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9:07-21 제 열매를 버리지 않은 나무들, 그늘 없는 그늘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1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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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09:07-21 제 열매를 버리지 않은 나무들, 그늘 없는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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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이 몰살당한 자리에서 홀로 살아남은 막내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 세겜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입니다(7절). 그는 나무들이 왕을 세우려고 돌아다니는 우화를 들려줍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제 기름과 단 열매와 포도주를 버리고 나무들 위에서 우쭙댈 수 없다며 차례로 거절합니다(8-13절). 마지막에 찾아간 가시나무만 제안을 받아들여 제 그늘에 와서 피하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불이 나와 레바논 백향목을 사르리라 위협합니다(14-15절). 우화를 마친 요담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일이 진실하고 의로운지 세 번 되물은 뒤(16-18절), 그렇지 않다면 아비멜렉과 세겜이 서로에게서 나온 불로 함께 타리라 저주하고 브엘로 몸을 피합니다(19-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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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한 절짜리 대관식으로 끝났습니다. 세겜과 밀로 사람들이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 모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 여쭙는 말도 기름 붓는 예식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대관식을 향해 날아든 단 하나의 반대 목소리입니다. 한 바위 위에서 죽지 않고 남은 막내가 그 목소리의 주인입니다.

# 요담이 오른 그리심 산은 아무 산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땅에 들어가거든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맞은편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명했고, 여호수아는 백성을 두 산 앞에 세워 그대로 행했습니다. 축복을 외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은 저주가 외쳐집니다. 세겜은 두 산 사이 좁은 골짜기에 놓인 성읍이어서 산 위의 목소리가 아래까지 닿았고, 언약을 새로 맺던 그 지형이 이날은 고발의 무대가 됩니다.

# 우화는 직접 말하기 어려운 것을 동식물이나 사물에 빗대어 찌르는 이야기 방식입니다. 듣는 이의 흥미를 끌면서도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고, 말하는 이를 위험에서 조금 지켜 주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가장 오래된 우화로 꼽히는 이 나무 이야기는, 사사기가 왕정을 향해 품은 깊은 의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왕을 기다리면서 동시에 사람 왕을 두려워합니다.

# 사사기에서 왕이라 불린 사람은 거의 모두 이방의 통치자들입니다. 아도니베섹과 에글론과 야빈과 세바와 살문나가 그러합니다. 아비멜렉은 그 명단에 홀로 이름을 올린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의 이름 안에도 왕이라는 낱말이 들어 있습니다. 화자는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지 않고 세겜과 밀로의 왕이라고만 적습니다.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는 말도 끝내 한 번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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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절 축복하던 산에서 외친 목소리

하나님은 모두가 입을 다문 자리에 한 사람의 목소리를 남겨 두시는 분이시며, 축복을 선포하라 명하신 그 자리에서 정직한 경고를 듣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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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삿 9:7). 그리고 곧바로 우화가 시작됩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삿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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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요담이 선 자리를 보십시오. 그는 군대를 모으지 않았고 사람을 사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산꼭대기와 목소리뿐입니다. 아비멜렉은 은 칠십 개로 사람을 샀지만 요담은 값을 치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은 은이 아니라 그 목소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주 이렇게 일하십니다. 무기와 돈이 모두 한쪽에 몰려 있을 때, 반대편에 한 사람의 입을 남겨 두십니다.

요담이 던진 첫 문장은 조건문입니다.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사람의 말을 듣는 일과 하나님이 들으시는 일이 한 줄로 이어져 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이미 아비멜렉의 말을 들었고 그 말대로 움직였습니다. 요담은 그 귀를 되돌리라고 요구합니다.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곧 누구에게 들리느냐를 정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막히는 자리를 우리는 흔히 하늘에서 찾지만, 성경은 종종 우리가 무엇을 듣고 살았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우화의 첫 줄에 이미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나무들이 스스로 나가서 왕을 세우려 했다고 적습니다. 왜 왕이 필요한지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 없이 왕을 찾아 돌아다니는 나무들, 그것이 세겜 사람들의 초상입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말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기름 붓는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나무들이 스스로 기름을 들고 다닙니다. 세우시는 분의 자리를 세움 받을 자들이 차지한 것입니다. 사사기의 앞부분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사를 일으키실 때는 언제나 백성의 부르짖음이 먼저 있었고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부르짖음도 없고 하나님도 계시지 않습니다. 필요를 느낀 쪽이 스스로 사람을 고르고 스스로 기름을 붓습니다. 왕을 세우는 일에서 하나님이 빠지면 남는 것은 사람의 취향과 계산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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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지난 세월 여러 번 넘어진 자리도 이와 멀지 않습니다. 왜 이 자리가 필요한지 묻기 전에 누구를 앉힐지부터 정한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려는 마음이 들거든 순서를 한 번만 바꾸어 보십시오. 누가 할 것인가보다 이것이 정말 필요한 일인가를 먼저 물어 주십시오. 그리고 다들 그렇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홀로 다른 말을 해야 할 때가 오거든, 요담처럼 높은 데 올라가 외치지는 못하더라도 조용히 한 사람에게만은 사실대로 말해 주십시오. 목소리 하나가 당장 판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남고, 남은 것은 언젠가 반드시 일합니다. 요담의 한 마디도 그날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의 입을 오래 기억하십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아도 하늘은 그 말을 받아 적어 두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삼킨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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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3절 제 열매를 버리지 않은 나무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고유한 쓰임을 맡기시고 그 쓰임 자체를 귀하게 보시는 분이시며, 높은 자리가 아니라 맡은 자리에서 열매로 영광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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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쭙대리요 한지라"(삿 9:9). 무화과나무도 포도나무도 같은 대답을 되풀이합니다.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쭙대리요"(삿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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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나무가 든 것은 모두 제 열매입니다. 감람나무의 기름은 등불을 밝히고 제사에 쓰이며 사람의 몸에 발렸습니다. 무화과의 단맛은 가난한 이의 양식이었고, 포도주는 잔칫상의 기쁨이었습니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이 셋은 곡식과 나란히 놓이는 땅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들이 거절한 이유는 겸손이 아니라 분별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데, 그것을 놓고 무엇을 하러 가느냐는 것입니다.

우쭙대다로 옮긴 히브리 동사는 흔들다, 떨다, 떠돌다에 가까운 말입니다.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을 그릴 때도, 두려움에 떠는 몸을 그릴 때도 쓰였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위엄 있게 군림한다는 뜻이 아니라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어슬렁거린다고 옮겨도 좋습니다. 세 나무가 본 왕의 자리는 다스리는 자리가 아니라 흔들리는 자리였습니다. 밑에서 떠받치는 나무들이 흔드는 대로 움직이는 자리, 겉으로는 가장 높고 속으로는 가장 수동적인 자리였습니다.

여기에 이 우화의 가장 날카로운 점이 있습니다. 왕관을 쓰면 무엇을 얻느냐고 묻지 않고, 왕관을 쓰면 무엇을 잃느냐고 묻습니다. 기름을 잃고 단 열매를 잃고 포도주를 잃습니다. 세 나무는 모두 그 계산을 마치고 자리를 사양했습니다. 성경은 이 대답을 세 번 똑같은 틀로 되풀이해 우리 귀에 박아 둡니다. 그리고 이 셋을 지나야 네 번째가 옵니다. 되풀이가 깨지는 자리가 이야기의 급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것은 본래 자리가 아니라 쓰임이었습니다. 이 셋이 한결같이 붙든 것은 자기 존재의 증명이 아니라 자기 열매의 목적지였습니다. 감람나무가 기름으로 영화롭게 하는 대상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었습니다. 쓰임은 늘 나를 지나 누군가에게 가 닿는 것이고, 자리는 대개 나에게서 멈춥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는 가장 높은 가지에 앉은 자가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을 먹인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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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반대로 셈합니다.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만 헤아리고 무엇을 잃게 되는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큰 자리로 옮겨 간 뒤에야 자기가 가장 잘하던 일을 잃어버린 것을 압니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잘 가르치던 이가 관리하는 자리로 옮겨 가고, 잘 심방하던 이가 회의하는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일이 흔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미 맡겨진 기름은 무엇입니까. 누구를 잘 먹이시는 손입니까, 오래 들어 주는 귀입니까, 궂은일을 말없이 하는 발입니까. 오늘 하루 그 한 가지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끝까지 해 주십시오. 남들이 알아주는 자리로 옮겨 가야 쓸모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 자리에서 나오는 열매가 이미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합니다. 낮은 자리라고 스스로 부른 그곳이 실은 하나님이 오래 지켜 주신 자리일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기억하는 것은 부모의 직함이 아니라 부모가 차려 준 밥상과 곁에 앉아 준 시간입니다. 오늘 그 한 가지를 정성껏 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큰일을 맡기시기 전에 늘 작은 쓰임부터 맡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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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5절 그늘 없는 그늘

하나님은 참으로 피할 그늘이 되어 주시는 분이시며, 그늘 없는 것이 그늘을 약속할 때 그 끝을 미리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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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삿 9: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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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는 열매도 없고 그늘을 드리울 잎도 변변치 않습니다. 수분이 적어 잘 마르기 때문에 옛사람들에게 그 쓰임은 땔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그늘에 피하라고 합니다. 그 아래로 들어가면 쉼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가시에 찔립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내어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 이것이 거짓 통치의 첫 표지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가시나무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그늘이 없다는 사실을 아예 모릅니다.

두 번째 말은 협박입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성전과 왕궁을 지을 때 쓰던 가장 귀한 재목이었습니다. 땔감으로나 쓰이는 가시덤불이 가장 값진 나무를 태워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왕의 자리에 대한 두 이해가 정면으로 갈립니다. 세 나무에게 왕은 흔들리는 자리였고, 가시나무에게 왕은 태울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섬길 것이 없는 자에게 권력은 오직 해칠 능력으로만 이해됩니다.

그러나 우화 전체의 무게는 가시나무보다 나무들에게 실려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나무들이 찾아가 부탁했기에 벌어졌습니다. 앞의 세 나무에게 거절당한 뒤에도 그들은 멈추어 묻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에게 왕이 필요한가,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왕이 아니신가. 그 물음을 건너뛴 채 남은 후보에게로 갔습니다. 악한 지도자는 대개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묻기를 그만둔 사람들의 손이 그를 데려옵니다. 요담은 나무들의 어리석음과 가시나무의 허세를 나란히 놓아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한꺼번에 조롱합니다. 그러나 조롱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우화는 이스라엘이 무엇을 잊었는지를 겨눕니다. 이 백성에게는 이미 왕이 계셨습니다. 광야에서 구름 기둥으로 덮어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신 분이 그들의 그늘이셨습니다. 참된 왕은 그늘이 없으면서 그늘을 약속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나무에 달려 우리의 피할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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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을 약속하는 말은 오늘도 도처에 있습니다. 나를 따르면 안전하다, 우리 편에 서면 손해 보지 않는다, 이것만 하면 문제가 풀린다. 그 말이 사실인지 가려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지금 자기 자리에서 무슨 열매를 내고 있는지 보면 됩니다. 한국교회도 그늘을 약속하는 목소리에 여러 번 속았고, 그 아래로 들어간 이들이 도리어 찔렸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큰 것을 약속하거든 그가 이미 맺은 작은 열매를 먼저 살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같은 것을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내게 없는 그늘을 누구에게 약속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이에게 배우자에게 후배에게 감당하지 못할 말을 해 두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약속은 크게 하고 열매는 작은 삶이 가장 많은 사람을 찌릅니다. 지킬 수 있는 말만 하는 사람의 그늘은 좁아 보여도 시원합니다. 오늘 하루 한 가지 약속만 정확히 지켜 보십시오. 그 작은 그늘 아래로 사람이 모입니다. 그리고 그 모임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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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1절 불은 양쪽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악으로 맺은 동맹을 끝내 서로의 불로 갚으시는 분이시며, 사람의 분노가 미처 부르지 못한 이름으로도 정의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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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삿 9:16). 그리고 저주가 이어집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삿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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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담은 우화를 스스로 풀어 줍니다. 가시나무가 누구인지 굳이 이름을 붙여 말합니다. 그가 쓴 말투를 보십시오. 개역개정은 세 번의 물음으로 옮겼지만 히브리 본문은 만일이라는 말을 세 번 겹쳐 놓은 미완성 조건문입니다. 만일 진실함으로 행했다면, 만일 선대했다면, 만일 보답했다면. 뒷말이 없습니다. 말을 맺지 않음으로써 듣는 이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만일이라는 말은 가시나무의 입에서 이미 두 번 울렸던 말입니다. 우화의 문법이 현실의 문법이 됩니다.

그가 고른 낱말도 날이 서 있습니다. 너희가 오늘 일어나라고 말할 때 인칭대명사를 앞세워 너희를 힘주어 부릅니다. 아비멜렉을 가리켜서는 여종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세겜 사람들이 그를 우리 형제라 불렀던 바로 그 자리에 요담은 신분을 낮추는 호칭을 놓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요담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는 아버지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미디안의 손에서 건지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세겜의 죄를 하나님께 지은 죄가 아니라 자기 집안에 지은 배신으로만 셉니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잊은 채 옳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담의 저주는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 장 끝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악행을 갚으셨고 세겜 사람들의 악행도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다고 적습니다. 요담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 흘린 일 때문이었습니다. 불이 양쪽에서 나온다는 말이 무섭습니다. 악으로 맺은 사이에는 밖에서 원수가 오지 않아도 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불이 됩니다. 요담은 저주만 남기고 브엘로 사라져 다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복수하러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리어 이 이야기를 하나님의 이야기로 만듭니다. 갚으시는 분은 끝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사기는 이 대목에서 판결문을 쓰지 않고 다만 일어난 일을 적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이 판결문보다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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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관계는 대개 밖에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익으로 묶인 사이는 이익이 줄어드는 순간 안에서부터 갈라집니다. 한국교회 안의 여러 분열도 밖의 핍박보다 안의 셈법 때문에 깊어졌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누군가와 맺고 있는 관계의 바닥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그것이 이익이라면 그 관계는 이익이 끝나는 날 끝납니다. 그것이 은혜라면 손해가 나도 남습니다. 그리고 옳은 말을 해야 할 때가 오거든 요담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십시오. 내 억울함을 갚아 달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묻는 말이어야 합니다. 분노는 사실을 정확히 보게 해 주기도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의 이름으로 말하는지까지 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갚으시는 분이 따로 계신 것을 아는 사람만 끝까지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미움을 내려놓는 일은 참는 일이 아니라 맡기는 일입니다. 오늘 한 사람의 이름을 하나님께 맡기고 손을 펴 보십시오. 그 손이 비어야 다른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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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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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사람들이 저마다 왕을 세우러 나섰습니다.

왜 왕이 필요한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저희 발을 멈추게 하시고 먼저 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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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람나무의 기름과 무화과의 단 열매와

포도나무의 즐거움을 버리지 않게 하소서.

주님이 제게 맡기신 작은 쓰임 하나를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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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없는 그늘에 저희를 맡기지 않게 하소서.

없는 것을 준다는 말과 태우겠다는 말이

한 입에서 나오는 것을 오늘 똑똑히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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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외치던 산에서 저주를 듣는 날에도

주님은 왕이셨습니다.

불이 양쪽에서 나오는 자리를 저희가 만들지 않게 하시고

나무에 달리신 그 그늘로 저희를 불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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