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6:25-40 밤에 헐린 제단, 밤에 내린 이슬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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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06:25-40 밤에 헐린 제단, 밤에 내린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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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아버지의 바알 제단을 헐고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으며,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그 나무로 번제하라 명하십니다(25-26절).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그대로 행하되 두려워서 낮이 아니라 밤에 행합니다(27절). 아침에 성읍 사람들이 범인을 찾아내 그를 죽이라 하지만, 아버지 요아스가 바알이 참 신이면 스스로 다투게 하라고 맞서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 불립니다(28-32절). 미디안 연합군이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치자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고 네 지파가 모여듭니다(33-35절). 그러나 그는 양털로 두 번이나 표징을 구하고, 하나님은 두 번 다 그대로 행하십니다(36-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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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우리는 기드온이 상수리나무 아래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 살롬이라 이름 붙이는 자리에서 본문을 닫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날 밤에 이어집니다. 평화라는 이름을 붙인 그 밤에 하나님은 곧바로 다음 명령을 내리십니다. 제단을 쌓은 손으로 이제 제단을 헐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감격은 오래 머무를 틈을 얻지 못하고 곧바로 구체적인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 오브라의 바알 제단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25절이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이라 부르는 이 제단은 아비에셀 가문과 성읍 전체가 함께 쓰던 공적인 신당이었고, 요아스는 그 제단을 관리하던 유력자였습니다. 사람들이 신당을 찾을 때마다 예물과 비용이 오갔으니, 그 제단은 종교인 동시에 가문의 경제였습니다. 제단을 헌다는 것은 집안의 밥줄을 끊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 사사기의 순환은 배교와 압제와 부르짖음과 구원자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 때문에 고통당한다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바알 때문에 미디안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미디안은 결과이고 바알이 원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압제를 끝내시기 전에 우상숭배부터 끝내십니다. 밖의 대적보다 안의 우상이 먼저입니다. 원인을 그대로 둔 채 결과만 치우면 같은 일이 되풀이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 후반부의 무대는 이스르엘 골짜기입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의 기름진 평야이자 므낫세 지파의 심장부에 적군이 진을 쳤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는데, 원문은 영이 그를 옷처럼 입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세 번뿐인 이 표현은 능력의 출처가 사람이 아님을 못 박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에, 여전히 주저하는 한 사람의 양털이 타작 마당에 놓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밤에서 시작해 밤으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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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7절 밤에 헐린 제단

하나님은 밖의 원수를 치기 전에 안의 우상을 먼저 다루시고, 두려움이 다 걷히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두려운 채로 내딛는 걸음을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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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삿 6:25). 그리고 산성 꼭대기에 규례대로 제단을 쌓아 찍어 낸 아세라 나무로 그 수소를 번제하라 하십니다(26절).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말씀대로 행하되, 가문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삿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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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의 세목마다 뜻이 박혀 있습니다. 번제물에는 본래 나이 제한이 없는데 여기서는 굳이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지목하십니다. 칠 년은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손 아래 신음한 바로 그 햇수입니다. 압제와 같은 나이를 먹은 짐승을 잡아 드리는 일은, 그 압제의 세월을 통째로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상징이 됩니다. 아세라 상을 땔감으로 쓰라는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읍 사람들에게 그것은 신이었지만 하나님께는 한 토막 나무였습니다. 우상은 부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드러날 때 비로소 힘을 잃습니다. 아세라 상이 번제의 땔감으로 타오르는 순간, 성읍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신은 불꽃 몇 자락으로 사라지는 나무였음이 온 마을 앞에 드러납니다.

장소도 우연이 아닙니다. 산성 꼭대기는 성읍 어디에서나 올려다보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몰래 치우라 하지 않으시고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새 제단을 쌓으라 하십니다. 신앙은 마음 안에서만 정돈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눈에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김회권은 이 대목을 아비 집과의 거룩한 불화, 곧 창조적 분리라고 읽습니다. 기드온이 헐어야 했던 것은 나무 기둥 하나가 아니라 자기를 길러 낸 세계의 질서였습니다. 아버지의 밥상과 성읍의 인심과 가문의 이름이 모두 그 제단에 얹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이 일을 밤에 했다고 굳이 적어 둡니다. 성경은 그의 두려움을 감싸 주지도, 그렇다고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두려워하면서도 행하였다고 적을 뿐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숨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담대해진 다음에 오라 하지 않으시고 떨리는 손을 그대로 쓰십니다. 훗날 니고데모도 밤에 예수를 찾아왔고, 그 밤의 걸음이 결국 십자가 아래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용기가 아니라 시작된 순종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은 내가 충분히 담대한가가 아니라, 떨면서라도 오늘 한 걸음을 옮겼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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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오랫동안 밖을 향해 싸워 왔습니다. 세상의 풍조를 탓하고 시대의 악을 꾸짖는 데는 익숙하지만, 정작 우리 안에 세워 둔 제단은 헐지 못했습니다. 숫자와 건물과 성공이라는 이름의 아세라가 교회 마당 한쪽에 여전히 서 있습니다. 미디안을 이기기 전에 바알을 헐라는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 먼저 주어진 말씀입니다. 밖의 적을 이겨도 안의 우상이 그대로면 승리는 곧 다른 속박이 됩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제단이 어디에 서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안전하다는 확신, 인정받아야 살아 있다는 느낌, 자녀의 성적과 내 노후의 계산이 그 제단 위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헐면 손해가 나는 자리, 바로 거기가 우리의 오브라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두려움이 다 사라진 다음에 순종하려 하지 마십시오. 기드온도 끝내 두려웠고 그래서 밤에 갔습니다. 다만 갔습니다. 오늘 하루 떨리는 마음 그대로 한 걸음만 내딛으십시오. 하나님은 그 걸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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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32절 바알이 스스로 다투게 하라

하나님은 우상의 무능을 사람의 논증으로가 아니라 침묵과 사건으로 드러내시고, 대적의 입술까지 돌이켜 당신의 종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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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삿 6:28). 그들은 캐어 물어 기드온을 찾아내고 요아스에게 몰려와 아들을 끌어내라 합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삿 6:31) 하고 맞섭니다. 그날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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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절의 본즉은 히브리어 히네, 곧 보라는 감탄사입니다. 저자는 이 한 낱말로 아침 마당에 선 사람들의 놀란 눈을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이어지는 캐어 물은 후에라는 표현도 원문에서는 찾고 또 찾았다는 두 동사가 나란히 놓입니다. 그들은 범인을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수소문했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일에 이토록 열심이던 사람들이, 정작 그 열심 때문에 나라가 미디안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에는 조금도 이르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보다 무서운 것은 우상에 익숙해진 마음입니다. 그들은 누가 그랬느냐만 캐물었을 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는 묻지 않았습니다. 범인은 찾아냈으나 원인은 끝내 찾지 못한 셈입니다.

요아스의 반문은 법정의 언어입니다. 다투다로 옮긴 낱말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소송에서 쓰는 말입니다. 지금 성읍 사람들은 바알의 변호인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너희가라는 말을 두 번 되풀이하며 묻습니다. 신을 위해 사람이 변론해야 하고 사람이 신을 구원해야 한다면, 그 신은 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물음 앞에서 바알은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조롱하던 그 침묵이 여기서 먼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논파하지 않으시고 그저 말할 기회를 주십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곧 답입니다. 참 신이라면 변호인이 필요 없고, 변호인이 필요한 신이라면 이미 신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기드온에게 새 이름이 붙습니다. 여룹바알, 바알이 그와 다투게 하라는 뜻입니다. 조롱과 야유가 담긴 이 별명이 그의 평생 이름이 되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 이름을 붙여 준 이들이 어제까지 바알을 섬기던 성읍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기드온을 죽이라던 입이 이제 바알을 비웃는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기지 하나를 붙드셔서 성읍 전체의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손은 대개 우리가 세어 두지 않은 쪽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우상의 무능을 설교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한 사건으로 보여 주셨고, 그 사건의 증인으로 어제의 대적들을 세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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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며 바알의 제단 앞에 무릎 꿇으라 요구합니다. 돈이 있어야 안전하고 힘이 있어야 대접받는다는 말이 아침저녁으로 귀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여룹바알입니다.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논쟁의 기술이 아니라 바로 이 이름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투는 데 능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무엇을 섬기지 않기로 했는지는 잘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우상은 반박으로 무너지지 않고 섬기지 않는 사람 하나로 무너집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무엇 앞에 서지 않느냐로 드러납니다. 남들이 다 절하는 자리에서 혼자 서 있기, 모두가 당연하다는 셈법을 조용히 거절하기, 그것이 이 시대의 제단 헐기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선 사람 곁에는 반드시 요아스 같은 이가 세워집니다. 하나님은 혼자 서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편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것이고, 세우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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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5절 옷 입듯 임하신 영

하나님은 사람의 자격을 보시고 일을 맡기지 않으시고, 자기 영으로 그 사람을 입히셔서 감당하지 못할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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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삿 6:33). 그때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삿 6:34). 이어 그는 온 므낫세와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사자를 보내고, 그 무리가 올라와 그를 영접합니다(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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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절의 임하시니는 원문에서 옷을 입다라는 동사입니다. 정확히는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옷으로 입으셨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영을 걸친 것이 아니라 영이 그 사람을 입으신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표현은 세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주도권이 어디 있는지가 이 한 낱말에 다 들어 있습니다. 어제까지 밤에만 움직이던 사람이 오늘 대낮에 나팔을 붑니다. 달라진 것은 그의 성격이 아니라 그를 감싼 분입니다. 옷은 입은 사람의 몸매를 바꾸지 않지만, 그 사람이 어디에 설 수 있는지는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여든 까닭도 분명해집니다. 아비에셀은 바로 어제 그를 죽이려던 가문입니다. 그 가문이 제일 먼저 그의 뒤를 따릅니다. 상비군도 없고 무기도 변변찮은 지파들이 약탈 전쟁으로 단련된 미디안 앞에 모여드는 것은 지도력의 성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결과입니다. 다만 사사기가 말하는 여호와의 영은 인격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 힘이 아니라 특정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능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영에 감싸인 기드온이 곧이어 양털을 꺼내 드는 장면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능력을 입는 것과 사람이 자라는 것은 같은 속도로 오지 않습니다.

여기에 겸손해질 이유와 소망을 가질 이유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능력을 받았다고 해서 내 사람됨이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경고가 하나요, 내 사람됨이 미완인 채로도 하나님은 나를 쓰신다는 약속이 또 하나입니다. 훗날 기드온이 금 에봇을 만들어 이스라엘의 올무가 된 일은 앞의 경고를 아프게 증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나팔 소리는 뒤의 약속을 환하게 증명합니다. 아직 자라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의 옷을 입으면 한 시대를 건져 내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신 뒤에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리에서 우리를 입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능력의 기억이 아니라 입혀 주신 분과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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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명 앞에서 늘 자격을 셉니다. 나는 말주변이 없다, 시간이 없다, 아직 믿음이 어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자격의 목록이 아니라 옷 입히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한국교회가 지도자를 세울 때에도 이 순서를 자주 뒤집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 자리에 앉히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입히신 사람을 알아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유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입혀지기 위해 두 팔을 드는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맡겨진 자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병실에서, 교회의 작은 섬김의 자리에서 그렇습니다. 그 자리가 버거우실 것입니다. 버거운 것이 정상입니다. 다만 나팔을 부십시오. 소리를 듣고 모여드는 이들은 여러분의 능력을 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입히신 분을 보고 옵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십시오. 무리는 늘 가장 가까운 한 사람에서 시작됩니다. 기드온의 뒤를 처음 따른 이들도 멀리서 온 용사가 아니라 바로 그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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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40절 두 번의 양털, 두 번의 밤

하나님은 더딘 믿음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요구하는 그대로 응답하시며, 사람이 자라기를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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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삿 6:36) 하고 그는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둡니다.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된지라"(삿 6:38). 그러나 그는 다시 노하지 마시라 청하며 이번에는 양털만 마르고 땅은 젖게 해 달라 구하고, 하나님은 그 밤에도 그대로 행하십니다(39-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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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부터 눈에 걸립니다. 군대는 이미 모였고 전쟁 준비는 끝났습니다. 바로 그때 기드온이 양털을 꺼냅니다. 36절과 37절에 이미 말씀하심 같이라는 말이 두 번 되풀이되는 것은 그의 의심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이미 하신 말씀을 그는 아직 붙들지 못합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대목에서 저자가 여호와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일반적인 호칭을 쓴다는 점입니다. 전성민은 이 호칭의 변화에서 기드온이 아직 그분을 이스라엘과 언약 맺으신 여호와로 온전히 알지 못했을 가능성을 읽어 냅니다. 안다고 해서 곧 믿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에 담긴 지식과 몸을 움직이는 신뢰 사이에는 생각보다 먼 거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사실 자연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양털은 본래 물기를 잘 머금으니 밤이슬이 고르게 내려도 땅만 먼저 마를 수 있습니다. 기드온도 그것을 알았던 듯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뒤집습니다. 양털만 마르고 온 땅이 젖는 일은 어떤 자연 현상으로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번만이라는 말을 거듭하며 조심스레 청합니다. 자기 요구가 지나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조심스러움이 그의 마지막 양심이고, 하나님은 그 떨리는 양심을 내치지 않으십니다. 무례를 알면서도 청할 수밖에 없는 자리, 그것이 사람의 정직한 밑바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에는 말이 없습니다. 책망도 훈계도 없이 그저 그대로 되었다고 적힐 뿐입니다. 양털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다는 38절의 묘사는 하나님이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이슬은 소리 없이, 밤에, 조금씩 내립니다. 하나님이 더딘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이 꼭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에게 손가락을 내밀라 하신 일도 같은 자비였습니다. 믿지 못하는 자를 밀어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만져 보라 내미시는 손, 그 손이 사사 시대의 타작 마당에도 이미 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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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의심하는 사람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흔들리는 이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번이나 양털을 적셔 주셨습니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확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확신이 자라기를 기다려 주는 품입니다. 질문을 금지하는 공동체에서는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침묵만 자랍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느끼신다면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셨다고 읽지 마십시오. 그분은 지금 내 마음에 이슬을 내리고 계신 중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곁에도 양털을 놓고 밤새 뒤척이는 이가 있습니다. 오래 앓으신 분, 기도가 끊긴 지 오래인 분, 교회를 떠날까 망설이는 젊은이가 그렇습니다. 그에게 믿으라고 다그치는 대신 곁에 앉아 그 밤을 함께 지내 주십시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밤을 함께 건너 준 사람 하나가 있으면, 사람은 다시 아침을 맞을 힘을 얻습니다. 옳은 말 한마디보다 함께 앉아 있는 한 시간이 더 멀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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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평화라 이름한 그 밤에

곧바로 제단을 헐라 하신 주님,

저희 안에도 아직 서 있는 기둥이 있습니다.

헐면 손해가 나는 자리마다

주님의 손을 먼저 얹어 주옵소서.

두려운 채로 가는 걸음도

받아 주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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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하는 신을 위하여

사람이 변론하는 시대에

저희를 여룹바알로 세워 주옵소서.

남들이 다 절하는 자리에서

조용히 서 있게 하시고

혼자인 줄 알았던 자리에

요아스 같은 이를 붙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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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 저희를 입히시는 하나님,

자격을 세는 입을 닫게 하시고

맡기신 자리에서 나팔을 불게 하옵소서.

저희 사람됨이 아직 미완이어도

쓰시겠다 하신 약속을 붙듭니다.

가장 가까운 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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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털을 두 번 적셔 주신 주님,

저희 더딘 믿음을 아시오니

오늘도 소리 없이 이슬을 내려 주옵소서.

흔들리는 이를 다그치지 않게 하시고

그 밤을 함께 지내게 하옵소서.

기다려 주시는 사랑으로

저희도 누군가를 기다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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