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9:46-57 손에 익은 돌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2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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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9:46-57 손에 익은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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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은 하나님이 언제 갚으시는지를 알아내는 일이 아니라, 그분이 갚으실 때 쓰시는 것이 이미 내 손에 익은 하루치 물건임을 알아보는 데서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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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손에 가장 익은 물건은 무엇입니까. 아침마다 저절로 잡히는 것, 눈을 감고도 어디 있는지 아는 것, 손가락이 먼저 기억하는 그 하나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국자이고 어떤 이에게는 자동차 열쇠이며 어떤 이에게는 자루가 반들반들해진 낡은 연장입니다. 값으로 치면 얼마 되지 않고 남이 보면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쥔 손만큼은 정확합니다. 오래 쓴 물건은 손의 모양대로 닳아 있고 손은 그 물건의 모양대로 굳어 있습니다. 그 닳은 자리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들어앉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장면에도 그런 물건이 하나 나옵니다. 어느 여인이 날마다 식구의 끼니를 위해 잡던 돌입니다. 이 말씀을 펴 드신 모든 분의 손에도 오늘 좋은 것이 들리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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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겜이 헐린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남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아 들어간 곳이 있었습니다.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삿 9:46). 엘브릿은 언약의 신이라는 뜻이고 보루로 옮긴 말은 신전 안의 은밀한 내실이나 지하 동굴을 가리킵니다. 이름에 언약이 붙어 있으니 지켜 주시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은 얼마 전 그들이 포도주를 마시며 자기들의 왕을 저주하던 자리였습니다. 저주를 쏟아 놓았던 방으로 저주받은 자를 피해 들어간 셈입니다. 이름만 언약인 것은 위기의 날에 벽이 아니라 종이였습니다. 아비멜렉은 나뭇가지를 쌓아 불을 놓았고 남녀 약 천 명이 그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데베스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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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베스는 그를 배반한 적이 없는 성읍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갔습니다. "성읍 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읍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삿 9:51). 그가 또 불을 지르려고 망대 문으로 다가서던 그때 위에서 무엇이 떨어집니다.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삿 9:53). 그 시절 맷돌은 우리가 아는 둥근 두 짝이 아니었습니다. 넓고 길쭉한 아래짝 위에 밀대 모양의 위짝을 앞뒤로 굴려 곡식을 빻았습니다. 아래짝은 무거웠으나 위짝은 이삼 킬로그램 정도였고,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의 손에 맞는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피난하면서 챙겨 올라간 살림 도구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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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것은 싸우려고 준비한 돌이 아니었습니다. 살려고 들고 올라간 돌이었습니다. 그런데 화자가 고른 낱말을 보면 이 장면이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두개골을 깨뜨렸다고 옮긴 라차츠는 약한 이를 짓누르는 압제자의 폭력을 그릴 때 쓰이는 말입니다. 아비멜렉이 사람들에게 하던 그 동작이 낱말 그대로 그의 머리에 되돌아온 것입니다. 낱말은 한 겹 더 있습니다. 한 여인이라고 옮긴 말은 이샤 아하트인데, 이샤만으로도 한 여인인데 하나를 뜻하는 아하트를 굳이 덧붙였습니다. 아홉 장 앞머리에서 아비멜렉이 형제 칠십 명을 죽인 곳이 한 바위 위, 에벤 아하트였습니다. 한 바위에서 시작된 일이 한 돌로 끝납니다. 화자는 판결문을 쓰지 않고 낱말만 조용히 포개어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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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삿 9:56). 갚으셨다는 말은 돌려주셨다에 가깝습니다. 사람의 저주가 용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려주신 것입니다. 여자를 뜻하는 잇샤는 불을 뜻하는 에쉬와 발음이 닮았으니, 세겜에서 나와 아비멜렉을 사르리라던 그 불이 결국 이 여인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 돌려주시는 방식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무기고를 열지 않으셨습니다. 부엌을 쓰셨습니다. 야엘의 손에 장막 말뚝이 들렸던 것처럼 이번에는 한 여인의 손에 맷돌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참 왕은 자기 머리를 지키려 남을 죽인 이가 아니라, 남을 살리려 제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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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우리 손을 다시 보게 합니다. 한국교회는 큰 것이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오래 배웠습니다. 사람이 모여야 하고 예산이 있어야 하고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신 것은 칼이 아니라 맷돌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보십시오. 밥을 짓는 손, 운전대를 잡는 손, 장부를 적는 손, 아픈 이를 씻기는 손, 아이의 숙제를 봐 주는 손입니다. 아침의 묵상은 그 손을 새 것으로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이미 익은 그 손을 누구의 것으로 볼 것이냐를 바꾸어 줍니다. 그 한 번의 바꿈이 하루의 무게를 온전히 다르게 만듭니다. 같은 일을 하는데 마음이 가벼워지는 날이 그렇게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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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무 준비도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맷돌 위짝이 그 여인의 손에 익기까지는 수천 번의 아침이 있었습니다. 곡식을 빻던 세월이 없었다면 그 돌은 그날 그 손에 없었을 것입니다. 쓰임받는 손은 갑자기 생기지 않고 되풀이된 하루에서 자랍니다. 묵상도 그와 같습니다. 오늘 한 번 읽어 무엇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같은 시간에 앉는 그 되풀이가 손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이름이 성경에 없다는 것도 함께 새겨야 합니다. 아버지도 남편도 적히지 않았습니다. 가장 귀한 일들은 대개 이름이 남지 않습니다. 남지 않아도 하늘의 장부에는 빠짐없이 적힙니다. 사람의 기억은 얇고 하나님의 기억은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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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손에 익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아침마다 저절로 잡히는 그것, 값으로 치면 얼마 되지 않는 그것이 오늘 하나님의 손에 들릴 수 있습니다. 대단한 것을 갖추고 나서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닳아 있는 것을 내어 드릴 때 쓰임받습니다. 하나님은 새 연장을 찾지 않으시고 손에 붙은 연장을 찾으십니다. 저녁에 손을 씻으며 오늘 이 손이 무엇을 했는지 한 번 헤아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하루를 거두는 묵상입니다. 잘한 일을 세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쓰였는지를 보는 일입니다. 닳은 자리마다 세월이 들어앉은 여러분의 그 손이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쓰이고, 그 손으로 지은 오늘 하루가 성실함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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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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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t1LJCHCcW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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