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9:1-6 집에서 불린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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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은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고백했는지보다, 집 안에서 날마다 불린 이름이 그 고백과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는지에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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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이름부터 짓습니다. 자전을 뒤지고 어른께 여쭙고 며칠을 앓듯이 고릅니다. 그렇게 고른 글자에는 부모가 입 밖에 내지 못한 소원이 들어앉습니다.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 곧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 더러는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네가 대신 이루어 달라는 마음까지 함께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름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그릇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불리는 동안 그 그릇에 담긴 것이 아이 안으로 조금씩 스며듭니다. 이름은 부르는 사람의 소원이자 불리는 사람의 지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하나 나옵니다. 아비멜렉, 내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펴 드신 모든 분의 집에도 좋은 이름이 불리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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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을 지은 집을 보십시오. 기드온의 집입니다. 미디안을 물리친 뒤 백성이 왕이 되어 달라고 청했을 때 그는 분명하게 거절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 이보다 옳은 대답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집 안에서는 세겜의 첩이 낳은 아들이 아비멜렉이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광장에서 한 고백과 집에서 부른 이름이 정반대를 가리켰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그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기까지 줄곧 그랬을 것입니다. 사람은 들은 대로 자랍니다. 아버지가 사양한 왕관을 아들은 제 이름 안에서 날마다 써 보았던 셈입니다. 고백은 한 번으로 끝나지만 이름은 날마다 불립니다. 되풀이되는 쪽이 대개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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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자 그 이름이 걸어 나옵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의 성읍 오브라가 아니라 어머니의 성읍 세겜으로 갑니다. 거기서 외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합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삿 9:2). 골육이라 옮긴 히브리 말은 너희의 뼈요 너희의 살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한 바로 그 말입니다. 사람이 쓸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말이 여기서는 성읍 하나를 제 편으로 묶는 연장이 됩니다. 그가 내민 셈법도 실은 거짓이었습니다. 사사는 물려받는 자리가 아니었으니 칠십 명이 함께 다스릴 일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없는 위협을 크게 그려 놓고 자기를 답으로 내미는 것, 선동의 오래된 얼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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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겜 사람들의 대답은 짧습니다. "그는 우리 형제라"(삿 9:3). 이 한 마디로 물어야 할 것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세우셨는가, 이스라엘에 사람 왕을 두어도 되는가, 이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본문은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의 뒤쪽으로 쏠렸다고 적습니다. 설득된 것이 아니라 그저 기울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울어짐의 값이 곧바로 나옵니다. 바알브릿 신전에서 나온 은이 칠십 개였고, 그 은으로 죽인 형제가 칠십 명이었습니다. 사람 하나에 은 한 개였습니다. 화자는 그 셈을 굳이 맞추어 둡니다. 그가 산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도 속이 비었다는 뜻과 제멋대로라는 뜻을 함께 품고 있습니다. 값으로 모은 힘은 값이 끊기는 자리에서 반드시 등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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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낱말 하나가 오래 걸립니다.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어제 본문의 끝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삿 8:34) 살았습니다. 한 절 건너 아비멜렉이 같은 낱말을 들고 옵니다. 나를 기억하라. 잊어버린 자리는 결코 빈 채로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다른 것이 들어와 기억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의 골육이 되신 분은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혈연을 내세워 사람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시려고 하늘 자리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의 골육은 형제를 죽였고, 그리스도의 골육은 형제를 살렸습니다. 같은 낱말이 이렇게 서로 반대편 끝에 놓입니다.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는 그분의 부름에는 얻어 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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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영웅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몸은 스러져도 내 이름은 남게 하겠다고. 이름을 남기려는 마음은 인류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기드온도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밤중에 바알의 제단을 헐었고 삼백 명만 데리고 싸움터에 섰습니다. 다만 그는 고백은 광장에 두고 바람은 집 안에 두었습니다. 묵상하는 사람이 정말 무서워할 것은 우리 안의 뚜렷한 악이 아니라, 옳은 말과 나란히 앉아 조용히 자라는 바람입니다. 그 바람은 대개 내 이름이 오래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의 얼굴을 하고 옵니다. 그 마음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알아차리는 사람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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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묵상은 본문 속 인물을 정죄하는 일이 아니라 내 집에서 무엇이 날마다 불리고 있는지를 듣는 일입니다. 한국교회가 아팠던 자리도 대개 강단의 고백이 틀려서가 아니었습니다. 고백은 옳았는데 사무실과 식탁과 통장에서는 다른 이름이 불렸습니다.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묵상을 나누고 글을 쓰면서 이 일이 누구의 이름으로 쌓이는지 아침마다 물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집에서 가장 자주 불리는 말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십시오. 아이가 듣는 말, 배우자가 듣는 말,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입니다. 그 말이 곧 내일의 이름이 됩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곁의 한 사람을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이름을 바르게 불러 주는 일은 그 사람의 존엄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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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겜 사람들은 언약을 기억하라고 세워 둔 나무 곁에 모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삿 9:6). 참 왕은 그런 자리에서 즉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머리 위에 붙은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고, 조롱하려고 쓴 그 글자가 도리어 사실이었습니다. 이름은 스스로 지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제 이름을 제 손으로 이루려다 삼 년 만에 무너졌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받은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이름을 하루에 한 번이라도 소리 내어 불러 보십시오. 받은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다른 이름을 만들어 붙이려 애쓰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날마다 불리는 이름이 그 고백과 같은 곳을 가리키는 복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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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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