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8:22-35 왕은 아니라 하고 금을 거두다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1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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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08:22-35 왕은 아니라 하고 금을 거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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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안을 물리친 직후 이스라엘은 기드온에게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라며 세습 왕조를 청합니다(22절).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며 그 자리를 거절하지만, 같은 입으로 곧 탈취한 금 귀고리를 청하고 백성은 겉옷을 펴 기꺼이 던집니다(23-25절). 금 천칠백 세겔과 자색 의복과 낙타 사슬까지 그에게 모이고, 그는 그 금으로 에봇을 지어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둡니다(26-27절). 그 땅은 사십 년 평온했으나 그는 많은 아내와 일흔 아들을 두고 첩의 아들을 아비멜렉이라 불렀습니다(28-31절). 그가 죽자 이스라엘은 곧 바알브릿을 섬기며 여호와도 기드온의 은혜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32-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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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본문에서 기드온은 요단을 건너 두 왕을 사로잡고 돌아오는 길에 숙곳과 브누엘을 징벌했습니다. 그 마지막 절에 그가 낙타 목의 초승달 장식을 떼어 가졌다는 한 마디가 붙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손에서 이어집니다. 전쟁은 끝났고 위협은 물러갔는데, 이야기는 평화의 노래가 아니라 왕의 자리와 금붙이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성경은 승리 다음에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길게 적어 둡니다.

역사의 결로 보면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안에서 왕정이 처음 입에 오른 장면입니다. 사사는 위기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한시적 구원자였고 자리를 물려주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아들과 손자까지 말하며 세습을 청합니다. 눈에 보이는 안전을 제도로 붙들어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요청은 여기서 거절되지만 사무엘 시대에 사울을 통해 끝내 이루어집니다.

신학과 정경의 결에서는 두 대목이 오늘 본문 위에 겹칩니다. 하나는 왕의 조건을 다룬 신명기 십칠 장으로,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금은을 많이 쌓지 말라고 못 박습니다. 기드온이 한 일이 정확히 그 반대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출애굽기 이십팔 장의 에봇 규정입니다. 에봇은 대제사장만 입는 옷이었고 실로의 성소에 있어야 할 물건이었습니다.

문학의 결도 기억해 두십시오. 사사기 전체에서 기드온 이야기가 분량이 가장 길고, 학자들은 이 대목을 책의 전환점으로 봅니다. 앞에는 비교적 반듯한 사사들이 있고 뒤에는 문제투성이 사사들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경계에 놓인 문턱이며, 곧 이어지는 아홉 장 아비멜렉 이야기의 씨앗이 여기 모두 뿌려집니다. 인물의 행동과 화자의 짧은 논평이 신학을 만드는 내러티브의 방식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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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3절 다스리소서 하는 말과 거절하는 말

하나님은 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분이시며, 사람의 입이 그 사실을 옳게 고백할 때에도 그 고백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함께 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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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삿 8:22). 기드온이 답합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 왕이라는 낱말은 한 번도 쓰이지 않았으나 삼대를 말한 요청은 왕조를 세우라는 뜻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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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백성이 내세운 근거를 보십시오.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하나님은 삼만 이천을 삼백으로 줄이시며 이 승리가 사람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애써 못 박아 두셨습니다. 그 일을 눈으로 본 사람들이 지금 구원의 주체를 한 사람에게 돌립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앉히는 일은 대개 반역의 언어로 오지 않습니다. 감사의 언어로 옵니다. 고마워서 높이고, 높이다가 대신 세우고, 세워 두고는 그분을 잊습니다. 백성이 원한 것은 실은 기드온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안전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기드온의 대답을 들으십시오. 문장 자체는 완전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는 고백은 사사기가 마지막 장에서 탄식하는 그 왕 없는 시대의 정답이기도 합니다. 원문에서 그는 나는, 이라는 말을 힘주어 앞세워 자신과 하나님을 또렷이 갈라 놓습니다. 여기까지는 흠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스린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왕이 통치한다는 뜻의 낱말입니다. 그는 왕이라는 이름을 거절한 것이고, 왕이 하는 일과 왕이 누리는 것까지 거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름을 내려놓는 일과 실속을 내려놓는 일은 다른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앞의 것만 하고 뒤의 것은 하지 않은 채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이 두 절은 우리를 조금 불편하게 만듭니다. 옳은 고백이 나왔는데 그 고백이 삶의 방향까지 돌려세우지는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이 이 대목에서 오래 울립니다. 그분은 정반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광야에서 천하 만국을 주겠다는 제안을 물리치셨고, 오천 명이 억지로 왕 삼으려 할 때 홀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거절이 말에 그치지 않고 발걸음까지 옮겨졌기에 그 거절은 참되었습니다. 그분은 왕이 되실 자격이 유일하게 있으신 분이었는데도 끝까지 섬기는 자리에 서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만 왕이라 불리셨습니다. 이것이 사사기가 기다리던 왕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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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가장 자주 들리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말이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 말이 틀린 적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그 말을 한 뒤에 무엇이 남는지를 우리는 잘 살피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오래 아팠던 자리도 여기였습니다. 강단의 고백은 옳았으나 자리와 이름과 권한은 사람의 손에 남았고, 그것이 아들에게 물려질 때 교회는 다른 무엇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봉사의 자리에서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실속은 챙깁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감사의 말을 한 번 하실 때마다 그 말 뒤에 무엇이 남는지 한 번만 더 보십시오. 말과 손이 같은 방향을 볼 때 그 고백이 비로소 나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 여러분을 지나치게 높이려 할 때, 그 자리를 웃으며 옆으로 비켜 주십시오. 그 비켜 섬이 오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고백은 누군가 한 사람이 왕의 자리에서 내려설 때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몸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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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7절 겉옷 위에 쌓인 금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묻는 자리를 사람의 손에 가두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당신의 이름을 붙여 세운 물건조차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밝히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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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삿 8:24). 백성은 겉옷을 펴고 그 가운데에 귀고리를 던집니다(25절). 모인 금이 천칠백 세겔이요 초승달 장식과 패물과 자색 의복과 낙타 목의 사슬도 있었습니다(26절).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삿 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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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의 짜임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스물세 절과 스물네 절은 똑같은 머리말로 시작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말했다, 하는 같은 구절이 두 번 나란히 붙습니다. 앞 문장은 왕의 자리를 내려놓고 뒤 문장은 왕의 물건을 청합니다. 화자는 어느 쪽이 그의 진심인지 말해 주지 않고, 같은 머리말을 두 번 붙여 그 사이의 틈만 보여 줍니다. 백성의 대답도 강조형입니다. 즐거이 드리리이다로 옮긴 말은 반드시 드리겠다는 뜻으로, 마지못한 헌납이 아니라 앞다툰 봉헌이었습니다. 한쪽은 은근히 청하고 다른 쪽은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 거래에 하나님께 여쭙는 절차는 한 줄도 없습니다.

다음은 무게와 물건입니다. 천칠백 세겔은 스무 킬로그램쯤 되는 금입니다. 자색은 지중해 조개에서 얻은 값비싼 염료로 왕과 귀족만 입던 색이었고, 초승달 장식은 미디안이 섬기던 달 신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습니다. 왕의 옷과 왕의 패물이 한 사람에게 모였습니다. 전에 바알의 제단을 헐며 집안의 경제적 기반까지 잃었던 사람이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새 기반을 세웁니다. 성읍의 이름도 함께 바뀝니다. 요아스의 성읍이던 오브라가 여기서는 자기의 성읍이라 불립니다. 한 절 사이에 물건과 장소의 주인이 모두 옮겨졌습니다.

가장 무거운 것은 그 금으로 만든 물건입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여호와 앞에 나아갈 때 입던 옷이며, 우림과 둠밈을 품어 하나님의 뜻을 묻던 거룩한 도구였습니다. 그것이 실로를 떠나 한 사람의 성읍에 놓이자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오브라로 오게 됩니다. 뜻을 여쭙는 길목에 사람이 서는 것입니다. 화자는 그 결말을 올무라 적습니다. 올무로 옮긴 모케쉬는 짐승을 걸어 넘기는 덫을 가리키는 낱말로, 성경에서 우상과 나란히 쓰입니다. 참 대제사장은 금으로 옷을 지으신 분이 아니라 옷을 벗기신 채 달리신 분이었고, 그 찢긴 몸이 곧 하나님께 이르는 새 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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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손에도 오브라의 에봇 같은 것이 있습니다. 바알처럼 대놓고 우상인 것은 오히려 분별하기 쉽습니다.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붙은 것들입니다. 은혜받은 기억, 응답받은 경험, 잘된 사역의 실적, 오래 지켜 온 방식이 어느 순간 하나님 대신 붙드는 물건이 됩니다. 그것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한국교회의 건물과 조직과 프로그램도 그 자리에 놓이기 쉽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물음을 한 번 품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여쭙는 길에 내가 만든 무엇이 서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나에게 먼저 오도록 내가 자리를 만들어 두지는 않았습니까. 그리고 겉옷을 펴는 손을 기억하십시오. 그 위에 무엇을 쌓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을 말해 줍니다. 오늘은 쌓는 대신 한 가지를 덜어 곁의 한 사람에게 건네 보십시오. 손에 쥔 것이 줄어들 때 하나님의 손이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쭙는 자리에 아무것도 세워 두지 않은 사람이 가장 자유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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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32절 사십 년의 평온과 왕처럼 산 집

하나님은 원수를 잠잠하게 하시고 땅에 안식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 평온의 사십 년을 사람이 어떻게 쓰는지 조용히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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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삿 8:28). 여룹바알은 돌아가 자기 집에 거주하고(29절),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난 아들이 일흔 명이었습니다(30절). 세겜에 있는 첩도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고(31절), 기드온은 나이가 많아 죽어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되었습니다(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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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름을 보십시오. 이십구 절에서 성경은 그를 기드온이라 부르지 않고 여룹바알이라 부릅니다. 바알과 다투라는 뜻으로, 아버지의 바알 제단을 헐던 날 붙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기 집에 우상이 될 물건을 세워 둔 사람입니다. 우상과 싸우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우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화자는 꾸짖는 문장을 쓰지 않고 그 이름만 다시 불러옵니다. 이름과 삶이 어긋난 자리를 성경은 이렇게 조용히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아홉 장에서 계속 불려 아비멜렉 이야기를 아버지의 이야기에 붙여 둡니다.

다음은 그 집의 내부입니다. 아내가 많았고 아들이 일흔이었습니다. 일흔 명을 두려면 아내가 수십 명이어야 합니다. 신명기 십칠 장은 왕이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금은을 많이 쌓지 말라 했는데, 그는 두 가지를 모두 했습니다. 왕궁을 짓지 않았을 뿐 왕처럼 살았습니다. 그중 가장 또렷한 증거가 첩의 아들 이름입니다. 아비멜렉, 곧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않겠다고 했던 입이 아들의 이름에 왕이라는 낱말을 새겨 넣었습니다. 사람의 속마음은 선언보다 그가 붙인 이름에서 더 정확히 새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장례의 기록을 보십시오. 사사기에서 매장 장소가 이렇게 또박또박 적히는 사사는 기드온이 처음입니다. 왕들의 기록 방식이 사사의 자리에 스며든 것입니다. 사십 년의 평온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그 사십 년 동안 그는 성소를 세우지 않고 에봇을 세웠고,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가문을 늘렸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을 주시고 사람은 그 안식으로 무엇을 할지 고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고, 무덤조차 남의 것을 빌려 쓰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남기신 것은 한 집안이 아니라 새 백성이었습니다. 무엇을 쌓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겼느냐가 한 사람의 생애를 재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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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시절이 시험인 줄 아는 성도가 적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때를 대비하는 법은 배워도 형통의 때를 쓰는 법은 잘 배우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십 년의 평온 속에서 무너진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어려울 때가 아니라 넉넉해진 때에 더 많이 갈라졌습니다. 개인의 삶도 그렇습니다. 오래 기도한 일이 풀리고 형편이 나아진 뒤에 기도가 얇아지고 말씀에서 손이 멀어집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평온이 주어져 있다면 그 평온이 무엇을 위해 주어진 것인지 오늘 여쭈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아이들에게 물려주려는 것이 무엇인지도 함께 보십시오. 기드온은 아들에게 왕이라는 이름을 물려주었고, 그 이름이 다음 장에서 형제 일흔 명을 죽였습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줄 것은 이름과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 앞에 앉는 습관이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늘 저녁 밥상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 절을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오. 그 작은 습관이 가문보다 오래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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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5절 기억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주위의 모든 원수의 손에서 당신의 백성을 건져내신 구원자시며, 잊어버린 백성을 향해서도 다시 사사를 일으키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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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삿 8:33).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삿 8:34),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삿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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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시점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라고 성경은 적습니다. 그가 눈을 감자마자입니다. 기다렸다는 듯한 이 속도가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사십 년 동안 여호와를 섬긴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 곁에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신앙이 사람에게 매달려 있으면 그 사람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들이 택한 신의 이름이 바알브릿입니다. 언약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의 자리에 언약의 주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바알이 들어앉았습니다. 이름만 바꾸어 끼운 것입니다. 배교는 이렇게 자리를 바꾸지 않고 이름만 바꾸는 방식으로 옵니다.

다음은 삼십사 절의 동사입니다. 기억하지 아니하며로 옮긴 말의 원형은 기억하다라는 뜻의 자카르로, 머리에 떠올리는 일만이 아니라 기억한 대로 행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낱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고 할 때 그것은 곧 건지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기억하지 않았다는 말은 잊어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알면서도 그 은혜대로 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기억하지 않았는지도 성경은 또박또박 적어 둡니다.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신 여호와, 곧 구원의 이력 전체입니다. 은혜를 기억에서 지우는 순간 그 자리에는 반드시 다른 것이 들어옵니다.

마지막으로 삼십오 절의 씁쓸한 문장이 남습니다. 그들은 기드온의 집도 후대하지 않았습니다. 왕으로 삼으려고 몰려들었던 그 사람들이 그의 집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사람에게 기대어 세운 관계가 얼마나 얇은지 성경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문장 뒤에도 하나님은 다시 돌라와 야일을 일으키시고 입다를 부르시며 결국 그 역사 속에서 다윗의 자손을 보내십니다. 배교의 순환을 끊으신 것은 더 훌륭한 사사가 아니라, 잊는 백성을 끝까지 기억하신 왕이셨습니다. 우리 구원의 근거는 우리의 기억이 아니라 그분의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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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이 사람에게 매달려 있지 않은지 오늘 점검해야 합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은혜받은 집회, 마음 맞는 소그룹이 사라지면 함께 사그라지는 믿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성경을 펴고 홀로 하나님 앞에 앉는 일이 필요합니다. 기억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고 되풀이해야 남습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은혜를 기념행사로만 남기고 일상의 자리에서 잊어버린 것도 이 대목에서 돌아볼 일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하나님이 여러분을 건져 주신 일 가운데 하나를 골라 소리 내어 말해 보십시오.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함께 일하는 이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말로 꺼낸 은혜는 오래 남고, 들은 사람에게로 옮겨 갑니다. 그리고 곁에서 나를 도운 사람의 수고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잊지 않는 사람은 사람의 은혜도 잊지 않습니다. 감사는 기억에서 자라고, 기억은 말로 꺼낼 때 비로소 뿌리를 내립니다. 오늘 하루 그 한 번의 말이 누군가의 잊어버린 은혜까지 함께 살려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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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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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왕은 아니라고 말한 입과

금을 받아 든 손이

한 사람 안에 있었습니다.

저희 안에도 있습니다.

다 주님이 하셨다고 말하고

남는 것은 세어 두는 마음이

오늘 아침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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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옷을 펴는 손을 지켜 주소서.

쌓으려고 펴지 말고

나누려고 펴게 하소서.

남의 것을 끌어다

태울 것을 높이 쌓는

그 오래된 버릇에서

저희를 건져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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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여쭙는 길에

저희가 만든 것을

세워 두지 않게 하소서.

은혜받은 기억도

응답받은 경험도

잘된 일의 자취도

주님 자리에 앉지 않게 하소서.

찢긴 몸으로 열어 주신

그 길만 걷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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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게 하소서.

잊는 것이 배교의 시작임을

오늘 배웠습니다.

건져 주신 손을 세어 보고

그 이야기를 소리 내어

곁의 한 사람에게 들려주게 하소서.

저희 기억이 얇을 때에도

주님이 저희를 기억하시니

그 기억에 저희를 맡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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