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8:22-35 겉옷 위에 쌓인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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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은 하나님만 왕이시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말을 한 손이 무엇을 받아 드는지까지 함께 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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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이면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산을 오르내리며 대나무와 솔가지를 베어 달집을 지었습니다. 제 몫으로 모자라면 건너 마을이 쌓아 둔 재료까지 슬쩍 끌어다 얹었습니다. 그렇게 공들여 세운 집은 그날 밤 한 번에 태워 없앨 집이었습니다. 하루면 사라질 것을 지으려고 남의 것까지 가져오던 그 손을 저는 오래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부질없는 욕심은 늘 그만큼의 기쁨을 앗아 가는데도, 사람의 손은 내려놓는 쪽보다 쌓는 쪽으로 먼저 움직입니다. 그것도 제 것으로 쌓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모아 둔 것을 끌어다 쌓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겉옷을 펴 놓고 그 위에 금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펴 드신 모든 분의 하루에, 지금 무엇을 쌓고 있는지 돌아보는 눈이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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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백성이 몰려와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삿 8:22). 삼대를 나란히 말한 것은 왕위를 세습하는 왕조를 세우라는 뜻입니다. 사사기에서 왕정이 입에 오른 첫 장면입니다.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그 이름이 어느새 한 사람의 이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기드온의 대답은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 사사기에서 가장 신앙적인 고백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는 탈취한 금 귀고리를 달라 하고, 백성은 겉옷을 펴서 그 가운데에 기꺼이 던집니다. 거절한 자리와 받아 든 물건이 한 호흡 안에 나란히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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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을 들여다보면 스물세 절과 스물네 절이 똑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말했다, 하는 같은 머리말이 두 번 나란히 놓입니다. 한 문장은 왕의 자리를 내려놓는 말이고, 다음 문장은 왕의 물건을 청하는 말입니다. 화자는 판결문을 쓰지 않고 같은 머리말을 두 번 붙여, 그 사이에 벌어진 틈을 우리 눈에 보이게 합니다. 백성의 대답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삿 8:25)는 원문에서 반드시 드리겠다는 강조형입니다. 한쪽은 은근히 청하고 다른 쪽은 앞다투어 바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께 여쭙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절의 문장에만 잠깐 들렸다가 곧 사라집니다. 묵상은 늘 그렇게 비어 있는 자리를 먼저 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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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인 금은 천칠백 세겔, 스무 킬로그램쯤 됩니다. 초승달 장식과 패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낙타 목의 사슬까지 함께 옵니다. 자색은 지중해 조개에서 얻은 값비싼 염료로, 왕이나 귀족만 입던 색이었습니다. 왕이라 불리지는 않았으나 왕의 물건은 모두 그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그 금으로 만든 것이 무엇인지가 가장 마음에 걸립니다. 에봇입니다. 대제사장이 여호와 앞에 나아갈 때 입던 옷이고, 우림과 둠밈을 품어 하나님의 뜻을 묻던 자리입니다. 그는 그것을 "자기의 성읍 오브라"(삿 8:27)에 두었습니다. 아버지 요아스의 성읍이던 곳이 이제 그의 성읍으로 불립니다. 이름이 바뀌는 데는 한 절이 걸렸을 뿐인데, 그 한 절 사이에 사람과 물건과 장소의 주인이 모두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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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그가 헐어 버린 바알과 아세라는 누가 보아도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싸우는 일은 오히려 분명했습니다. 에봇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붙어 있고 여호와께 묻는 도구이니, 그 앞에 엎드린 사람도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위험했습니다. 백성은 실로로 가지 않고 오브라로 왔고, 하나님의 뜻은 한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화자는 그것을 올무라 부릅니다. 짐승을 걸어 넘기는 덫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참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금으로 지으신 분이 아니라, 옷을 벗기신 채 나무에 달리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끝내 그분의 벗은 몸으로 열렸습니다. 금으로 지은 길은 사람을 묶고, 벗으신 분이 내신 길은 사람을 놓아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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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의 묵상이 편하지 않은 까닭은 잘못이 한 사람에게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누구에게 강요당하지 않았습니다. 창고를 털린 것도 세금을 물린 것도 아닙니다. 겉옷을 먼저 펼친 손은 그들의 손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란 것은 자기들을 편하게 해 줄, 손에 잡히는 무엇이었고, 기드온은 그 요구에 맞춤한 물건을 세워 주었습니다. 그가 죽자마자 그들은 곧 바알브릿에게로 돌아섭니다. 성경은 그 까닭을 한 마디로 적어 둡니다.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삿 8:34). 배교는 대개 새로운 신을 찾는 일로 시작되지 않고,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 일에서 조용히 시작됩니다. 잊은 자리에는 반드시 다른 것이 들어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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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과 손도 자주 이렇게 갈립니다. 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입과, 그 말 끝에 무엇이 남는지를 세는 손이 한 사람 안에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오래 아팠던 자리도 대개 여기였습니다. 강단에서 들린 고백이 틀렸던 적은 드뭅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면서 자리와 이름과 권한은 사람의 손에 남겨 두었고, 그것이 아들에게 물려질 때 교회는 오브라가 되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묵상을 나누고 글을 쓰면서 그 열매가 누구의 이름으로 쌓이는지 아침마다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물어보지 않으면 어느새 제 성읍에 무엇을 하나 세워 두게 됩니다. 오늘 무엇을 이루시거든 그 공로를 말로만 돌리지 마시고, 손에 남은 것에서 한 가지를 덜어 내 곁의 한 사람에게 건네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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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은 어차피 하루면 타 버릴 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남의 것까지 끌어다 높이 쌓았습니다. 스무 킬로그램의 금으로 지은 에봇도 끝내 한 집안을 걸어 넘긴 덫이 되었습니다. 쌓아서 남는 것과 내려놓아서 남는 것은 그 끝이 아주 다릅니다. 하나는 덫이 되고 하나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만 왕이시라는 고백이 입에서 손까지 건너가는 데는 평생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 한 걸음을 오늘 하루만큼 걸어 보는 것이 묵상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태울 것을 높이 쌓는 대신 손을 펴는 하루면 넉넉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펴 드는 겉옷 위에 쌓아 둘 것이 아니라 내어 줄 것이 놓이는 복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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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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