저 보시는

아버지의 눈을 우리에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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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이름을 증인석에 앉히고

우리 계산을 감추지 않게 하소서.

아뢰는 데서 멈추지 않고

말씀을 들으려 기다리게 하소서.

자기를 내려놓으신 참 머리 예수를 따라

오늘 하루를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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