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7:15-25 칼 없는 손에 들린 나팔과 횃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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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은 적진에서 들은 꿈과 해몽 앞에 경배하고 진영으로 돌아와 전쟁을 선포합니다(15절).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을 들리고, 자기를 보고 그대로 하라 하며 여호와와 기드온을 위하라는 군호를 정합니다(16-18절). 한밤중 파수꾼 교대 시각에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자 미디안 진영은 무너지고, 여호와께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십니다(19-22절).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가 추격에 나서고, 에브라임은 요단 나루를 점령해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처단합니다(23-25절). 승리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서 왔고, 숨어 지내던 포도주 틀은 적장이 쓰러지는 자리로 뒤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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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은 삼만 이천을 삼백으로 줄이시고, 두려워하는 기드온을 적진으로 내려보내 보리떡 꿈 이야기를 듣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밤이 밝기 전에 곧바로 이어집니다. 확신을 얻은 사람이 처음으로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확신이 어디를 향해 자라 가는지를 본문은 조용히 따라갑니다.
# 무대는 이스르엘 골짜기의 한밤중입니다. 고대 근동의 밤은 네 시간씩 세 경으로 나뉘었는데, 본문의 이경 초는 밤 열 시 무렵입니다. 임무를 마치는 보초는 가장 지쳐 있고 새로 서는 보초는 가장 낯선 시각입니다. 기드온의 무리가 진영 근처에 닿은 때가 바로 그 틈이었습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시각의 절묘함 역시 본문이 말하려는 섭리의 일부입니다.
# 무기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은 무기가 아니라 신호 도구입니다. 당시 전투에서는 선발대가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면 그 뒤로 본대가 따라오는 전법이 흔했습니다. 그러니 사방에서 동시에 터진 삼백 개의 불빛을 본 미디안은 자신들이 대군에 포위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상식을 거스르시되 사람의 형편을 모르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 끝으로 지파들의 형편입니다. 사사기는 지파 연합이 갈수록 헐거워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기드온은 애초에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만 불렀고 에브라임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끝에서 뒤늦게 부름받은 에브라임은 큰 전공을 세우지만, 곧이어 여덟 장에서 왜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느냐며 거세게 다툽니다. 오늘 본문은 승리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그 갈등의 씨앗이 뿌려지는 자리입니다. 구원의 이야기와 분열의 이야기가 한 문단 안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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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절 경배가 먼저였습니다
하나님은 확신을 주실 때 사람을 곧바로 싸움터로 내모시지 않고, 먼저 무릎을 꿇는 자리를 지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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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이 그 꿈과 그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삿 7:15). 그리고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합니다(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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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이 확신을 얻고 처음 한 일은 경배였습니다. 그가 엎드린 곳은 예배당이 아니라 적진 언저리였고, 들은 말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원수의 잠꼬대 같은 꿈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거기서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시든 그 말씀 앞에 엎드리는 자리가 신앙의 출발입니다. 양털을 두 번이나 놓고 표징을 구하던 사람이 이제는 표징 없이도 엎드립니다. 더딘 사람에게 하나님이 오래 참으신 시간이 마침내 열매를 맺는 순간입니다. 성경은 이 경배를 따로 설명하지 않고 한 낱말로만 적어 두지만, 그 한 낱말이 이어지는 모든 행동의 방향을 정합니다. 무릎을 꿇은 사람만이 일어나라고 외칠 자격을 얻습니다.
그다음 그는 일어나라고 외칩니다. 이 말은 전투 개시를 알리는 군사 용어로, 앞서 드보라가 바락에게 외쳤던 말과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하나님은 미디안을 넘겨주겠다 하셨고 적진의 병사는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이라고 말했는데, 기드온이 옮긴 말은 미디안 진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방금 들은 사람의 말을 더 가까이 붙들고 있습니다. 확신은 얻었으나 그 확신이 어디에 뿌리내렸는지는 아직 흔들립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이미 넘겨주셨다고 하신 말씀을 그는 너희 손에 넘겨 주셨다고 백성에게 전합니다. 약속을 자기 혼자 붙들지 않고 함께 선 이들의 몫으로 나눈 것입니다. 흔들리는 사람에게도 이런 아름다움이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무장이 이어집니다. 칼이 아니라 나팔이고 방패가 아니라 빈 항아리입니다. 앞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수를 백분의 일로 줄이셨는데, 이제 그 남은 손에서마저 무기를 거두십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병기의 우열로 결판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손에 다 들어 있습니다. 횃불을 항아리 속에 감추게 하신 것도 뜻깊습니다. 빛은 처음부터 있었으나 때가 되기까지 그릇 안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감추어 두는 시간과 드러내는 시간이 함께 있습니다. 세 대로 나눈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백 명씩 흩어 세워야 사방에서 동시에 빛이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적은 수가 적은 대로 흩어질 때 도리어 더 넓은 자리를 에워쌌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모아 크게 만드시기보다, 작은 것을 알맞게 흩어 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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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확신이 서면 곧바로 뛰어나가려 합니다. 기도 응답을 받은 다음 날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계획표를 펴는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먼저 엎드렸습니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순서도 이것입니다. 우리는 사역의 방향이 정해지면 즉시 조직을 짜고 예산을 세웁니다. 그 사이에 경배가 빠지면 그 사역은 시작부터 사람의 일이 됩니다. 개인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랜 기도의 답을 받으셨습니까. 답을 손에 쥐자마자 달려 나가지 마시고 잠시 무릎을 꿇으십시오. 무릎을 꿇는 그 짧은 시간이 이 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마음에 새겨 줍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손에 쥔 계획 앞에서 먼저 엎드려 보십시오. 그리고 내 손에 무기가 없어 불안하시거든 하나님이 그 손에 무엇을 들려 주셨는지 다시 세어 보십시오. 나팔과 횃불이면 충분합니다. 그 둘은 싸우는 도구가 아니라 알리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기라 하시기 전에 먼저 알리라 하십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전할 소식 하나가 우리 손의 나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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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8절 나만 보고 하라는 말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사람과 나누지 않으시고, 그 영광에 사람의 이름이 덧붙는 순간을 조용히 기록해 두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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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삿 7:17). 이어 나팔을 불며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외치게 합니다(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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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절을 소리 내어 읽어 보면 한 글자가 유난히 자주 들립니다. 나입니다.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히브리어 본문은 여기에 일인칭 대명사를 거듭 얹어 그 울림을 더합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보라 했고 여호수아도 그렇게 외쳤는데, 기드온은 백성의 눈을 자기에게 고정시킵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시선이 머무는 자리가 되는 순간, 공동체는 조용히 방향을 잃습니다. 삼백 명은 이 명령을 그대로 따랐고, 그래서 그날 밤 그들의 눈은 하나님이 아니라 기드온을 향해 있었습니다. 순종은 아름다웠으나 그 순종이 향한 방향에는 이미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군호는 더 마음에 걸립니다.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여기 쓰인 히브리어 전치사는 소유를 뜻하기도 하고 무엇을 위하여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이 구호는 여호와와 기드온에게 속한 칼로도, 여호와와 기드온을 위한 칼로도 읽힙니다. 고대 가나안의 한 비문에는 바알을 위하라, 파디를 위하라는 문구가 남아 있습니다. 신의 이름과 왕의 이름을 나란히 부르는 관습입니다. 기드온이 자기 이름을 그 자리에 놓은 것입니다. 왕이 되기를 사양하겠다고 말한 사람이 왕의 자리에서 쓰이던 문구를 먼저 입에 올린 셈입니다. 말은 마음보다 앞서 새어 나옵니다. 사사기는 그 새어 나온 말 한마디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대로 적어 둡니다.
더 눈여겨볼 것은 이 표현의 출처입니다. 기드온의 칼이라는 말을 맨 처음 꺼낸 이는 미디안 사람이었습니다. 원수의 입에서 나온 칭찬 한마디가 그의 군호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는 말이 나올까 염려하셔서 군사를 줄이셨는데, 사람은 그 줄어든 자리에 자기 이름을 다시 써넣습니다. 이 한 줄이 여덟 장의 비극을 미리 알려 줍니다. 참된 왕은 여호와 한 분이시고, 그 이름 곁에 나란히 설 이름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불리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붙잡을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이름을 얻으려 하지 않으신 분에게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름을 붙이려는 사람과 이름을 비우신 분이 오늘 본문 안팎에서 선명하게 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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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열매에 이름을 붙이고 싶은 마음은 목회자에게도 늘 따라다닙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순간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세월 동안 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교회를 많이 만들어 왔습니다. 설립자의 이름, 담임목사의 이름이 교회의 이름보다 크게 불리는 동안, 그 이름이 무너질 때 공동체도 함께 무너지는 일을 거듭 보았습니다. 이름은 한 번 들러붙으면 떼어 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가 세운 공을 이야기할 때 쓰는 말투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곧바로 그런데 제가라고 덧붙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우리가 이룬 일을 말할 때 문장의 주어를 바꾸어 보십시오. 그 한 번의 바꿈이 마음의 자리를 옮깁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이의 수고를 먼저 말해 주십시오. 내 이름을 지우는 가장 좋은 길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 주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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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절 깨뜨리자 빛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계략이 아니라 당신의 손으로 싸우시며, 스스로 무너지는 방식으로 대적을 흩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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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삿 7:19). 세 대가 일제히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칩니다(20절).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미디안은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합니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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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손을 보십시오. 왼손에 횃불이고 오른손에 나팔입니다. 두 손이 다 찼으니 칼을 쥘 손이 없습니다. 칼이다 하고 외치는 사람들의 손에 정작 칼이 없다는 이 역설이 본문의 심장입니다. 그리고 항아리가 깨집니다. 횃불은 처음부터 있었으나 그릇 안에 있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깨어진 다음에야 빛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이렇게 깨어지는 순서가 있습니다. 깨진 항아리는 다시 쓸 수 없습니다.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그릇이 그날 밤 빛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쓸모를 잃는 자리에서 쓰임이 시작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셈법입니다.
다음은 발입니다. 21절은 두 무리를 동사 하나로 갈라 놓습니다. 삼백 명은 각기 제자리에 서 있었고, 미디안은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서다라는 동사 하나와 달리다, 부르짖다, 도망하다라는 세 동사를 맞세워 대조를 만듭니다. 무장한 쪽이 뛰어다니고 빈손인 쪽이 서 있습니다. 서 있다는 것은 자기가 선 자리가 누구의 땅인지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은 앞서 달려 나가는 힘이 아니라 자리를 지키는 힘일 때가 많습니다. 그들이 서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용감해서가 아니라 오늘 밤의 주인이 누구인지 들었기 때문입니다. 들은 사람만이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 큰 군대를 무너뜨렸습니까. 성경은 사람의 작전을 칭찬하는 대신 한 줄로 못을 박습니다.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삿 7:22). 칼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었습니다. 나팔 소리와 횃불이 혼란의 계기는 되었으나 그 혼란을 일으키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십자가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무장이 풀린 두 손이 못 박히던 자리에서 하나님은 사망의 권세를 흩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사람의 손이 비어 있을 때 가장 또렷해집니다. 미디안이 서로를 친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압제자를 무너뜨린 것은 밖에서 온 칼이 아니라 그들 안에 이미 있던 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힘은 결국 제 안에서 갈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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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인가를 더 갖추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정이 마련되면, 사람이 모이면, 실력이 갖추어지면 그때 시작하겠다고 미룹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삼백은 갖추지 못한 채로 내려갔습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은 규모가 아니라 순서입니다. 손에 쥔 것이 줄어드는 시대에 교회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다시 커질 것인가가 아니라, 남은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가입니다. 나팔은 함께 외칠 말씀이고 횃불은 함께 나눌 빛입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래 붙들고 계신 기도 제목 앞에서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미루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준비가 끝난 뒤에 부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부르신 다음에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깨어져야 할 그릇이 무엇인지 조용히 살펴보십시오. 내 체면일 수도 있고 오래 세운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깨어질 때 비로소 우리 안에 감추어 두셨던 빛이 밖으로 나갑니다. 깨어짐은 끝이 아니라 쓰임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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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5절 포도주 틀에서 끝난 전쟁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웅크렸던 자리를 기억해 두셨다가, 바로 그 자리를 승리의 무대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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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삿 7:23). 기드온은 에브라임 온 산지에 사자를 보내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게 합니다(24절). 에브라임은 두 방백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입니다(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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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포도주 틀입니다. 기드온이 처음 등장한 자리가 바로 포도주 틀이었습니다. 미디안이 무서워 타작마당이 아니라 포도주 틀 안에 숨어 밀을 떨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구덩이는 본래 포도를 밟아 즙을 내는 곳인데, 미디안의 압제 아래에서 거둘 포도가 없어 곡식을 숨기는 자리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틀에서 미디안의 방백이 쓰러집니다. 숨던 자리가 이기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지명 하나로 전세가 완전히 뒤집혔음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르실 때 그가 어디에 웅크리고 있었는지 이미 보고 계셨고, 그 자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부르심의 자리와 마침의 자리가 같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서명입니다.
두 방백의 이름도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렙은 큰 까마귀, 스엡은 늑대라는 뜻입니다. 곡식을 쪼아 먹고 가축을 물어 가던 짐승의 이름을 가진 자들이 각각 자기 이름이 붙은 바위와 포도주 틀에서 최후를 맞습니다. 훗날 시편과 이사야는 이 오렙과 스엡의 날을 하나님이 압제자를 꺾으신 표본으로 거듭 노래합니다. 한 번의 구원이 세대를 건너 기억되는 노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날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의 믿음의 밑돌이 됩니다. 에브라임이 나루터를 막은 것도 눈여겨볼 일입니다. 요단 나루는 도망하는 자들의 유일한 퇴로였습니다. 앞에서 싸우는 손이 있으면 길목을 지키는 손도 있어야 한 전쟁이 끝납니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 그늘도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하시어 삼백으로 줄이셨는데, 승기를 잡은 기드온은 곧바로 사람을 다시 불러 모읍니다.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를 소집하고 에브라임까지 부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승리의 공적이 여러 지파 사이에서 다투어지기 시작하고, 여덟 장 첫머리에서 에브라임은 왜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느냐며 거세게 항의합니다. 하나님이 줄이신 자리를 사람이 다시 채우기 시작할 때 다툼이 들어옵니다. 물론 잔당을 소탕하려면 사람이 더 필요했을 것입니다. 본문도 그 일 자체를 나무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지시가 빠진 채 사람의 판단만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그 지점을 조용히 기록해 둘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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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뒤에 찾아오는 갈등은 교회가 가장 자주 넘어지는 자리입니다. 함께 어려운 일을 치르고 나면 반드시 누가 더 수고했는가라는 셈이 따라옵니다. 한국교회의 크고 작은 분열 가운데 상당수가 박해가 아니라 성공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일이 잘된 다음 날을 더 조심해서 지나가야 합니다. 그날에 필요한 것은 성과 보고가 아니라 감사의 자리입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응답된 다음 날, 아이의 일이 잘 풀린 다음 주에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 돌리던 영광이 슬그머니 내 몫으로 옮겨 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나의 포도주 틀이 어디인지 떠올려 보십시오. 가장 두려워 숨었던 자리, 가장 부끄러워 말하지 못한 자리가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잊지 않으시고 기억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숨었던 구덩이가 간증의 자리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를 서둘러 덮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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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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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 손은 늘 무엇인가로 가득합니다.
쥐어야 안심이 되고 채워야 나설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살았습니다.
오늘 삼백의 손을 봅니다.
칼도 창도 없는 두 손에 나팔과 횃불만 들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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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뜨리소서.
저희 안의 빛을 가두고 있는 그 단단한 그릇을 깨뜨리소서.
체면이라는 그릇, 계획이라는 그릇, 쌓아 온 경력이라는 그릇을
주님의 때에 부수어 주시고 그 틈으로 빛이 나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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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 서게 하소서.
앞서 달려 나가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주님이 세우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게 하소서.
칼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싸우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이기고 난 아침에도 잊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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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숨었던 포도주 틀을 기억하고 계신 주님,
가장 두려웠던 그 자리를 간증의 자리로 바꾸어 주소서.
승리한 다음 날에, 주님의 이름 곁에, 저희 이름을 놓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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