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0:01-18 일어난 사사들, 짧아진 하나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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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 뒤에 돌라와 야일이 일어나 사십오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내고, 야일은 아들 삼십 명에게 나귀와 성읍을 나누어 줍니다(1-5절). 이스라엘은 다시 일곱 민족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며, 하나님은 그들을 블레셋과 암몬의 손에 파시어 열여덟 해를 억눌리게 하십니다(6-9절). 백성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으라며 거절하십니다(10-14절). 그들이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마음에 근심하시고, 미스바에 모인 길르앗 방백들은 먼저 싸울 머리를 찾습니다(15-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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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아비멜렉이 한 여인의 맷돌 위짝에 쓰러지고 하나님이 그와 세겜의 악행을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다는 판결로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정 실험이 무너진 자리에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사 이야기의 끝마다 붙던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는 문장이 이번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쉼표 없이 다음 사람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는 더 깊은 배교가 이어집니다.
# 사사기는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여섯 사람의 긴 이야기 사이에 삼갈, 돌라, 야일, 입산, 엘론, 압돈의 짧은 기록을 끼워 넣습니다. 짧은 기록은 이름과 지파, 거주지, 햇수, 장지 정도만 전하지만 그 몇 줄이 앞뒤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 주는 경첩 노릇을 합니다. 오늘 1-5절이 바로 기드온과 입다 사이의 경첩입니다. 두 사람이 다스린 사십오 년은 겉으로 조용했으나, 그 조용함이 곧 회복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 6-18절은 입다 이야기의 머리말입니다. 무대는 요단 강 동편 길르앗으로,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가 살던 땅입니다. 이번에는 억압하는 민족이 둘로 나오는데, 암몬은 곧이어 입다가 맞설 상대이고 블레셋은 훗날 삼손이 맞설 상대입니다. 사사기 후반부의 두 큰 이야기가 이 한 단락에서 함께 문을 엽니다.
# 암몬은 롯의 작은딸에게서 난 벤암미의 후손으로, 요단 동편 얍복 강 상류의 랍바를 중심으로 살던 민족입니다. 모세는 광야 길에서 암몬 땅을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암몬은 길르앗을 두고 오래 다투었으며, 그 해묵은 영토 문제가 다음 본문 입다의 외교전에서 그대로 불거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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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일어난 사람들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일어서는 자리가 아니라 그분이 일으켜 세우시는 자리에서 참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평온한 세월의 길이까지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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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삿 10:1).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삿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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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사를 소개하는 첫 동사가 같습니다. 돌라가 일어나서, 야일이 일어나서입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사사기의 앞부분과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옷니엘과 에훗이 등장할 때 화자는 여호와께서 구원자를 세우셨다고 적었습니다. 같은 동사 쿰이지만 앞에서는 일으켜 세우다는 사역형이었고, 여기서는 스스로 일어나다는 능동형입니다. 주어가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옮겨 갔습니다.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말은 있으나 누구에게서 구원했는지는 없고,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이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돌라는 진홍 물감을 내는 벌레를 가리키는 말과 같은 이름입니다. 화려한 옷감의 붉은빛이 작은 벌레에서 나오듯, 이 사람의 이십삼 년도 겉으로는 조용하고 안쪽은 알 수 없는 세월로 남습니다.
야일의 기록은 더 짧은데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그에게는 구원했다는 말조차 없습니다. 대신 아들 삼십 명과 어린 나귀 삼십 마리와 성읍 삼십 개가 나옵니다. 나귀를 탄다는 것은 드보라의 노래에서 흰 나귀를 탄 자들이라 불린 유력자의 표시였습니다. 히브리 원문에서 어린 나귀와 성읍은 소리가 거의 같은 낱말이라 한 번 들으면 서로 겹쳐 울립니다. 아들마다 나귀 한 마리와 성읍 하나씩, 권력이 집안 안에서 고르게 나뉘어 대물림되는 그림입니다. 칠십 명의 아들을 둔 기드온의 집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막 읽은 독자에게 이 숫자는 경고등처럼 켜집니다.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른다는 말은 그 이름이 땅에 새겨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단락 어디에 계십니까. 화자는 하나님을 한 번도 주어로 세우지 않습니다. 그 침묵이 곧 판단입니다. 평온했다는 말도, 여호와께서 함께하셨다는 말도 없이 두 사람은 장사되고 이야기는 곧바로 배교로 넘어갑니다. 사람이 스스로 일어난 자리에는 사람의 이름만 남습니다. 성경이 참된 구원자를 말할 때 늘 붙이는 말은 하나님이 일으키셨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를 두고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 곧 일으키셨다고 전했습니다. 스스로 높아지지 않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을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일어남과 세워짐 사이에 하나님나라의 모든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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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지난 세월 스스로 일어난 지도력이 대물림되는 아픔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아들에게 물려주고, 기관이 자라면 가까운 사람으로 채우는 일이 믿음의 언어로 포장되곤 했습니다. 야일의 아들들이 탄 나귀는 요즘 말로 하면 직함이고 차량이고 자리입니다. 그것이 섬김의 도구인지 소유의 표시인지는 대물림의 순간에 드러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맡은 자리를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구역장의 자리, 교사의 자리, 부모의 자리, 일터의 책임자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내가 스스로 일어나 앉았는지, 하나님이 세우셔서 서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스스로 앉은 자리는 놓지 못하고, 세우심을 받은 자리는 때가 되면 기쁘게 내어놓습니다. 내 이름이 땅에 새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 그 마음을 주님께 내려놓으십시오. 오래 남는 것은 하봇야일 같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람의 섬김입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다음 세대를 세울 때도 혈연과 친분보다 부르심을 먼저 묻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름 없이 스물세 해를 지킨 돌라처럼,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맡겨진 날수를 성실히 채우는 것도 귀한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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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절 일곱 신들과 두 손
하나님은 백성이 다른 신들에게 내어 준 마음을 그 신들의 손에 넘기시어, 우상은 결코 구원이 되지 못함을 몸으로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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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삿 10:6).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삿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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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은 숨이 찰 만큼 깁니다. 바알들과 아스다롯,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 자손의 신들,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까지 일곱 갈래가 이어집니다. 아람의 하닷, 시돈의 에스문,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 블레셋의 다곤이 한꺼번에 불려 나온 셈이고, 한 민족에 신이 하나씩만 있던 것도 아니니 가나안의 만신전을 통째로 들인 꼴입니다. 동사는 셋입니다. 그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했습니다. 섬기다는 동사가 두 번 나와 한 번은 긍정으로 한 번은 부정으로 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은 것이 아니라 섬김의 목록에서 지운 것입니다. 모든 신을 섬기되 여호와만 빼놓은 목록, 그것이 이 시대의 신앙이었습니다.
7절의 파시매는 사사기 앞부분에서 되풀이되던 판결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넘겨받는 손이 둘입니다. 블레셋의 손과 암몬의 손, 이스라엘이 섬기던 신들의 나라가 바로 그들을 억누르는 나라가 됩니다. 섬기던 대상에게 짓밟히는 역설입니다. 8절에서 쳤다로 옮긴 말은 출애굽기에서 원수를 부수다라고 옮긴 드문 낱말이고, 억압하였다로 옮긴 라차츠는 어제 본문에서 맷돌이 아비멜렉의 두개골을 깨뜨렸다고 할 때 쓴 바로 그 말입니다. 부서지고 깨지는 열여덟 해였습니다. 암몬은 요단을 건너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까지 흔들었고, 9절은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했다고 적습니다. 이 곤고의 뿌리 차라르는 좁다, 꽉 끼다는 뜻이어서 옴짝달싹 못 하는 형편을 그립니다.
하나님은 이 장면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분은 새로운 재앙을 만들어 내지 않으십니다. 백성이 스스로 고른 것을 고른 그대로 겪게 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을 내어 준 곳은 결국 그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셨다고 말할 때의 그 내버려 두심이 여기서 먼저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버려 두심은 버리심이 아닙니다. 좁아진 자리에서만 들리는 부르짖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섬기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않고 조입니다. 참 하나님은 우리를 그 조임에서 풀어 넓은 곳에 세우시려고, 끝내 스스로 좁은 십자가에 매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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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오늘 이 목록을 읽을 때 남의 이야기로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 시대의 신들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성공의 신, 안전의 신, 자녀 성적의 신, 집값의 신, 건강의 신이 저마다 제단을 요구합니다. 무서운 것은 여호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들 사이에 여호와를 한 칸 끼워 넣고 사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 여호와의 칸이 가장 먼저 비워집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내 하루를 조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아 주십시오. 잠을 못 이루게 하는 것, 늘 셈하게 만드는 것, 없으면 불안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가 섬기는 신일 수 있습니다. 그 신은 나를 지켜 주는 것 같지만 실은 나를 좁은 데로 몰아넣습니다. 오늘 한 가지를 정해 그 앞에서 손을 떼어 보십시오. 그리고 비워진 자리에 주님을 먼저 모시는 연습을 해 보십시오. 넓은 곳은 그렇게 열립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식탁에서 가장 자주 오르는 화제가 무엇인지, 아이에게 가장 자주 하는 당부가 무엇인지 들어 보면 우리 집이 어느 신을 섬기는지 드러납니다. 그 대화의 한가운데에 주님의 이름을 다시 올려놓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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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4절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하나님은 습관이 된 부르짖음을 저절로 받아 주는 장치가 아니시며, 거절의 말씀으로라도 관계의 진실을 되묻게 하시는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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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삿 10:10).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삿 10: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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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흠잡을 데가 없어 보입니다. 화자가 6절에서 쓴 버리다와 섬기다를 그대로 가져다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히브리 원문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를 맨 앞에 두어 죄의 인정부터 합니다. 게다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은 뉘우침의 깊이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래도 당신은 우리 하나님이시니 외면하지 말아 달라는 은근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사사기 안에서 이만큼 정확한 고백은 처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이 전과 다릅니다. 그동안은 부르짖음 다음에 곧바로 구원자를 세우셨는데, 이번에는 긴 말씀으로 먼저 지난 일을 셈하십니다. 순서가 바뀐 것 자체가 이 장면의 무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건지신 역사를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애굽 사람, 아모리 사람, 암몬 자손, 블레셋 사람, 시돈 사람, 아말렉 사람, 마온 사람입니다. 마온은 칠십인역에 미디안으로 되어 있어 기드온 시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섬긴 신이 일곱 갈래였듯 하나님이 건지신 민족도 일곱입니다. 배교가 전면적이었던 만큼 구원도 전면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3절의 다시는이 나옵니다. 이 말의 뿌리는 6절의 다시 악을 행하여와 같은 동사 야사프입니다. 너희는 다시 악을 행하였으니 나는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14절의 너희가 택한 신들이라는 말은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외치던 장면을 불러옵니다. 그때 택한다고 했던 백성이 결국 다른 것을 택했습니다.
이 거절은 하나님이 긍휼을 잃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셔야 할 만큼 죄가 깊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주문을 외우면 열리는 문처럼 하나님을 다루려는 신앙을 깨뜨리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기계가 아니라 인격이시기에 거절하실 수도 있고, 거절하심으로써 관계가 무엇인지 가르치십니다. 오늘 함께 읽는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나는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하십니다. 물러서심도 사랑의 한 방식입니다. 그 물러서신 하나님이 끝내 사람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대신해 버림받는 부르짖음을 십자가에서 친히 외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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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만큼 부르짖는 교회도 드뭅니다. 새벽마다 철야마다 통성으로 외치는 기도는 우리의 귀한 유산입니다. 그러나 부르짖음이 익숙해지면 그 안의 방향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고 급한 일이 지나가면 다시 다른 것을 섬기는 되풀이가 습관이 됩니다. 입으로 하는 고백은 해마다 더 정확해지는데 삶은 그대로인 일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한 가지를 여쭈어 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해 주실 일을 찾는 것입니까.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결과가 다릅니다. 해 주실 일만 찾는 사람은 일이 해결되면 떠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해결되지 않아도 머뭅니다. 혹시 기도가 오래 응답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거절이 아니라 얼굴을 구하라는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과 일터에서 위기 때만 꺼내 드는 신앙이 아니라 평안할 때에도 주님을 먼저 모시는 신앙으로 자라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드리는 기도에 요청의 목록 대신 감사의 목록을 먼저 올려 보십시오. 받은 은혜를 셈하는 입이 되면 급할 때만 찾는 습관이 조금씩 풀립니다. 거기서부터 관계가 다시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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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8절 짧아진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곤고를 끝내 견디지 못하시는 마음을 품으신 분이시며, 그 참지 못하시는 사랑으로 닫힌 것 같던 구원의 길을 다시 여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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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삿 10: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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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을 들은 이스라엘이 다시 입을 엽니다. 이번 말은 앞의 고백보다 짧고 낮습니다.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라는 말은 어떤 처분이든 받겠다는 항복입니다. 다만 한 가지, 오늘 우리를 건져 달라고 구합니다. 그리고 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 전 집안의 이방 신상들을 버리게 했던 일,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라고 했던 일과 같은 동작입니다. 6절에서 섬기지 아니하던 여호와를 16절에서 섬깁니다. 사사기에서 회개가 이만큼 손에 잡히는 행동으로 기록된 곳은 드뭅니다.
그러자 16절 끝에 한 문장이 붙습니다. 개역개정은 여호와께서 마음에 근심하시니라고 옮겼지만 원문은 그분의 네페쉬가 짧아졌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짧아진다는 것은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숙어이고, 민수기에서는 백성의 마음이 상하다로, 삼손 이야기에서는 번뇌하다로 옮겼습니다. 무엇을 참지 못하셨는지를 두고는 해석이 갈립니다. 박유미는 이 곤고를 백성의 고통으로 읽어 긍휼을 억누르지 못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보고, 전성민은 곤고로 옮긴 아말을 헛수고로 읽어 습관처럼 되풀이되는 간청을 더는 견디기 어려우셨던 마음으로 봅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이 백성의 형편에 묶여 흔들리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17-18절이 이상합니다. 암몬이 길르앗에 진을 치자 이스라엘도 미스바에 모이는데, 방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서로에게 묻습니다. 누가 먼저 나가서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머리가 되리라. 사사기 첫 절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같은 물음이 이제는 하나님을 뺀 채 상금이 걸린 모집 공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짧아지셨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제 셈을 합니다. 그래도 이 짧아진 마음이 이야기를 앞으로 밀고 갑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처럼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는 하나님입니다. 예수께서도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듯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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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위기를 말할 때 우리는 자주 누가 먼저 나가서 이 판을 이끌 것인가를 묻습니다. 능력 있는 지도자, 말 잘하는 대변인, 전략을 세울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미스바의 방백들처럼 서로에게만 묻고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면 그 모집 공고는 또 다른 아비멜렉을 부를 뿐입니다. 먼저 물어야 할 분은 우리 곤고 때문에 이미 마음이 짧아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의 고통 앞에서 그분의 마음이 먼저 짧아집니다. 그리고 그 마음 앞에 설 때는 이스라엘처럼 손에 잡히는 한 가지를 치워 보십시오. 우리 집 안에, 휴대폰 안에, 통장 안에 자리 잡은 이방 신 하나를 오늘 내려놓는 것이 회개입니다. 말이 행동이 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더 참지 못하시고 움직이십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에게 묻기 전에 먼저 무릎으로 묻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의 일을 정할 때에도, 가정의 큰 결정을 앞두고도 회의보다 기도가 먼저인 순서를 지켜 가십시오. 그 순서 하나가 미스바를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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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스스로 일어서려던 저희를
오늘 다시 세워 주소서.
제 이름을 땅에 새기려는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세우신 자리에서 섬기다가
때가 되면 기쁘게 내어놓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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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목록에서 주님을 지우고
다른 신들을 채워 넣던 날들을
부끄러움으로 고백합니다.
저를 조이던 것들이
신이 아니라 쇠사슬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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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할 때만 부르던 이름이 아니라
평안할 때에도 먼저 부르는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소서.
거절처럼 들리던 침묵 속에서도
저희를 기다리신 사랑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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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곤고 앞에서
마음이 짧아지시는 하나님,
오늘 손에 잡히는 우상 하나를
주님 앞에서 치우게 하소서.
서로에게 묻기 전에
먼저 주님께 여쭙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