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8:1-21 떡 한 덩이를 거절당한 밤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1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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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08:1-21 떡 한 덩이를 거절당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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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이 왜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느냐며 크게 다투자 기드온은 부드러운 말로 그 노여움을 가라앉힙니다(1-3절). 삼백 명은 피곤한 몸으로 요단을 건너 세바와 살문나를 쫓으며 숙곳과 브누엘에 떡을 청하지만 두 성읍은 승산을 따져 거절합니다(4-9절). 기드온은 갈골에서 남은 군대를 흩고 두 왕을 사로잡은 뒤(10-12절), 돌아와 숙곳 장로들을 들가시로 징벌하고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입니다(13-17절). 끝으로 다볼에서 죽은 형제들의 피를 물어 두 왕을 자기 손으로 처형합니다(18-21절). 요단 동편의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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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본문에서 삼백 명은 나팔과 횃불만 들고 미디안 진영을 흩었고, 에브라임은 뒤늦게 부름받아 요단 나루를 막고 두 방백을 처단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승리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시각에서 곧바로 이어집니다. 다만 이어지는 것은 찬송이 아니라 다툼이고, 무대는 요단 서편이 아니라 동편입니다. 승리한 다음에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성경은 감추지 않고 길게 적어 둡니다.

지리를 알면 본문이 훨씬 또렷해집니다. 숙곳과 브누엘은 요단 동편 얍복 강 가까이에 있던 성읍으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뒤 그 이름을 붙인 자리입니다. 두 성읍은 미디안 상인들이 오르내리는 교역로 위에 있었고, 그래서 미디안과 사이가 나빠지면 곧바로 손해와 보복을 감당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갈골과 노바와 욕브하는 그보다 더 동쪽 광야 길목입니다. 삼백 명은 이미 밤을 새운 몸으로 백여 킬로미터를 더 쫓아간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항의도 까닭이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로서 실로 성소를 품은 큰 지파였고, 여호수아 이후로 줄곧 지도적 위치를 자부해 왔습니다. 그들이 빠진 자리에서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체면이 상한 것입니다. 사사기는 이렇게 지파 연합이 조금씩 헐거워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십이 장에서 입다 때에는 같은 에브라임이 같은 항의를 하다가 사만 이천 명이 죽는 내전으로 번집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침묵을 기억해 두십시오. 여섯 장과 일곱 장에는 내려가라, 이 사람은 데려가라, 두렵거든 내려가서 들으라 하시는 음성이 계속 들렸습니다. 그런데 요단을 건넌 뒤로는 하나님의 명령도 만류도 한 번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 침묵 속에서 사람의 판단만으로 움직인 하루를 그대로 보여 준다는 사실이 오늘 본문을 읽는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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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끝물 포도와 맏물 포도

하나님은 다툼을 이기는 말보다 다툼을 가라앉히는 말을 귀히 보시며, 동시에 그 부드러움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함께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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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어찌하여 이같이 대접하느냐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삿 8:1). 기드온은 이렇게 답합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 8:2). 하나님이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기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였고, 이 말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립니다(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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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낱말을 보십시오. "크게 다투는지라"로 옮긴 표현은 폭력적으로라는 뜻의 부사와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때 쓰는 동사가 나란히 붙은 말입니다. 거센 소리만 낸 것이 아니라 잘잘못을 따지자고 멱살을 잡은 것입니다. 갓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삼백 명 앞에서 큰 지파가 이렇게 나섰습니다. 승리의 기쁨이 채 마르지 않은 자리에 공적을 따지는 목소리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성경은 이 다툼을 첫 절에 놓아, 이어지는 모든 일이 그 다툼의 공기 속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 줍니다.

기드온의 대답은 놀랍도록 지혜롭습니다. 끝물 포도와 맏물 포도라는 말은 흔히 오해되지만, 여기서 끝물로 옮긴 낱말은 제대로 익어 거둔 본 수확을 뜻하고 맏물로 옮긴 낱말은 수확이 끝난 뒤 남은 것을 주워 모으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그 말은 당신들이 뒤에 거둔 것이 내가 앞서 거둔 것보다 크다는 고백입니다. 자기를 이삭 줍는 사람 자리에 놓고 상대를 수확하는 사람 자리에 올린 것입니다. 노여움은 더 큰 목소리로 눌리지 않고 이렇게 낮추는 말 한마디에 풀립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장면에는 오늘 본문이 끝날 때까지 남는 물음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같은 입이 몇 절 뒤 숙곳을 향해서는 들가시로 살을 찢겠다고 합니다. 힘 있는 큰 지파 앞에서는 한껏 몸을 낮추고 변방의 작은 성읍 앞에서는 곧바로 칼을 듭니다. 그렇다면 앞의 낮춤은 겸손이었습니까, 계산이었습니까. 성경은 판결문을 써 주지 않고 두 장면을 나란히 놓아 우리가 읽으며 스스로 묻게 합니다. 대답을 미리 주지 않는 것도 성경의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참된 낮춤은 상대의 힘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신 분은 어린아이 앞에서도 무릎을 낮추셨습니다. 그분의 낮추심은 상대를 계산한 결과가 아니라 본래 그런 분이셨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부드러움도 거기까지 자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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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의 다툼을 가라앉히는 힘이 부드러운 말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유순한 대답이 분노를 쉬게 한다는 잠언의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그대로 확인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물어야 합니다. 내 부드러움이 상대의 힘을 보고 켜지는 스위치는 아닌지 말입니다. 당회 앞에서는 온화하고 아랫사람 앞에서는 단호한 목회자, 직장에서는 예의 바르고 집에 와서는 날카로운 성도, 후원자에게는 정중하고 민원인에게는 차가운 기관, 이것이 우리가 익숙해진 이중의 말투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같은 부탁을 두 사람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나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내가 아니어도 되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에게 같은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다면 그 부드러움은 계산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그리고 오늘 누군가 나에게 따지듯 말을 걸어오면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그 사람의 수고를 먼저 말해 주십시오. 그 한마디가 하루의 결을 바꾸고, 다툼으로 갈 뻔한 자리를 감사의 자리로 돌려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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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절 떡 한 덩이를 청하다

하나님은 지친 형제가 내민 손을 어떻게 대하는지로 한 공동체의 믿음을 재시며, 그 손을 내민 사람의 마음도 함께 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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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삿 8:4).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청합니다. "청하건대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삿 8:5). 숙곳의 방백들은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느냐고 되물으며 거절하고(6절), 기드온은 두 왕을 넘기시면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합니다(7절). 브누엘도 같은 대답을 하매 그 망대를 헐겠다고 말합니다(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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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에 걸리는 것은 기드온이 자기 사람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일곱 장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너와 함께한 백성이라 부르셨습니다. 곁에 나란히 선 동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기드온은 나를 따르는 백성이라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내 발에 있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동역자로 붙여 주신 삼백 명이 어느새 내 발치를 따라다니는 부하가 되었습니다. 낱말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 사이에서 무엇인가 크게 기울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대개 사건보다 낱말에서 먼저 새어 나옵니다.

숙곳과 브누엘의 대답도 찬찬히 읽어야 합니다. 그들의 말은 사실 정확한 계산이었습니다. 두 왕은 아직 붙잡히지 않았고, 두 성읍은 미디안 상단이 오르내리는 길목에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실패하고 돌아가면 보복은 그들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형제의 피곤을 저울 한쪽에 올리고 자기들의 안전을 다른 쪽에 올려 무게를 달았습니다. 저울에 올리는 순간 답은 이미 정해집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이미 여호수아 때부터 서편과 한 백성임을 의심받던 자리에 있었는데, 그 의심이 이 대답으로 굳어집니다. 떡 한 덩이를 아끼려다 형제 됨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당한 사람의 반응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기드온의 입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께 여쭙는 기도가 아니라 곧바로 이어진 형벌 예고였습니다. 들가시와 찔레는 광야 길에 흔한 가시덤불로, 사람의 살을 찢는 데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잔혹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브누엘은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며 붙인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붙은 망대를 헐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 불린 자리를 사람의 분노가 겨냥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마리아 마을이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불을 내리자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거절을 당하고도 축복으로 답하는 길이 있음을 그분이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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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자리에도 떡을 청하는 손과 떡을 청받는 손이 늘 함께 있습니다. 교회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부탁을 꺼낼 때 우리가 먼저 하는 일은 대개 계산입니다. 이 사람을 도우면 무엇이 따라올까, 나중에 이 일이 어떻게 돌아올까 하는 셈이 앞섭니다. 그런데 형제의 피곤을 저울에 올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숙곳이 되어 있습니다. 반대편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당했을 때 우리 마음에 가장 빨리 떠오르는 것은 명단입니다. 누가 외면했는지, 누가 못 본 척했는지가 또렷하게 기억됩니다. 그 명단을 적어 두는 순간 우리 손에는 떡 대신 들가시가 들립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곁의 한 사람이 지쳐 손을 내밀면 승산을 따지지 마시고, 내가 청했다가 거절당하면 명단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 두 가지만으로도 공동체는 훨씬 멀리 가고, 서로의 피곤을 저울에 올리지 않는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내 입이 사람들을 부를 때 함께한 이들이라 부르고 있는지 내 발에 있는 이들이라 부르고 있는지 오늘 한 번 들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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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7절 돌아와서 한 일

하나님은 이긴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를 보시며, 사람이 스스로 재판관의 자리에 올라앉는 순간을 조용히 기록해 두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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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은 갈골에 이르러 남은 군대를 흩고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습니다(10-12절).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삿 8:13) 숙곳 소년을 붙들어 방백과 장로 칠십칠 인의 이름을 받아 냅니다(14절). 그는 장로들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하고(16절),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입니다(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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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삼 절의 이름부터 눈여겨보십시오. 성경은 여기서 그를 여룹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라 부릅니다. 여룹바알은 바알과 다투라는 뜻으로, 아버지의 바알 제단을 헐던 날 마을이 그에게 붙여 준 이름이었습니다. 우상과 싸우는 사람이라는 그 이름이 요단 동편에서는 잠시 사라지고, 한 집안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전쟁을 치르던 사람이 이제 자기 집의 일을 하고 있다는 신호처럼 읽힙니다. 성경은 판단을 덧붙이지 않고 이름만 바꾸어 놓습니다.

다음은 숫자입니다. 그가 소년에게서 받아 낸 명단은 칠십칠 인이었고, 그 가운데 장로 일흔 명이 그날 징벌을 받습니다. 이 일흔이라는 수는 사사기를 계속 읽는 사람에게 소름 돋는 숫자입니다. 아홉 장에서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형제 일흔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입니다. 아버지가 일흔 명을 처단한 방식이 아들에게는 가장 익숙한 교본이 되었습니다. 폭력은 늘 다음 세대에게 자기를 물려줍니다. 오늘 아버지가 놓은 돌 위에서 내일 아들이 같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기드온은 사사기에서 자기 동족을 죽인 첫 사사가 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여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섯 장과 일곱 장에서 하나님은 거듭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요단을 건넌 뒤로는 명령도 없고 만류도 없습니다. 기드온은 묻지 않았고, 그래서 듣지 못했습니다. 그 빈자리에 사람의 판단이 들어앉습니다. 기소도 심문도 판결도 집행도 모두 한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사사는 본래 하나님의 재판을 대신 전하는 자리인데, 그가 스스로 재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묵상을 놓지 않으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하루는 가만히 있는 하루가 아니라 내 판단이 조용히 왕좌에 앉는 하루입니다. 기드온의 하루가 바로 그런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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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다음 날이 교회가 가장 자주 넘어지는 자리입니다. 한국교회의 크고 작은 분열 가운데 상당수가 박해가 아니라 성공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함께 어려운 일을 치르고 나면 반드시 누가 더 수고했는가라는 셈이 따라오고, 도와주지 않은 사람의 이름이 마음에 남습니다. 그 명단이 길어질수록 우리 손에 들린 들가시도 함께 길어집니다. 그러므로 일이 잘된 다음 날에 공동체가 먼저 펼쳐야 할 것은 성과 보고가 아니라 성경입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래 기도한 일이 풀린 다음 주에 우리가 가장 하기 쉬운 일은 그동안 나를 도와주지 않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마음에 적어 둔 명단이 있으시면 그 종이를 접어 오늘 아침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일 앞에서 한 번은 반드시 물어보십시오. 주님, 이것이 주님의 일입니까, 제 일입니까. 그 물음 한 번이 우리를 요단 동편에서 건져 내고, 이긴 다음 날을 감사의 날로 지키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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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1절 내 어머니의 아들들

하나님은 공적인 부르심과 사적인 원한이 뒤섞이는 자리를 밝히 드러내시며, 참된 구원은 오직 당신의 손에서 온다고 거듭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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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이 두 왕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자들이더냐"(삿 8:18). 그들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자 기드온이 답합니다.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삿 8:19). 맏아들 요셀에게 죽이라 하나 소년은 두려워 칼을 빼지 못하고(20절), 두 왕이 직접 치라 하매 기드온이 일어나 그들을 죽이고 낙타 목의 초승달 장식을 떼어 냅니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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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지막 대목에서 비로소 숨은 동기가 드러납니다.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본문 전체에서 가장 사적인 문장입니다. 다볼에서 죽은 형제들의 피가 그를 요단 동편까지 끌고 온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된 전쟁이 어느새 한 집안의 복수극으로 옮겨 앉았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더 마음에 걸립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사적인 결단을 봉인하는 도장으로 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보다 그 이름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가 한 사람의 신앙의 실상을 더 정확히 보여 줍니다. 맹세가 늘어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다음 장면은 오래 남습니다. 그는 맏아들 요셀에게 칼을 들려 사람을 죽이라 합니다. 소년은 아직 어렸고 두려워 칼을 빼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려 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나팔과 횃불 대신 칼을 들리려 했습니다. 그날 칼을 빼지 못한 소년의 두려움은 차라리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 집안의 다음 세대는 결국 칼을 들었고,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이 사사기 아홉 장을 피로 물들입니다.

두 왕이 남긴 말도 성경이 일부러 적어 둔 문장입니다.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삿 8:21). 사람의 크기가 곧 힘의 크기라는 세상의 잠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불과 며칠 전 삼만 이천을 삼백으로 줄이시며 그 잠언을 정면으로 뒤집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기드온은 자기가 무너뜨린 명제를 다시 세우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가 떼어 낸 초승달 장식은 미디안의 달 신을 상징하던 전리품이었고, 곧 스물넷 절에서 그 금붙이가 에봇이 되어 온 이스라엘의 올무가 됩니다. 사람의 힘을 믿기 시작한 손은 결국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손에 쥔 것이 늘어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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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역과 수고 안에도 공적인 부르심과 사적인 감정이 늘 섞여 있습니다. 문제는 섞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섞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실은 내 자존심이 상해서 밀어붙이는 일, 공동체를 위한다고 하면서 실은 나를 무시한 사람에게 보여 주려는 일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아픈 자리도 대개 그 지점에서 갈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내가 지금 무엇을 바라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일 하나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일이 잘 끝났을 때 가장 기쁠 이유가 무엇인지 끝까지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어서 기쁘다면 그 일은 주님의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여 줄 수 있어서 기쁘다면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손에 무엇을 들려주고 있는지 오늘 한 번 살펴보십시오. 칼이 아니라 나누어 줄 떡이 들려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물려주는 것이 다음 세대의 교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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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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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이긴 다음 날이 이렇게 위험한 줄

저희는 잘 몰랐습니다.

싸울 때는 주님을 불렀는데

이긴 뒤에는 이름을 세었습니다.

누가 도왔고 누가 외면했는지

마음에 명단을 적어 두었습니다.

그 종이를 오늘 내려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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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한 덩이를 기억하게 하소서.

어제는 그 한 덩이가 굴러와

대군의 장막을 엎었고

오늘은 그 한 덩이가 없어

사람이 무너졌습니다.

같은 떡인데 하나는 주셨고

하나는 사람이 구했습니다.

앞의 떡을 붙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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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입술을 지켜 주소서.

힘 있는 이 앞에서만

낮아지는 부드러움이 아니라

작은 이 앞에서도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함께한 이들이라 부르게 하시고

내 발에 있는 이들이라

부르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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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그친 자리에

제 판단이 왕으로 앉지 않게 하소서.

묻지 않는 하루가

가장 위험한 하루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주님께 여쭙게 하소서.

저희 아이들의 손에

칼이 아니라 떡이 들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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