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9:7-21 쓰임을 아는 나무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19, 202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가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사사기 9:7-21 쓰임을 아는 나무

*

온전한 신앙은 더 높은 자리로 옮겨 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제 쓰임을 알아보고 그 자리에서 열매를 내어 놓는 일입니다.

.

어릴 적 산에서 땔나무를 해 나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게에 지고 내려와야 하니 먼저 가벼운 나무를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가볍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고 불땀이 좋아야 했습니다. 뿔나무가 그랬습니다. 가벼운 데다 화력이 좋고 도끼를 대면 결을 따라 쭉쭉 갈라졌습니다. 노간주나무는 달랐습니다. 불땀은 솥에 구멍이 날 만큼 좋은데 너무 무거워 마른 것이 아니면 지고 내려올 수가 없었고, 도끼 날이 통통 튀어 좀처럼 쪼개지지 않았습니다. 속이 빈 나무가 있었고 결이 배배 꼬인 나무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무를 만지며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쓸모없는 나무는 없고 다만 저마다 쓰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펴 드신 모든 분의 하루에도 저마다의 쓰임을 알아보는 즐거움이 찾아들기를 바랍니다.

.

오늘 본문에도 나무들이 나옵니다. 형제 칠십 명이 한 바위 위에서 죽은 자리에서 홀로 살아남은 막내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섭니다. 그 산은 이스라엘이 땅에 들어와 축복을 선포하던 산이었습니다. 축복을 외치던 자리에서 이날은 고발이 터져 나옵니다. 아비멜렉에게는 은 칠십 개로 산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담이 가진 것은 목소리 하나뿐이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삿 9:7). 그러고는 이야기를 하나 시작합니다. 나무들이 왕을 세우려고 기름병을 들고 돌아다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첫 줄부터 이상합니다. 왜 왕이 필요한지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를 잊은 채 사람을 고르는 일만큼 위태로운 것이 없습니다.

.

나무들이 맨 먼저 찾아간 것은 감람나무였습니다. 대답이 뜻밖입니다.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쭙대리요"(삿 9:9). 우쭙대다로 옮긴 히브리 말은 본래 흔들다, 떨다, 떠돌다에 가깝습니다. 어슬렁거린다고 옮겨도 좋습니다. 감람나무가 본 왕의 자리는 다스리는 자리가 아니라 흔들리는 자리였습니다. 가장 높아 보이면서 실은 밑에서 흔드는 대로 움직이는 자리였습니다. 무화과나무도 포도나무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제 단 열매와 제 포도주를 놓지 않았습니다. 셋이 든 것은 한결같이 제 열매였습니다. 그들은 왕관을 쓰면 무엇을 얻느냐고 묻지 않고 무엇을 잃느냐고 물었습니다.

.

이 물음의 방향이 곧 신앙의 방향입니다. 그들이 붙든 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열매가 가 닿는 곳이었습니다. 기름도 단맛도 포도주도 결국 하나님과 사람에게로 갔습니다. 쓰임은 늘 나를 지나 누군가에게 닿고, 자리는 대개 나에게서 멈춥니다. 날마다의 묵상은 그 차이를 가려내는 눈을 길러 줍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가시나무였습니다. 열매도 없고 드리울 잎도 변변치 않으며, 수분이 적어 잘 마르니 옛사람들에게 그 쓰임은 땔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삿 9:15). 백향목은 성전을 짓던 가장 귀한 재목입니다. 그늘 없는 것이 그늘을 약속하고, 땔감이 제 불로 그 귀한 나무를 태우겠다고 합니다. 없는 것을 주겠다는 말과 태워 버리겠다는 말이 한 입에서 나옵니다.

.

그러나 이 우화의 무게는 가시나무보다 나무들 쪽에 실려 있습니다. 세 번이나 거절당하고도 그들은 멈추어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왕이 정말 필요한가,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왕이 아니신가. 그 물음을 건너뛴 채 남은 후보에게로 갔습니다. 악한 지도자는 대개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묻기를 그만둔 손들이 그를 데려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왕이 계셨습니다. 광야에서 구름으로 덮어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신 분이 그들의 그늘이셨습니다. 참 왕은 없는 그늘을 약속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나무에 달려 우리가 피할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신 분이 우리의 가시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 그늘은 좁지 않고 값도 받지 않습니다.

.

옳은 말을 한 요담도 온전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는 아버지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원했다고 말합니다(삿 9:17). 그러나 미디안의 손에서 건지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세겜의 죄를 하나님께 지은 죄가 아니라 자기 집안에 지은 배신으로만 셉니다. 분노는 사실을 정확히 보게 해 주기도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의 이름으로 말할지까지 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옳은 말을 해야 하는 날일수록 먼저 묵상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내 억울함을 갚아 달라는 말인지 하나님의 뜻을 묻는 말인지가 거기서 갈립니다.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옳은 편에 서 있다는 확신만큼 사람을 무디게 하는 것도 드뭅니다. 말은 크고 열매는 작을 때가 있습니다.

.

그러니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묻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으로 쓰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없는 그늘을 약속하고 있지 않은가입니다. 한국교회에서도 잘 가르치던 이가 관리하는 자리로 옮겨 가고, 잘 심방하던 이가 회의하는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일이 흔합니다. 옮겨 간 자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옮겨 가느라 놓아 버린 기름이 아까운 것입니다. 묵상의 자리에서 이 두 물음을 번갈아 두어 보면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 곧 드러납니다. 지킬 수 있는 말만 하는 사람의 그늘은 좁아 보여도 시원합니다. 오늘 하루 한 가지 약속만 정확히 지켜 보십시오. 그 작은 그늘 아래로 사람이 모이고, 그렇게 모인 자리가 곧 교회가 됩니다. 크기가 아니라 시원함이 그늘의 자격입니다.

.

지게에 나무를 지고 내려오던 길이 다시 생각납니다. 그 짐 속에는 잘 갈라지는 나무도 있었고 도끼를 물고 끝까지 버티던 나무도 있었습니다. 어느 것도 버리지 않았고, 저마다 제 쓰임을 따라 차례로 아궁이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더 높은 가지로 올라가야 값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서 나오는 열매가 이미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합니다. 요담의 저주는 그대로 이루어졌고 아비멜렉의 불은 삼 년 만에 자기를 태웠습니다(삿 9:20). 그러나 제 기름을 지킨 나무는 오래도록 기름을 냈습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그 한 가지 쓰임을 끝까지 지켜 내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평화의길벗_라종렬

.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9ZWXgc-4rh8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